항목 ID | GC017017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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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石文 |
영어의미역 | Epigraph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충청남도 공주시 |
시대 | 고대/삼국 시대,고려/고려,조선/조선 |
집필자 | 홍제연 |
[정의]
충청남도 공주시에서 발견된 철이나 청동 등 쇠붙이나 석재에 기록한 글씨나 그림.
[개설]
금석문은 보통 금속이나 돌에 새겨진 문자를 뜻하며, 넓게는 나무·토기·그릇·직물·전돌·기와 등에 기록된 문자를 포괄하여 부르기도 한다. 역사 연구에 있어 고문서 등의 기록과 함께 특히 주목되는 자료이다. 금석문의 기록을 통해 지역의 지명·인명(행적)·연대 및 건립 경위와 주체 등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관찬(官撰)이나 중앙 중심 문헌 자료의 한계를 보완하는 자료적 가치가 있다.
[묘비]
금석문으로 분류되는 것 중 가장 많은 것이 돌에 새긴 비석류이다. 비석은 직사각형 모양의 비(碑)와 한쪽 면을 둥글게 만든 갈(碣)로 나누기도 하지만, 그 구분이 엄격하지 않아 통용되고 있다. 비갈 중에서는 죽은 사람의 이름과 신원, 생애 등을 기록한 묘비가 가장 흔하게 나타나고 있다.
공주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묘비문은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묘지석이다. 무령왕릉 묘지석은 무덤의 주인공과 백제 왕실의 국상(國喪)과 장례(葬禮) 풍습을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이 묘지석은 사각형의 판석 2장에 무령왕과 왕비의 묘지명을 각각 음각하여 기록했으며, 뒷면에는 방위도와 왕릉이 들어설 곳을 땅의 신으로부터 매입했다는 매지권(買地券)이 적혀 있다. 이 묘지석의 발견으로 무덤을 축조한 시기와 무덤의 주인공에 대한 사실을 알 수 있게 되었다.
공주에서 통일신라시대에 제작된 묘비는 나타나지 않고 있으며, 고려시대에 이르러 지석이 보편화되었다. 지석은 일반적으로 ‘묘지(墓誌)’로도 불린다. 묘지는 오로지 전기(傳記)와 같이 사실만을 적은 산문을 말하며, 묘명은 적힌 사실에 대해 논의를 덧붙여 시로 읊은 운문을 말한다. 따라서 지석에 실린 글 가운데 묘지와 묘명 두 가지의 내용이 함께 있을 때에는 묘지명이라고 부른다. 고려시대의 지석은 현재까지 약 300여 개의 실물이 발견되었으며, 문헌에서도 확인된다. 공주와 관련된 인물의 묘지명은 최시윤 묘지명(崔時允 墓誌銘)[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이 있다.
조선시대에도 묘지명을 만들어 땅에 묻는 일이 많았으나, 공주에서 지금까지 발견된 것은 100여 개이다. 묘지명은 돌판뿐만 아니라 청자나 백자를 네모난 판 모양으로 만들고 그 위에 글자를 쓴 경우도 나타난다. 죽은 이를 기리기 위한 묘비는 흔하게 발견된다. 조상에 대한 효를 최고의 가치로 여겼던 조선시대에는 국가의 규제가 있었음에도 화려한 양식의 묘비가 많이 나타나며, 양반 사족 가문의 묘역에서 많은 묘비가 확인된다. 묘비의 내용은 일반적으로 전면에 이름을 쓰고, 삼면에 죽은 이의 행적을 적은 후 마지막에 글을 지은이와 쓴 사람의 이름을 적었다.
한편, 관직으로 정2품 이상의 뚜렷한 공업과 학문이 뛰어나 후세의 사표(師表)가 될 만한 인물에 대해서는 군왕보다도 위대할 수 있는 일이라 하여 신도비(神道碑)를 세워 기리도록 하였다. 공주에서는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 이귀(李貴)의 신도비와 오시수(吳始壽)의 신도비가 대표적이다. 묘비와 신도비 등은 죽은 자의 긍정적인 면만을 기록하기 때문에 사료로서의 가치가 뛰어나다고 할 수는 없으나, 알려지지 않은 개인의 일대기를 파악하는 데에 좋은 자료이다.
