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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700374
한자 鎭管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김상태

[정의]

조선 전기에 현재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를 포함하는 인천도호부에 설치된 지방 군사 조직.

[제정 경위 및 목적]

조선 전기에는 함경도·평안도 등의 북방 국경 지대는 군익도(軍翼道) 체제로 국경 방어에 임하였고 그 밖의 남방 지대는 연해(沿海) 요지에 진(鎭)을 설정해 영진군(營鎭軍) 혹은 기선군(騎船軍)을 두어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반면, 내륙 지방은 모든 지방 수령에게 병마직(兵馬職)을 겸하게 했으나 실제적인 군사 조직이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또한 잡색군(雜色軍)이라 하여 군역 의무가 없는 각종 인정(人丁)을 동원해 편제하였으나 이 역시 훈련에도 참가하지 않는 유명무실한 존재였다.

이러한 모순을 극복하고자 1455년(세조 원년)에 세종 때 이후의 지방 군사 조직에 일대 혁신을 가져왔다. 즉, 평안도·함경도에 설치된 군익도 체제를 전국적으로 확장한 것으로, 이것이 곧 진관 체제의 선구가 된다.

1457년(세조 3) 군익도 체제는 다시 진관 체제로 개편되었다. 즉, 고려 시대 이래의 지방군 파악 단위인 도(道)의 명칭이 행정 구역으로서의 도와 뒤섞여 쓰이는 복잡성을 피하기 위해 진이라는 이름으로 바꾸고, 요새지 내지는 군사 기지의 거점으로서 그 성격을 뚜렷이 하였다.

따라서 진관 체제는 병마절도사나 수군절도사의 주진(主鎭) 아래에 몇 개의 거진(巨鎭)을 두고 거진의 첨절제사가 여러 진을 통할하도록 이루어졌다.

이에 따라 인천도호부의 인천 부사는 동첨절제사로 수원 진관의 첨절제사인 수원 부사 밑에 속하고 수원은 경기도에 속하게 되었다.

[내용]

경기도는 광주·양주·부평의 세 개 거진과 세 개의 독진(獨鎭)으로 이루어졌다. 거진은 부근의 여러 고을을 중·좌·우익으로 편입하여 하나의 군사 단위를 이루게 하였다. 그리하여 인천은 부평도에 속하여 우익을 담당하는 구조를 갖게 되었다. 세조 원년의 군익도 체제에서 경기도에 속한 인천의 군익도를 살피면 다음과 같다.

광주도(廣州道)의 중익은 광주·이천·양근·양지, 좌익은 여흥·천령·지평·음죽, 우익은 안성·진위·양성·용인·죽산이었고, 양주도(楊洲道)의 중익은 양주·원평·포천·적성·가평, 좌익은 삭령·마전·영평·연천, 우익은 풍덕·장단·임진·임강, 부평도(富平道)의 중익은 부평·인천·양천·금천·고양, 좌익은 수원·남양·안산·과천, 우익은 김포·교하·통진, 독진은 교동·강화·개성부였다.

[변천]

이러한 군익도 체제는 1457년(세조 3) 진관 체제로 바뀌게 된다. 중·좌·우익의 편성을 갖던 종래 체제를 바꾸어, 중요한 지역을 거진으로 하고 나머지 주변 지역의 제진이 그 아래에 소속되도록 한 것이다. 이에 따라 종래의 체제는 수원·광주·양주·강화·개성의 다섯 개 진으로 나누고 주변 고을을 편입하였다. 이에 따라 인천은 수원진을 거진으로 하여 수원진에 소속되었다. 수원진에 소속된 고을은 부평·인천·금천·안산·남양·진위·안성·양성이 되었다. 이러한 진관 체제는 약간의 수정을 가하여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명문화되었다.

그리고 수군도 이러한 변화에 맞추어 진관 조직을 갖추게 되었다. 경기도는 거진으로 광주·수원·양주·장단 진관으로 편성되었다. 인천은 수원 진관의 첨절제사인 수원 부사 밑에 인천 부사가 동첨절제사로 예속되게 되었다. 그런데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중종 21년(1526) 수원 진관을 혁파하고 인천으로 옮겼다고 하고 있고, 『대동지지(大東地志)』에 의하면 중종 30년(1535) 다시 진관을 수원으로 환원하였다고 하고 있다. 이로 보면 진관이 수원에서 인천으로 일시적으로 옮겨졌다가 다시 원래대로 설치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의하면 수원 진관 소속의 인천도호부에는 부내면, 조동면, 신현면, 전반면, 황등천면, 남촌면, 원우이면, 다소면, 주안면, 이포면 등 열 개 면이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의의와 평가]

실질적인 군사 지휘 관계는 주진의 각 도 절도사로부터 거진의 첨절제로, 제진의 동첨절제사로 연결되는 일원적 계통이 확립된 것이다. 행정권을 모두 관장하는 관찰사는 여러 진의 병마관을 겸하는 수령들의 직속상관이었기에 군사 면에서도 강력한 권한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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