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7000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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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허은심 |
[우리나라 소금 생산의 역사]
소금은 인류사에 있어서 다양한 사건들을 만들어내는 핵심이 되어 왔음을 볼 때에도 그 생명력을 부정할 수는 없다.
선사 시대의 사람들은 수렵과 어로 활동을 통해 얻은 동물과 물고기 따위에서 염분을 섭취하였다. 그러다가 한 곳에 정착하여 농경 생활을 하면서 사람들은 곡물과 채소를 주식으로 하게 되었고, 부족한 염분의 섭취를 위해 소금을 만들어 먹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이때부터 인류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소금을 소중히 다뤄 화폐의 기능이나 세금의 수단으로까지 이용하였다.
그리고 소금을 이용한 생선 염장이나 절임 같은 식품 저장법 발달은 대항해 시대를 여는 유럽 팽창의 밑거름이 되었다. 또 국가가 막대한 소금세를 물리는 데 대한 반발로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고, 영국이 인도에 과도한 소금세를 부과함으로써 인도의 독립운동을 촉발하기도 했다. 이처럼 소금은 세계사에 있어서도 중요한 키워드로 존재해 왔다.
우리나라에서 소금은 언제부터 생산을 하였는지 확실한 기록은 없지만 삼국 시대에 이미 소금 생산을 시작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동생 온조와 신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문학산을 중심으로 바다가 인접한 인천에 도읍을 세우고자 했던 비류의 의지도 소금이라는 핵심 키워드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후 고려 태조 대에 도염원(都鹽院)이 설치되어 소금의 전매제가 시행된 기록이 있다.
고려 말기 학자인 이곡(李穀)은 원나라에까지 명성이 있었던 당대의 문장가로 배를 타고 인천의 자연도(紫燕島)[현 영종도]를 지나면서도 아름다운 시 한 수를 남겼다.
“…… 개펄은 구불구불 전자(篆字)같고 돛대는 종종 꽂아 비녀와 같도다. 소금 굽는 연기는 가까운 물가에 비꼈고, 바다 달은 먼 멧부리에 오른다. ……”
이 시에서 묘사한 구불구불한 개펄에서 나오는 소금 굽는 연기는 고려 시대 인천 해안가에 소금을 만드는 염전이 있었던 사실을 보여준다.
이곡이 ‘소금을 굽는다.’라고 표현했듯이 우리나라의 전통적 소금은 짠물을 오랫동안 끓여서 소금의 결정을 얻는 자염(煮鹽)이었다. 인천을 비롯한 우리나라의 서해안은 지리적인 특성으로 조수간만의 차가 크고, 넓은 개펄을 갖고 있다. 이 넓은 개펄이 바로 자염을 만드는 ‘염전’이었던 것이다.
한편,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는 소금을 인천 지역 토산물의 하나로 소개하고, 소금 생산 장소인 염전이 인천 6개, 부평 7개, 강화 11개, 교동 3개 총 27개소가 있다고 기록하고 있어 조선 시대에도 상당양의 소금이 인천 지역에서 생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소금을 품은 우리 동네 주안]
우리의 전통적 소금인 자염은 바닷물을 끓여 소금을 얻는 것이므로 며칠간 불을 때야 하므로 생산비가 많이 든다. 그런 연유로 장마를 앞둔 시기에는 소금 장사들의 매점매석(買占賣惜)이 횡행하여 조정에서 단속을 한 기록들이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등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개항 직후 인천의 염업 사정은 달라진다. 값싼 중국산 천일염[세칭 호염(胡鹽)]이 밀려들자 가격 경쟁력에서 밀려나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이에 대항코자 1900년 대한제국 정부는 인천에 제염장을 차리고 자염을 생산했으나, 역시 경쟁력이 없었다. 이를 극복하고자 대한제국은 천일염전을 만들기로 한다.
천일염전의 축조를 시작하면서 그 대상지로 선택된 곳이 바로 주안이다. 인천 서해안은 잘 알려져 있듯이 조수간만의 차이가 크고 내만갯벌로 염전을 축조하기 위한 제방을 쌓기가 쉬웠고, 또한 당시로서는 드물게 철도가 놓여있어 주안역을 이용한 소금의 수송에도 유리했기 때문이다.
“명일[내일] 총리대신 이완용, 농산대신 송병준, 내부대신 임선준, 탁지대신 고영희 4대신이 인천 주안리에 나가 소금 굽는 마당을 시찰한다더라.”라는 『대한 매일 신보』 1907년 9월 22일자 기사는 바로 우리나라의 천일염 탄생을 알리는 첫 번째 기사였다. 이에 앞서 정부는 천일염전을 시험하기 위해 일본 대장성의 기사 오쿠겐조[奧建藏]을 초빙해 인천부 주안면 십정리에 시험용 염전 9917㎡[1정보=3,000평]를, 동래부 석남면 용호리에는 일본식 자염 시험장을 만들었는데 주안리 천일염이 중국산보다 양호하자 1909년에 본격적인 생산에 들어갔다.
나아가 일제는 인천 지역의 천일염전이 천혜의 자연적 환경을 잘 이용했을 뿐만 아니라, 인천항과 수도권은 물론 일본에까지 소금을 실어 나를 수 있는 인프라 구축을 위해 수인선 철도를 부설하고 염전을 확대하여 생산에 박차를 가하였다. 그 결과 1933년에 이르러 주안, 남동, 소래 세 염전은 전국 생산량의 절반인 15만 톤을 생산하였다. 그 후 일제 강점기 내내 인천은 소금의 산지로 각인되었고, 광복 후 초등학교 교과서에 계속 소개되었다.
