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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익의 상소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700368
한자 趙翼-上疏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상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785년 7월 26일연표보기 - 조익 인천 도호부를 강화진으로 옮기자는 상소문을 올림

[정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에 있는 인천도호부를 옛 제물진(濟物鎭)으로 옮기자는 유생 조익(趙翼)의 상소문.

[개설]

조익은 조정익(趙廷翼)의 5대손이다. 조정익 부처(夫妻)는 강도(江都)[지금의 인천광역시 강화군]에서 순절(殉節)하였고, 고조(高祖) 할아버지 조유(趙猷)병자호란의 사무친 한을 안고 싸워서 지킬 방법과 미리 준비하여 막을 계획을 강구(講究)하였다. 조익은 집안에 전래하는 것을 듣고 본 바를 바탕으로 상소문을 올렸다.

[역사적 배경]

임진왜란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관방(關防), 병제(兵制), 기계(器械)의 문제점들을 지적하고 대안을 제시한 것이다. 다만 조익의 상소와 관련한 기록이 거의 없고 조익이 어떠한 인물인지에 대한 기록 역시 찾기 어렵다.

『정조실록(正祖實錄)』 1785년(정조 9) 7월 26일에 실린 조익의 상소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신의 우리나라에는 전쟁에 대한 경계가 드문 때문에 군기(軍器)[전쟁에 쓰는 도구나 기구]를 다스리는 정책이 매우 허술합니다. 성곽(城郭)이 즐비하고, 관방이 중복되었으며, 군병의 수효가 넉넉하고, 병기가 많은 듯하나 그 실상을 상고해 보면 거의가 서로 어긋납니다. 성지(城池)[성과 그 주위에 파 놓은 못]가 많기는 하지만 앞뒤로 보수한 것을 계산하면 한둘에 지나지 않습니다. …… 읍치(邑治)[고을]와 진보(鎭堡)[조선 시대에 함경도·평안도의 북방 변경에 있던 각 진] 및 창고가 모두 텅 빈 땅에 있으므로 경보가 있게 되면 번번이 모두 도둑들이 이를 점령하여 이용하게 됩니다. …… 관방은 송도(松都)[개성(開城)]가 곧 서문(西門)의 인후(咽喉)[목구멍]와 같은 곳입니다. 겹으로 쌓은 성과 겹으로 된 관문(關門)이 있어 정병(精兵)[우수하고 강한 군사]을 주둔시킬 수 있다면 관방의 요충(要衝)으로 이보다 나은 것은 없습니다. 마땅히 구제(舊制)를 줄여서 그 성지(城址)를 정하고, 또한 둑을 쌓고 나무를 심어야 할 것입니다. …… 대체로 고갯길 좁은 목을 방어하는 방법은 나무를 많이 기르는 일보다 상책은 없습니다. …… 형편이 긴요(緊要)하기로는 강화(江華)보다 나은 곳이 없습니다. 대체로 강화는 통어사(統禦使)를 겸하고 있으니 마땅히 통어 중군(統禦中軍)을 두어 전선(戰船)과 병선(兵船)을 관령(管領)하게 해야 합니다. …….

인천부(仁川府)를 옛 제물진 터로 옮기고 방영(防營)을 설치하여 …….

병제(兵制)의 경우 우리나라의 군졸은 팔도(八道)를 통합하여 명색은 거의 1백 수십만에 가까우나 하나도 쓸 만한 것이 없으니, …… 제도를 정하여 교생(校生)[조선 시대에 향교에 다니던 생도]과 원생(院生)[조선 중기 이후 서원에 딸린 유생을 이르던 말]을 취재(取才)하되 서강(書講)에서 우등한 자를 교생·원생으로 차출하고, 군교(軍校)를 취재하되 무예(武藝)와 병서(兵書)에서 우등한 자를 역시 군교로 차출하며, 선파(璿派)[전주 이씨 가운데 조선 왕실에서 갈려 나온 파] 및 충의위(忠義衛)[조선 시대에 충좌위에 속한 군대로 양반 특수 병종(兵種)]로서 감축에 대신할 자를 부적(符籍)[호적부에 없는 호적을 새로 호적부에 실음]을 상고하고 상세히 조사하여 부정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

기계(器械)의 경우 조총(鳥銃)은 구멍이 막히고 집이 부서졌으며 화약(火藥)은 습기(濕氣)로 인하여 흙이 되었고 환도(環刀)는 칼집도 없고 자루도 없으며 녹이 슬어 사용하기 어렵고, 활은 시위[弦]가 없고 줌통[跗]도 없어 뒤틀려 펼 수가 없으며, 화살은 깃이 없어 멀리 갈 수가 없고 편전(片箭)[총통에 넣어서 쏘는 하나로 된 화살]은 통아(筒兒)[짧은 화살을 쏠 때 살을 넣어서 시위에 메어 쏘는 가느다란 나무통]가 뒤틀려 살을 쏠 수 없습니다. …….”

이러한 내용 가운데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와 관련되는 사항은 우선 인천부를 옛 제물진 터로 옮기고, 여기에 방영을 설치하여 안산(安山)·부평(富平)·금천(衿川)·양천(陽川)의 육군(陸軍)을 관할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덧붙여 인천부가 영종도(永宗島)와 화량진(花梁鎭)의 수군도 관할하게 하되, 중군영(中軍營)을 월미도(月尾島)에 설치하여 또 수로(水路)의 방어를 겸하게 한다면 수륙(水陸)에 방어하는 태세(態勢)가 된다는 것이다. 인천부를 옮기자는 주장을 한 것은 조익이 처음이라고 생각된다. 물론 이 같은 내용은 중앙에서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경과]

유학 조익의 상소에 대한 비답(批答)[임금이 상주문의 말미에 적는 가부의 대답]은 “아뢴 바는 매우 근거가 있고 채용할 말이 많이 있다. 묘당(廟堂)[의정부의 이칭]으로 하여금 품처(稟處)[윗사람의 명령을 받아 일을 처리함]하게 하라.”라고 하여 비변사에서 상의하여 아뢰도록 하였다.

[결과]

인천도호부를 제물진으로 옮기는 것에 대한 결과는 더 이상 논의 된 것은 없다. 다만 강화 길상 목장(吉祥牧場)에 경작을 허가하는 의견이 제시되었고 이로 인해 길상 목장 주변의 50~60섬지기 논에 경작하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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