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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700031
분야 지리/자연 지리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집필자 유동현

[개설]

산(山)은 지표면이 주위보다 높이 솟아 있는 지형을 말한다. 대부분의 산들은 독립적으로 혼자 우뚝 솟지 않고 여러 산들이 연이어져 맥(脈)을 이루며 줄지어 있다. 한반도의 중서부 해안에 위치한 인천은 높은 산지가 적어 구릉지나 평지가 주로 전개돼 있으며 큰 하천이 발달되지 못하였다. 그런 가운데 인천광역시의 산지는 대체로 남북과 동서 방향으로 뻗어 있다.

인천광역시를 남북 방향으로 가로지르는 산지는 계양산[395m]과 천마산[227m]을 거쳐 간석동 동쪽의 낮은 산지를 지나 인천광역시 남동구의 오봉산에 이르는 산지와 청량산[172m]을 중심으로 한 인천광역시 연수구 일대 산지이다. 이와 달리 동서로 길게 학(鶴) 모양을 한 문학산[213m] 주변의 산지들은 동서 방향으로 뻗어 있다.

문학산 주변 산지들은 비교적 높고 산줄기의 연결 모습이 분명하다. 문학산 주변 산지들은 100~200m 규모로 도심의 산지보다는 크고 길이도 약 5㎞나 이어진다.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문학동관교동 일대 산지 사이에는 동서로 분지를 이루고 인천광역시 연수구 청학동과 옥련동 일대는 평야가 발달되어 있다.

문학산을 경계로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와 연수구가 나뉘고, 승기천을 경계로 인천광역시 남동구와 연수구가 나뉜다. 문학산과 북쪽의 승기산[122m] 사이가 인천의 구읍(舊邑) 터이고 그 앞쪽에 문학 경기장이 있다. 문학산 남쪽으로 청량산이 대략 남북 방향으로 달리고 그 남쪽 끝에 송도 국제 도시가 있다.

[배꼽 빠진 문학산]

해발 고도 213m의 문학산은 학이 많아 학산(鶴山), 혹은 옛 인천도호부 남쪽에 있다 하여 남산(南山)이라고 불렸다. 하지만 이는 당시 학식 있는 양반들이 부른 이름이었고 일반 백성들은 그냥 ‘배꼽산’이라고 불렀다. 산꼭대기에 봉수대가 있어 마치 사람이 배꼽을 드러내 놓고 누워 있는 모습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20~30년 전까지 만해도 인근 마을 사람들은 문학산배꼽산이라 불렀지만 봉수가 사라져 배꼽 모양이 없어졌을 뿐만 아니라 옛날 산을 기억하는 이들도 줄어 그냥 문학산으로 부르고 있다. 문학산이라는 이름을 학산 서원을 중심으로 학문을 하는 선비가 많고, 산에 학이 많다고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문학산 정상에서 서쪽 봉우리를 연경산, 동쪽 봉우리를 선유봉이라고 한다. 남쪽 비탈은 군사 지역으로 일반 주민들의 출입이 통제되며 서쪽 비탈에는 ‘연경정’이 있어 주민들에게 휴식 공간을 제공한다. 북쪽 비탈에는 제2 경인 고속 도로와 연결되고 동쪽 비탈에는 월드컵이 치러진 문학 경기장이 있다.

[인천 역사의 정수리, 문학 산성]

한국사 연표를 보면 백제가 국가를 세운 것은 기원전 18년이다. 인천 개항(1883년) 100년을 기념하던 그때가, 비류미추홀인 현재의 인천광역시 지역에 도읍을 세운 지 2000년이었다.

