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000341
한자 三國時代
영어공식명칭 Three Kingdoms Period
이칭/별칭 백제 시대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전라북도 부안군
시대 고대/삼국 시대
집필자 김병남

[정의]

4세기 초에서 7세기 중엽까지 전라북도 부안군의 역사.

[백제의 마한 복속과 발전]

백제와 지반(支半)[부안]이 만나는 근초고왕의 남방 정벌에 대해 『일본서기(日本書紀)』는 “바다 서쪽의 여러 한(韓)을 이미 그대 나라에게 주었다.”거나 “해서(海西)를 평정하여 백제에 주었다.”는 말로 나타난다. 해석의 여지가 있지만, ‘해서제한(海西諸韓)’을 ‘한반도 서남해의 제한(諸韓)’이라고 하면, 이것은 곧 369년(근초고왕 24)의 남방 정벌로 복속된 지역을 의미한다. 물론 왜가 백제에게 주었다고 나오지만, 결국 백제의 정벌임을 감안한다면 이 사건이 백제에게 얼마나 중요한 의미였는가를 쉽게 짐작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인지 근초고왕이 “너무 기뻐서 펄쩍 뛸[歡喜踊躍]” 정도였다고 하거나 3년 뒤에도 근초고왕이 손자인 침류왕에게 “해서(海西)를 떼어 나에게 주셨다. 이로 말미암아 국기(國基)가 영원히 단단해졌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이처럼 근초고왕의 남방 정벌을 통해 복속시킨 ‘여러 한(諸韓)’, 즉 부안을 포함한 전라도 지역은 백제의 국가적 기틀을 형성하는 데 필요한 인력과 자원을 제공하였다. 따라서 이에 걸맞게 적극적인 영역화를 시도하였고, 그 속에서 부안 지역은 정치·군사·해양의 요충지로서 자리 잡게 되었던 것이다.

[백제의 행정 구역 편제와 발전]

백제의 사비 시대에 이르면 부안 지역이 차지하는 비중이 더욱 커진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부안의 인근 지역인 익산이 수도의 물망에 오르고, 고사성은 중방(中方)으로서 지방 제도의 중핵적인 위치와 기능을 수행하였다. 따라서 백제의 행정 구역 체제 아래 개화현(皆火縣)흔량매현(欣良買縣)으로 편제된 부안 지역은 여전히 활발한 대외 교류 창구였던 것을 유추할 수 있다.

이것은 이 시기와도 관련 있는 변산면 격포리죽막동 제사 유적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이곳에서는 서기 3세기 후반 무렵부터 토착 세력인 마한에 의한 제사가 거행되었는데, 이때는 제사에 원저단경호(圓底短頸壺)[둥근 바닥 짧은 목 항아리] 같은 토기만 사용하고 별도의 제물이 없었다. 그러나 서기 4세기 말~5세기 초에 이르면 직구광견호(直口廣肩壺)[아가리가 곧고 어깨가 넓은 항아리] 등 백제 토기가 제사용으로 사용되는데, 이로 미루어 이 시기부터 백제가 주관하는 국가적 제사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서기 5세기 말~6세기 전반에는 새로이 토제마(土製馬)나 중국 청자가 제사 용기로 추가되었고, 가야계 토기와 석제 모조품, 스에키[須惠器] 등 왜와 관련한 것까지 나타난다. 따라서 부안 죽막동 유적은 백제의 성장과 확대, 백제와 중국, 가야, 왜 사이에 이루어진 활발한 교류, 백제 지방 지배의 실현, 고대 항해술의 발전 등을 반영한다.

더불어 부안 죽막동 유적 바로 밑에는 호남 서해안[황해안]에서는 보기 드물게 황해의 큰 바다와 연접한 포구로 격포가 있는데, 고대 시기 격포는 이 부근을 항해하는 선박이 반드시 들러야 할 해양 지리적 조건을 갖춘 곳이었다. 고대 사회에서 기항하기 적합한 곳은 내륙으로 깊숙이 들어간 만(灣)이다. 목선(木船)이 안전하게 정박하고 들고 날 수 있는 좋은 포구는 후미진 곳에 있어 섬, 곶(串) 또는 사주(砂洲)에 의해 파랑으로부터 보호받고, 바닥이 모래나 개흙으로 부드러워 배 밑바닥이 부서질 우려가 적으며, 바닷물과 민물이 끊임없이 뒤바뀌어 해를 끼치는 생물이 배 바닥에 달라붙지 않고, 배에서 짐을 내리고 싣는 데 편리한 지형을 갖추며, 조석(潮汐)을 잘 이용해 드나들 수 있는 곳이다. 그리고 내륙으로 이어지는 양호한 교통로도 확보되어야 한다.

이처럼 부안 죽막동 유적과 문헌 기록의 주류수지(州流須祇)[주류성]를 통해, 지반[부안] 지역은 근초고왕[재위 기간 346~374] 대 이래 백제의 대외 교류 창구로서 활발한 기능을 수행하였다고 볼 수 있으며, 이는 오늘날 부안의 정체성이나 발전 방향에 비추어 보아도 바다의 활용이 중요한 지역적 기반이자 국가적 기여를 수행할 여지가 있음을 알려 주는 것이라 하겠다.

하지만 백제는 서기 660년 신라와 당의 연합군에 의해 멸망하게 된다.

[백제의 부흥 운동]

백제가 멸망하였을 때 신라와 당의 연합군이 점령한 지역은 금강 유역과 사비, 공주 인근 지역이었다. 이때 점령되지 않은 백제의 여러 지역에서 부흥 운동이 일어났다. 백제 부흥 운동의 전개 과정에서 다시 부안 지역은 그 중심지로서의 역학을 담당하게 된다. 백제 부흥 운동의 최종 목표가 단절된 국가의 연속성 확보였다면, 부흥 세력은 신라와 당나라의 군대를 몰아내기 위한 안전한 정치적·경제적 근거지가 필요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사비와 웅진 등 충청남도와 대전권이 전쟁의 앞마당이 된 상태에서 지속적인 항쟁을 위한 근거지로 고려될 곳은 침략이 비켜 간 금마저[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나 중방 고사성 등이 필연적이었다. 또한 부흥 전쟁이 단기간에 끝나지 않는 상황에서 장기적인 식량 확보 등 경제적인 지속성도 유지해야만 하였다. 그런 면에서 백제 중방 지역, 즉 전라북도 권역은 삼한에서 가장 기름진 곳으로서 ‘의식의 근원[衣食之源]’이 아닐 수 없었다. 따라서 백제 부흥 운동에서 전라북도 지역이 차지하는 역할과 비중은 역사적·경제적·지리적인 모든 측면에서 부흥국 수립의 중심 역할을 수행하는 구조였다. 그리고 그 부흥 백제국으로서의 수도 기능을 담당하는 곳이 바로 부안 주류성이었던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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