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400559 |
---|---|
한자 | 烈女 |
영어공식명칭 | A Woman of Chaste Reputation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충청남도 당진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남석 |
[정의]
충청남도 당진 지역에서 시부모와 남편을 극진히 섬긴 부인.
[개설]
일반적으로 열녀(烈女)는 위난(危難)을 당하여 목숨으로 정조(貞操)를 지켰거나, 오랜 세월 동안 고난과 싸우며 수절(守節)한 부녀자를 일컫는다.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여성 특유의 정절 윤리가 강조되었다. 외세의 침투를 많이 겪은 탓에 외적의 성 착취에 대항하여 목숨으로 정조를 지킨 사례가 다수 나타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여성에 대한 정절을 체계적으로 강조한 것은 조선 시대였다. 성리학적 윤리관을 국가의 통치 이념으로 정착시킨 조선 시대의 지배층은 상하·귀천을 막론하고 과부가 되면 마땅히 수절하고, 위난을 당하면 목숨을 바쳐 정조를 지키는 것이 부녀자의 도리임을 강요하며 자연스러운 여성의 처신으로 정착시켰다.
비교적 남녀 평등이 이루어진 조선 전기를 지나면서, 사회는 보다 철저한 여성의 희생을 요구하였다. 재가녀(再嫁女)는 철저히 응징되었고, 그 자손은 크고 작은 과거 시험에 응시할 수 없게 만들었다. 여성은 여필종부(女必從夫)라는 말과 같이 한 남자를 위해 살아야 했다. 남편이 위독하면 부모 봉양하듯이 손가락을 끊어 피를 먹이기도 하였고, 남편이 사망하면 수절은 당연하고 남편의 뒤를 따라 자결하는 것도 수긍하기에 이른 것이다.
열부(烈夫)는 없어도 열녀는 있어야 했던 전통적인 여성상은 가부장제에서 파생되고 유학적 세계관이 정착시킨 관습이었다. 한 명의 가장을 중심으로 운영되는 가족 제도는 한 명의 국왕을 위주로 운영되는 국가 통치 체제와 일맥상통하였다. 절의(節義)와 충절(忠節)은 같은 개념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당진 지역에도 열녀문이 여러 곳에 세워져 있다. 문헌에 등장하는 열녀를 위주로 살펴본다.
[현황]
1933년에 간행된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 당진군 열녀 편을 보면 48명을 기록하고 있다. 그 명단과 행적은 다음과 같다.
1) 경주 최씨: 남편을 공경하고 친아버지가 사망하자 3년상을 치렀다. 양자를 들여 가계를 잇게 하였다.
2) 윤씨: 이연의 아내로 효성이 지극했다.
3) 박씨: 김지인(金之寅)의 아내로 효행이 있다.
4) 밀양 박씨: 박득수(朴得洙)의 딸로 전주 이씨 이창선(李昌善)의 아내다. 시어머니 병환을 홍시를 구해 드려 고쳤다.
5) 밀양 박씨: 박봉진(朴鳳鎭)의 딸이다. 김해 김씨 김영신(金榮臣)의 아내다. 시아버지가 술을 좋아하여 힘을 다해 술과 안주를 구해 올렸다. 시아버지 장례 시에 몸이 상할 정도로 슬퍼하였다.
6) 창녕 성씨: 김해 김씨 김계용(金桂龍)의 아내다. 병환 중인 시아버지의 대소변을 10년을 하루같이 받아 내는 등 정성을 다하였다.
7) 경주 김씨: 김진제(金鎭濟)의 딸이다. 전주 이씨 이승록(李承錄)의 아내다. 남편이 일찍 사망하였으나 효성으로 시부모를 봉양하였다.
8) 밀양 박씨: 박진동(朴鎭東)의 딸이다. 천안 김씨 김원선(金元先)의 아내다. 시아버지가 위독하자 손가락을 찢어 피를 흘려 넣어 이틀을 더 살게 하였다. 병환 중인 시어머니의 대소변을 십여 년간 받아 냈다.