[이제 소금은 싫다하네. 수출품을 만들어보세!]
주안 염전은 근대를 맞이하는 인천지역의 모습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이다. 광복 직후 모든 물자와 마찬가지로 소금도 부족 현상이 일어났다. 게다가 남북 분단으로 황해도 연백 염전이 북한에 속하게 되고, 6·25 전쟁으로 일부 염전이 파괴돼 생산량이 급감했던 것이다. 이에 따라 관영 염전뿐만 아니라 민영 염전의 축조가 허가되고, 1952년에는 소금 증산 5개년 계획을 세워 염전 증설을 권장하였다. 이에 따라 1955년에 들어서야 겨우 소금 수요를 충족하게 되었으나, 1957년에 이르러서는 오히려 과잉 생산의 결과로 불황을 겪기도 하였다. 1963년 염관리법(鹽管理法[염전의 발전과 염류 수급을 조절함으로써 염업을 육성하고 국민 경제 발전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제정된 법률]과 대한 제염 주식회사법의 제정으로 소금 전매제가 폐지됨에 따라 주안 염전은 정부의 대행 기관으로 지정된 대한 염업 주식회사가 운영하였다.
1960년대 들어 박정희 정권은 제1차 경제 개발 계획(1961년)의 일환으로 경인 지구 특정 지역을 공고하고, 도시 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한다. 인천은 1967년 송도, 간석, 주안 2지구 토지 구획 정리 사업을 시작하면서 교통수단을 대폭 확충한다. 1965년~1974년까지 경인선 철도 복선화, 경인 고속 국도 개통, 경인선 전철화 등 각종 육지 교통수단이 마련된다. 이때 한국 수출 국가 산업 단지인 한국 수출 공단 제5 단지[지금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주안 5동 일대]가 1973년 7월 15일에 조성되었고, 1974년 지금의 공단이 완공되었다. 근대적 공업화를 추진했던 중앙 정부 정책에 따라 염전은 1968년부터 폐전되고 매립되어 공단이 되어 우리나라 수출을 선도하게 된다. 소금을 생산하던 염전은 여러 공장들이 들어서고 수출품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천일염 생산은 물론 그 부산물로 염화마그네슘, 염산, 염화소다 등을 얻는다. 이러한 부산물들은 각종 의약품은 물론 공업용 원료로 사용되었으며 주안 염전과 독각리 염전에도 천일염의 부산물을 이용한 공장들이 들어섰다. 이것으로 우리나라 화학 공업이 시작되었다.
[쉼 없는 생산지 주안, 도시 공간의 미래]
1970년대 산업 단지로 변모한 주안 지역은 점차 인구가 증가하고 지역 상권이 활성화하면서 교육과 금융, 각급 행정 기관이 밀집되었다. 한동안 주안 일대는 산업화에 따른 신흥 도시로서 사람들이 모여들며 인천 문화의 중심축이었다. 인천 고등학교의 이전과 인천 시민 회관의 개관, 그리고 1966년 인천시립 교향악단, 1981년 인천시립 합창단, 인천시립 무용단, 1990년 인천시립 극단 등 시립 예술단이 창단되어 1994년 인천광역시 남동구 구월동 인천 종합 문화 예술 회관이 개관하기 이전까지 인천 문화의 구심점 역할을 충실해 해냈고 주안은 문화 공간으로 사랑을 받았다.
1995년 인천이 광역시로 개편되며 그 몸집이 커지고 도시의 주거 기능은 연수동, 만수동, 계산동 등 등 도시 외곽으로 분산되고, 행정과 금융 기능은 시청이 소재한 인천광역시 남동구 구월동 일대로 옮겨 가면서 인천광역시의 중심 지역으로 성장하였다. 게다가 2003년 인천 경제 자유 구역의 그늘 속에 소외된 주안은 구도심으로 퇴색되었다. 그러나 이제 다시 주안이 생산지로서의 면모를 드러내며 또 다른 모습으로 변화하고 있다.
최근 인천 시민 회관이 철거되고 쉼터만이 지키고 있던 자리와 그동안 인천의 대표 유흥가인 주안역으로 이어지는 일대에 대중문화를 중심으로 문화 벨트가 형성되고 있다. 주안역 앞 일대는 2000년대 들어서면서 ‘미디어 공동체’ 공간으로 자리 잡기 시작하여 미추홀구 청소년 미디어 센터와 주안 영상 미디어 센터, 영화 공간 주안, 인천 알리앙스 프랑세즈-프랑스 문화원, 인천 미추홀구 문화 콘텐츠 사업 지원 센터 등 문화 공간들이 들어서며 문화 산업 지구가 형성되었다.
주안. 이곳은 곧 한국의 근·현대사를 압축한 곳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짠물의 생명력이 살아 숨 쉬고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주민의 추억이 녹아 있는 과거의 공간이며, 현재를 살아가는 삶의 공간이며, 앞으로도 살아가야 할 미래의 공간이다. 언젠가 이곳에 또 다른 시설이 들어 설 것이고 분명 그것은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생산해 낼 것이다.
그러므로 낡고 오래된 것을 품어 간직하면서 새로운 것과 조화를 이루어 생명력을 이어가는 일이야말로 이곳을 삶의 터전으로 하는 우리 모두가 해야 할 일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