문학산 정상에는 넓은 평탄면이 발달되어 있다. 여기에 백제 비류왕이 쌓았다는 고성이 남아 있다. 『동사강목(東史綱目)』, 『여지도서(輿地圖書)』 등 옛 문헌에 “문학산 꼭대기에는 석성이 있는데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의 아들인 비류가 남하하여 미추홀에 와서 문학산에 도성을 쌓고 미추홀국을 세웠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인천 읍지(仁川邑誌)』에는 부읍 남쪽에 미추홀 왕릉이 있다고 전한다. “부읍 남쪽 남산(문학산)에 미추홀 왕릉이라고 불리는 능이 있는데 봉분이 헐리고 망부석이 넘어져 방치된 채 흉하다.”라고 기록돼 있다. 문학산성은 처음에 토성(土城)이었던 것을 삼국 시대 말기나 통일 신라 시대에 석성(石城)으로 개축되었고,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증수와 보수를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임진왜란 때는 부사 김민선(金敏善)[1542~1593]이 산성을 수리하고 백성들과 함께 왜적으로부터 산성을 지켜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이때 왜군은 문학산성을 탈환하기 위하여 문학산성 동문 밖 일백여 보 되는 수리봉에 왜성을 쌓고 대치하였지만 결국 문학산성을 함락시키는 데는 실패하고 만다. 산 정상 북쪽 성벽 뒤쪽에는 ‘안관당’이란 사당이 있었다. 임진왜란문학산성에 싸운 김민선을 모신 사당으로, 봄과 가을 연 2회에 걸쳐 읍민이 다 같이 제사를 올렸다. 이 제사는 그 후 200여 년 동안 이어졌고, 사당이 헐려 없어진 후에도 계속되어 6·25 전쟁 때까지 이어졌다고 전한다.

1720년(숙종 46)에는 문학산성이 전략적으로 중요하여 수도 방위책의 하나로 논의되었다. 또 1871년 신미양요 당시에 인천의 사정을 기록한 『소성진중일지(邵城陣中日誌)』에는 문학산성임진왜란 이후에 방치되어 보수가 필요한데 재원은 둔전을 두어 마련하고, 인천부의 온 사민(士民)[양반과 평민을 아울러 이른 말]이 함께 문학산성의 수리와 축조에 노력할 것을 다짐하는 기록이 있다.

문학산성문학산 정상부를 중심으로 축조된 테뫼식 석축성[봉우리들을 둘러싸고 축조한 석성]이다. 흙으로 쌓은 내성(內城)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확인하기 어렵다. 산의 8~9부 능선을 이용한 성곽의 규모는 둘레 577m, 면적을 20,800㎡이다. 평면 형태는 북벽이 길고 남벽이 짧은 마름모꼴이며 북서쪽이 높고 남동쪽이 낮다. 동벽과 남벽은 보존이 잘 되어 형체를 확인할 수 있으나 북벽과 서벽은 지금의 군사 시설이 들어서며 파괴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성벽의 길이는 약 330m이다.

미추홀 고성’, ‘남산성’ 등으로도 불려온 문학산성에는 6·25 전쟁 무렵까지도 성안에 비류정이란 우물과 안관당 그리고 봉수대가 있었다. 광복과 6·25 전쟁을 거치면서 문학산은 더욱 퇴락하였으나 1958년 허물어진 동문을 복원하여 ‘문학산성 동문’이라 새겨 넣었고 산성으로 오르는 길목에 ‘십제 고도 문학 산성(十濟古都文鶴山城)’이라는 표석을 세우기도 하였다.

1962년 문학산 정상부에 미군 기지가 들어섰다. 정식으로 기지가 들어서기 이전에도 이곳은 미군 작전의 중요한 지점이었다. 미군은 1948년 5월 15일부터 1개월 동안 문학산과 팔미도를 연결하는 작전 도상 내에서 모든 선박의 운항을 통제하고 방공 사격 실탄 연습을 했다.

미군 기지가 정식으로 들어서면서 서문 터를 비롯한 봉수대와 건물터 등이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기지는 1979년 미군이 떠나고 한국 공군 미사일 부대가 이어받아 오늘날까지도 유지되고 있다.