9) 김해 김씨: 김영태(金泳泰)의 딸이다. 경주 최씨 최남수(崔南洙)의 아내다. 남편이 위독하자 손가락을 찢어 피를 넣어 주었으나 결국 사망하였다. 남편을 따라 죽으려다 시부모를 위해 실행치 못하였다. 시부모를 극진히 봉양하였고, 자손을 온전히 양육하였다.
10) 김해 김씨: 김후식(金厚植)의 딸이고 최상환(崔相煥)의 아내다. 섣달 그믐날에 콩국을 끓이는데 어린 아들이 실수로 솥에 빠져 죽었다. 그러자 이를 지켜 본 시어머니 조씨가 경악하여 정신을 잃었다. 김해 김씨는 죽은 아들을 버리고 시어머니를 부축하며 위로하였다.
11) 나주 임씨: 임현수(林顯洙)의 딸이고 밀양 박씨 참봉 박준기(朴準箕)의 아들 박용래(朴容來)의 아내다. 남편이 병들자 하늘과 땅에 정성스런 기도를 올렸다. 시아버지를 극진히 봉양하여 매일 밤 음식과 고기를 끊긴 적이 없다.
12) 의령 남씨: 충장공 남이흥(南以興)의 후손으로 원주 김씨 김행원(金行源)의 아내다. 남편이 위중하자 대소변을 맛보며 하늘에 기도하였다. 남편이 사망하자 뒤따라 죽지 않고 시부모 봉양에 최선을 다하였다.
13) 교하 노씨: 안병정(安炳鼎)의 아내다. 16세에 시집갔는데 남편이 병약했다. 3년을 의술로 치료하였으나 효과가 없자 손가락을 찢어 피를 먹였다. 남편이 결국 사망하자 음독하고 우물에 빠져 죽으려 하였으나 실패하였고, 여생을 시부모 봉양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
14) 풍천 노씨: 노성필(盧聖弼)의 딸이다. 창녕 조씨 조명환(曺明煥)의 아내다. 시아버지가 새벽에 나가 밤늦게 돌아왔는데 초를 밝혀 들고 5리 또는 10리까지 나가 맞이하기를 5년 동안 한 번도 거르지 않았다.
15) 창녕 성씨: 성의환(成義煥)의 딸이다. 해남 윤씨 윤정호(尹晶浩)의 아내다. 술을 좋아하는 시아버지를 위해 몹시 가난함에도 불구하고 음식과 술이 끊이지 않게 했다. 시부모 장례를 치르는 데 몸이 상할 정도였다.
16) 의성 김씨: 김재구(金在龜)의 딸이며 전주 이씨 이인순(李麟純)의 아내다. 시집간 지 5년 만에 남편이 죽자, 3일 동안 곡기를 끊고 따라서 죽고자 하였다. 하지만 시부모에게 자손이 없음을 염려하여 죽지 못하고 효성으로 봉양하였다. 시아버지가 병으로 시력을 잃자 19년 동안 극진히 병환을 돌보았고, 양자를 입양하여 가문을 잇게 하였다.
17) 경주 김씨: 오위장(五衛將) 김명제(金明濟)의 딸이며 경주 최씨 최영수(崔英洙)의 아내다. 시아버지가 병으로 눕자 대소변을 맛보아 병세를 가늠하였고, 장례를 치르면서 자신의 몸이 상할 정도로 애통해 했다.
18) 이옥경(李玉卿): 본관은 전주, 오동춘(吳東春)의 아내다. 집안이 너무 가난하였지만, 한 자 되는 옷감이나 한 그릇의 음식이라도 얻으면 반드시 시아버지에게 바쳤다.
19) 신평 호씨: 진사 호정일(扈精一)의 딸이다. 선공감 주부 진주 강굉(姜宏)의 아내다. 시집갔지만 일찍이 과부가 되었다. 시아버지가 병들자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먹여 생명을 연장시켰다. 장례를 치른 후 무덤 앞에서 목 놓아 울었고 무릎 닿은 곳이 성치 않았다.
