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700391 |
---|---|
한자 | 彌鄒王陵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고분 |
지역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문학동 산 27-1 |
시대 | 고대/삼국 시대/백제 |
집필자 | 이세호 |
성격 | 묘지 |
---|---|
관련인물 | 비류 |
소재지 | 미추왕릉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문학동 문학산 |
소재지 | 미추왕릉 - 인천광역시 연수구 동춘동 |
[정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에 있다고 전해지는 비류(沸流)의 무덤.
[개설]
미추왕릉(彌鄒王陵)의 존재를 전하는 문헌 기록은 다음의 두 가지이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권14 여지고(輿地考) 2 비류국 조(沸流國條)에는 관아에서 남쪽으로 10리 가량 떨어진 해변 가까운 구릉에 미추왕릉이 있다고 하였다. 한편 『인천부 읍지(仁川府邑誌)』 총묘 조(塚墓條)에서는 미추왕릉이 남산, 곧 지금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문학산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19세기에 편찬된 여러 읍지들은 『인천부 읍지』의 내용을 답습하고 있다.
이후 1942년 조선 총독부의 조사 자료인 『조선 보물 고적 조사 자료』에 의하면, 문학산성 내 정상부에 있는 만두형의 토단(土壇)을 봉화대 혹은 미추왕릉이라 한다는 전문(傳聞)이 소개되었다. 1953년 이경성의 「인천의 고적(古蹟)」에는 문학산 너머 지금의 인천광역시 연수구 동춘동에 미추왕릉이라는 고적이 있다는 설에 대한 기록도 보인다. 문학산성 내 봉수대 설은 『인천부 읍지』의 전승이 구체화된 것이며, 동춘동 설은 『증보문헌비고』의 전승이 구체화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인천광역시 연수구 동춘동의 고분을 미추왕릉이라 한다는 전승은 이후 1956년의 『인천 향토 사료』와 1959년의 『인천의 안내』, 그리고 1973년에 나온 『인천시사』에 그대로 수록되어 보편적인 전승으로 자리 잡아 갔다. 또 1978년 『문화 유적 총람』에서는 정구창 씨의 밭머리에 있는 고분을 미추왕릉이라 한다고 하였고, 인천광역시 연수구 동춘동의 청릉(靑陵)이란 지명을 미추왕릉과 연계하고자 하는 견해도 보인다.
반면 미추왕릉이 문학산에 있다는 전승은 1965년 이종화의 『문학산』에서 구체적으로 그 위치가 제시되었는데, 문학산 북록 돌출부에 있는 고분을 마을 주민들이 비류왕릉이라 한다며 사진 자료와 함께 소개하였다. 문학산 설은 다시 산 정상의 토단 혹은 북쪽 사면 돌출부의 고총이라는 두 전승으로 갈라진다. 『증보문헌비고』와 『인천부 읍지』에서는 공통적으로 석인(石人)에 대해 언급하고 있으나, 이 점이 의문이다. 백제 초기에 석인을 세운 무덤이 있을 수는 없으므로 후대 수축이거나 고려 시대의 무덤으로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미추왕릉의 위치에 대한 전승은 그 타당성 여부를 명확히 하기 어렵다. 다만 18세기 후반에 생성되어 구체화되는 과정에서 윤색이 가해진 것은 분명하다 할 수 있다.
[위치]
미추왕릉의 위치에 대해서는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문학동 산27-1번지에 있는 문학산성 봉수대로 보는 설과 동춘동 청릉으로 보는 설이 있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미추왕릉에 대해서는 고고학적으로 확인된 자료는 없고, 군부대 주둔과 택지 개발로 인해 모두 파괴된 것으로 추측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