[문학산에 이름을 준 학산 서원]

문학산’이란 이름의 근원이 된 학산 서원은 1708년(숙종 34) 인천 부사를 역임한 이단상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문학산 북쪽에 창건한 인천 서원에서 출발한다. 같은 해 ‘학산(鶴山)’이란 액호(額號)를 받으며 명칭이 바뀌었다. 학산 서원은 선현 배향과 지방 교육의 기능을 담당하면서 인천의 학문적 기반을 넓혀가다가 1871년(고종 8) 전국적으로 단행된 흥선 대원군의 서원 정리 정책에 의해 사라진다. 1949년만 해도 건물 초석이 남아 있었고 1950년대 서원 터 표지석을 세웠지만 문학 터널 공사로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가 2004년에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학익동 방향 문학 터널 북쪽 입구 위에 서원 터 비석을 다시 세웠다.

[문학산 전설 따라 일백 리]

문학산은 인천의 주산(主山)으로 옛날부터 숱한 전설이 내려온다. 문학산의 봉우리와 노적봉 사이에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관교동에서 인천광역시 연수구 청학동으로 넘어가는 긴 고갯길이 있는데 이 길을 삼호현, 함호재고개, 혹은 사모지고개라고 부른다. 이 고개는 백제의 근초고왕 때인 372년에 중국으로 가는 바닷길을 연 한나루[능허대]로 가는 길목이다. 지금부터 1,600여 년 전 백제의 사신들이 중국으로 가는 배를 타기 위하여 이 고개를 넘으면서 사신을 배웅하는 사람들과 이별을 나눈 곳이다. 이곳까지 따라온 가족이나 친지들이 능허대 쪽으로 멀어져 가는 사신이 무사히 잘 다녀오기를 빌면서 세 번 크게 불렀다 하여 삼호현(三呼峴)이라는 이름이 생겼다.

『여지도(輿地圖)』에서는 이 고개를 ‘삼해주현(三亥酒峴)’이라고 적고 있다. 고개 위에 큰 바위가 있는데 이를 삼해주 바위, 사모주 바위, 모주 바위, 중 바위 등 여러 이름으로 부른다. 전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그 바위에 마치 동이 모양의 구멍이 뚫려 있어 옛날엔 그 구멍에 삼해주가 딱 한 잔만큼만 차 있어 고개를 넘어가는 사람이 숨이 차고 목이 마르면, 그 술을 마셔 갈증을 풀었다고 한다. 그 술은 한 잔만 마셔도 능히 갈증을 풀 수 있는 술이었으므로, 욕심을 부려 더 마셔서는 안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어떤 사람이 욕심을 부려 이를 지키지 않고 그 술을 한 잔 이상 마셨더니 그만 술이 말라 없어졌다고 한다. 그 후로 그 고개를 ‘삼해주현’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편 어느 파계승이 이곳을 지나다가 술 맛이 너무 좋아 한 번에 몇 잔을 마신 뒤로는 술이 말라 없어졌다고 하여 ‘중 바위’라고도 불렀다고도 한다.

이 중바 위에서 오른쪽으로 연경산 비탈을 끼고 조금 오르면 큰 상자 모양의 바위가 우뚝 서 있다. 바위의 둘레에 큰 금이 나 있어서 뚜껑을 닫아 놓은 돌 상자처럼 보인다. 옛날에 어느 장수가 바위를 파내어 돌 상자를 만들고 자기 갑옷과 투구를 감추어 두고는 바위로 뚜껑을 덮어 놓았다 하여 ‘갑옷 바위’라고 부른다.

[상이용사들의 생활 터전, 문학산]

1967년 문학산 북쪽 비탈 기슭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학익2동에 중상이자(重傷痍者) 집단촌이 생겼다. 6·25 전쟁에서 팔다리와 눈을 잃는 등 크게 부상을 입은 상이용사들은 1964년부터 시내 다방과 주점을 돌며 손님을 상대로 껌과 연필을 팔았다. 3년 만에 40만 원을 모은 상이용사들은 시유지(市有地) 2,843㎡를 사 자립의 터전을 마련했다. 첫 사업으로 국고 보조금 130만 원으로 작은 편물 공장을 차렸으나 신체적 결함 때문에 제대로 생산해 내지 못해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다시 3년의 노력 끝에 78만 원을 모아 돼지를 키우는 양돈 사업을 시작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상이용사들에게 1백만 원을 지원했는데 이 돈으로 돼지 24마리를 사들였다. 상이용사들은 신체 조건에 따라 분업을 했다. 팔이 없는 용사들은 가까운 인천 소년 교도소나 기업체에서 나오는 밥찌꺼기를 수레에 실어 날랐고 앞을 못 보는 용사들은 돼지우리 청소나 먹이 주는 일을 했다.