20) 곽씨: 박충한(朴忠韓)의 아내로 정각이 세워졌다.
21) 곽씨: 오세충(吳世忠)의 아내로 열녀 정각이 세워졌다.
22) 안씨: 김표(金彪)의 아내로 열녀 정각이 세워졌다.
23) 성덕(聖德): 사노비 백몽생(白夢生)의 아내로 정조를 지키는 행위가 있었다.
24) 김씨: 최연우(崔然雨)의 아내로 정조를 지키는 행위가 있었다.
25) 안씨: 최흥(崔興)의 아내로 정조를 지키는 행위가 있었다.
26) 이씨: 이명선(李明善)의 아내로 정문이 있다.
27) 권씨: 이관일(李貫一)의 아내로 정조를 지키는 행위가 있었다.
28) 유씨: 이성일(李性一)의 아내로 정조를 지키는 행위가 있었다.
29) 진주 강씨: 판관 강흥백(姜興伯)의 딸이다. 남평 문씨 문석빈(文碩彬)의 아내다. 남편이 병들자 하늘에 기도하며 대신 목숨을 바치겠다고 기원하였는데, 남편이 죽자 따라 죽었다. 열녀 정각이 세워졌다.
30) 전주 최씨: 최장현(崔章顯)의 딸이다. 해남 윤씨 윤협(尹挾)의 아내다. 어머니가 위중할 때 손가락을 찢어 피를 입에 넣어 살아나게 하였다. 남편이 위독하자 허벅지 살을 베어 달여 먹였다. 정려문이 있다.
31) 전주 이씨: 이민수(李敏修)의 딸이다. 양천 허씨 허정(許楨)의 아내다. 남편이 병들어 위독하자 하늘에 기도하여 자신의 목숨과 바꾸고자 하였다. 장례를 치른 후 시부모를 봉양하고 어린 자식들을 키웠다. 시부모의 장례를 다 치른 후 마침내 자결하였고, 남편과 합장되었다.
32) 밀양 박씨: 박치덕(朴致德)의 딸이다. 절강 편씨 편경기(片敬基)의 아내다. 남편이 병으로 위독하자 손가락을 베어 피를 마시게 하였다. 남편이 죽자 자신도 따라 죽으려 하였으나 남은 가족을 위하여 억지로 일어나 3년상을 치렀다. 시아버지가 위독할 때에도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마시게 하였다. 장례 시에는 자신의 몸이 상할 정도로 애통해 하였다.
33) 경주 김씨: 김상만(金商晩)의 딸이다. 남평 문씨 문형지(文亨祉)의 아내다. 시아버지가 병들자 대변을 맛보아 병세를 살폈고, 남편이 병들었을 때에는 하늘에 기도하며 목숨이 연장되기를 기원하였다.
34) 경주 김씨: 김용대(金龍大)의 딸이다. 절강 편씨 편성기(片晟基)의 아내다. 남편이 병들자 대변을 맛보아 병세를 살폈고 하늘에 기도하였다. 결국 남편의 시신 옆에서 따라 죽었다.
35) 제주 고씨: 고응원(高應遠)의 딸이다. 현풍 곽씨 곽협(郭挾)의 아내다. 남편이 병으로 위독하자 하늘에 기도하고 손가락을 베어 피를 먹였다. 남편이 죽자 자신도 따라 죽으려 하다가 품안의 자식을 생각하여 차마 죽지 못하였다. 재산을 관리하며 혼자서 집안을 일으켰다.
36) 한산 이씨: 이해장(李海章)의 딸이다. 병조 판서 고응경(高應景)의 후손인 고엽(高燁)의 아내다. 남편이 병들자 허벅지 살을 베어 먹이고 손가락 끝을 물어 피를 먹였으며, 고름을 입으로 빨아냈다. 남편이 사망하자 따라 죽어 정문을 세웠다.
37) 경주 최씨: 최형규(崔亨奎)의 딸이며 이정진(李正震)의 아내다. 남편이 병들어 의원을 찾았지만 차도가 없자 허벅지 살을 베어 삶아 먹이니 효험이 있었다. 시어머니가 병들자 손가락 끝을 베어 그 피를 먹게 하였다.