[기념비]
역사적 사건이나 개인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도 흔히 볼 수 있다. 공산성 내에 세워진 명국삼장비와 쌍수정 사적비 등은 임진왜란기 공주의 상황을 보여주는 기록으로서 훗날 일제에 의해 파괴되는 수모를 겪기도 하였다.
또한 공주를 거쳐간 수많은 관료들의 선정비도 다량으로 발견된다. 공주시 곳곳에 세워져 있던 선정비들은 문화재 보호 차원에서 한곳에 모아두고 있는 실정이다. 공산성 입구에 일렬로 늘어선 선정비와 면사무소 등에 세워져 있는 몇 기의 선정비 등을 쉽게 접할 수 있다.
선정비는 형태가 다양하며, 전면에 관직과 이름을 새기고, 그 좌우에 기념할 만한 내용을 기록하거나 비석의 삼면을 활용해 글을 음각하기도 한다. 선정비가 세워진 관리들이 모두 선정을 베풀었다고는 할 수 없기 때문에 선정비는 금석문의 한계가 드러나는 유적이다.
충·효·열의 삼강(三綱)을 실현한 인물들의 금석문도 기념비의 하나라 할 수 있다. 충·효·열의 행적으로 국가적 포상이 내려진 경우는 인물의 행적을 기록하는 동시에 눈에 띄는 장소에 세워 집안의 자랑으로 내보이기도 하였다. 공주시 소학동에 있는 신라 경덕왕 때의 효자 향덕의 비석은 당대에 세워진 비석과 함께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를 비롯하여 『신증동국여지승람』·『삼강행실도』·『신증동국삼강행실도』 등에서 기록이 확인된다. 이 비는 1741년(영조 17) 충청도관찰사였던 조영국(趙榮國)이 찬한 ‘신라효자향덕정려비(新羅孝子向德旌閭碑)’와 함께 나란히 있어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효자 기념비로 알려져 있다.
[기타 금석문]
사찰 내에 세워진 사적비·사찰 중건비·승려의 기념비·범종에 기록된 문자·대들보에 쓰인 건물 건축 연대 등도 중요한 금석문의 하나이다. 공주 갑사와 신원사 등 수백년 역사를 지닌 고찰의 경우 사찰 경내에서는 이와 같은 금석문이 다수 확인된다.
공주 갑사의 동종은 보물 제478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종의 몸체에 쓰인 ‘갑사(岬士)’라는 명문을 통해 이 절의 이름이 한때 ‘갑사사(岬士寺)’로 불렸음을 확인할 수 있다. 갑사에 보관되어 있는 월인석보 판목은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불교 대장경으로 15세기의 글자와 말을 확인 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기도 하다.
향교·서원·사우 등에서도 창건과 중건, 배향 인물에 대한 기념비 등이 있다. 공주시 반포면 공암리에 있는 충청우도 최초의 사액 서원인 충현서원에는 충현서원 사적비, 충현서원 사실 및 송우암 추향비, 하마비(下馬碑) 등이 있어 서원의 창건 과정과 역사 그리고 서원의 운영에 큰 역할을 했던 우암 송시열의 행적을 확인 할 수 있다.
한편, 갑사 골짜기는 예로부터 시인묵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곳으로 ‘갑사구곡’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갑사구곡 곳곳의 기암괴석에는 옛 사람들이 남긴 글귀가 새겨져 있기도 하다. 돌이나 쇠에 새겨진 글자 외에 기와나 그릇 등에 새겨진 글은 대체로 제작자의 이름이나 제작 장소 등이 간단하게 나타나 있기도 하다. 분청사기로 유명한 공주 일대에서 제작된 그릇을 통해 당시 요지(窯址)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