38) 창녕 성씨: 성하시(成夏峕)의 딸이다. 해주 최씨 오지영(吳智泳)의 아내다. 30세 되던 해에 남편이 병으로 사망하자 남편이 죽은 지 7일 만에 따라 죽었다.
39) 신창 맹씨: 맹사성의 후손인 맹봉원(孟鳳遠)의 딸이다. 밀양 박씨 박수범(朴受範)의 아내다. 시아버지가 병으로 여러 해를 누워 있었는데 대변을 맛보면서 병세를 살폈다. 23세에 남편이 위독하자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먹게 하였고 3일간 목숨을 연장시켰다. 남편의 3년상을 마치고 어린 자식을 키우며 재산을 관리하여 가문의 도리를 세웠다.
40) 서령 유씨: 유효원(柳孝源)의 딸이다. 한양 조씨 조익원(趙翼元)의 아내다, 남편이 창병이 들자 고름을 입으로 빨아냈다. 남편이 죽자 3년상을 치르고 시어머니를 봉양하면서 집안을 일으켜 세웠다.
41) 광주 안씨: 사간공 안성(安省)의 후손인 안효증(安孝蒸)의 딸이다. 남원 윤씨 윤상섭(尹尙燮)의 아내다. 시어머니가 병들자 대변을 맛보며 병세를 살폈고, 남편이 병들어 의술로도 효험이 없자 양쪽 손가락을 베어 피를 마시게 하여 회생시켜 70세까지 살게 하였다. 정각과 비문을 세웠다.
42) 밀양 박씨: 전주 이씨 이규종(李奎宗)의 아내다. 13세에 시집와서 23세에 남편을 잃었다. 뱃속의 아이를 위해 차마 따라 죽지 못하였다. 3년상을 마치고 시부모를 봉양하며 아들 이창선을 잘 키워 훌륭한 사람이 되게 하였다.
43) 풍산 심씨: 심혁창(沈赫昌)의 딸이다. 초재 서원 이유한(李惟韓)의 후손 이선경(李善卿)의 아내다. 16세에 시집와서 부녀의 도를 다하였는데, 남편이 요절하자 장례를 마치고 따라 죽으니 19세였다.
44) 덕수 이씨: 이행(李荇)의 후손 이민주(李敏柱)의 딸이다. 덕천군 후생(李厚生)의 후손 이봉하(李鳳夏)의 아내다. 남편이 병들어 죽자 낮에 울며 애통해 하느라 몸을 상하였고 십여 일간 곡기를 끊어 남편을 따라 죽었다.
45) 밀양 박씨: 박광필(朴光弼)의 후손이다. 정창모(鄭昌謨)의 아내다. 남편이 병들어 죽자 울다가 결국 따라 죽었다. 표창문이 있고 정각과 비문을 세웠다.
46) 남양 홍씨: 홍가신(洪可臣)의 후손 홍영후(洪英厚)의 딸이다. 밀양 박씨 박준규(朴俊圭)의 아내다. 26세에 남편이 병들자 허벅지 살을 베어 탕을 끓여 두 번이나 먹였고 효험이 있었다. 남편은 결국 사망하자 3년상을 마친 다음에 순절하였다.
47) 안동 권씨: 권학수(權鶴洙)의 딸이다. 나만갑(羅萬甲)의 후손 나상규(羅相圭)의 아내다. 남편이 병들자 하늘에 기도하여 목숨을 대신하길 빌었고, 남편이 죽자 거의 실성한 듯하였고 장례가 끝난 뒤에 9일 동안 먹지 않다가 순절하였다.
48) 전주 이씨: 이홍번(李弘蕃)의 딸이다. 전주 최씨 최석태(崔錫泰)의 아내다. 자녀를 교육하고 노비를 다스리는 데 법도가 있었다. 남편이 가난하고 곤궁한 자들에게 베푸는 것을 좋아하자 일일이 조력하여 사람들이 그녀의 후덕함을 칭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