사업은 연간 4백 마리의 새끼를 낳을 만큼 번창했다. 20가구 113명이 거주하는 집단촌도 ‘인천시 중상이용사 집단촌 직영 양돈장’이라고 정식으로 이름이 붙었다. 그들은 1989년 1월 돼지고기 가공 업체인 ‘삼성 식품’을 인수하기에 이른다. 그들은 문학산에 기대어 꿈을 꾸었고 기어코 그 꿈을 이뤄내고 말았다.

[훌쩍 가도 된다, 문학산 기행]

“황해 푸르러 멀리 퍼지고 구언한 문학의 정기 감도는 여기는 내 고향 인천.” 「인천 시민 헌장」의 한 구절이다. 인천광역시에는 웅장한 산은 없지만 시민 모두가 즐겨 찾는 문학산이 있다.

문학산은 일제강점기 때부터 손꼽히는 나들이 코스였다. 1923년 11월 인천 공립 보통학교[현 창영 초등학교] 5·6학년 남학생 84명은 소래산으로, 3·4학년 남자 339명은 문학산으로 원족(遠足)을 갔다는 기록이 있다. 원족은 요즘으로 말하면 소풍이다.

1930년대 중반, 경기도 인천부에서는 부외 문학면 문학산을 중심으로 1587만 ㎡의 대유원지를 건설하여 송도를 합해 전국적 관광지로서 손색이 없도록 계획을 세웠다. 바다 유원지로는 월미도와 송도, 산 유원지로는 문학산을 점찍은 것이다. 이를 위해 총공사비 30만 원 투자해 산 정상까지 폭 7m의 관광 자동차 도로와 하이킹 코스를 만들기 위해 인천부 토목과가 실측을 하기도 했다. 이 계획으로 인하여 벼락부자들이 생겨났는데, 당시 『동아 일보』는 1938년 4월 5일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조개, 쌀 장사들이 자동차 바람만 내고 세루옷이 아니면 안 입는다는데 토지 경기는 앞질러 다녀 남동면 일대까지 뻗쳐 수개월 전의 배액으로 폭등했는데 이곳은 금년으로 완성된 경동철도와 유원지로 토지열은 더욱 더 거셀 것이다.”

문학산 오르는 길은 인천광역시 연수구 선학동, 문학 경기장,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학익동, 문학 터널, 시립 옥련 사격장 등 갈래가 많다. 문학산과 한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연경산 그리고 노적봉까지, 가장 길게 종주할 수 있는 코스는 인천광역시 연수구 선학동 윤성 아파트 뒷길에서 출발해 시립 옥련 사격장까지 가는 약 4㎞의 산길이다.

윤성 아파트 뒤 무주 샛길을 따라 가면 바로 문학산으로 오르는 오솔길이 나타난다. 문학산은 일제 강점기와 6·25 전쟁을 겪으면서 산림이 크게 훼손되었다. 경제 사정 악화로 땔감, 식용 등을 위한 산림 자원의 수탈과 전쟁의 포화로 인한 직접적인 훼손, 그리고 전쟁 후 무분별한 주거지 잠식 등이 그 원인이다. 그러나 자연의 회복력은 놀랍다. 산 곳곳에 소나무, 떡갈나무, 갈참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그 나무 밑으로 애기똥풀, 치명아주, 개머루, 고들빼기, 애기풀, 노루오줌 등이 자라고 있다.

어디선가 바람결에 함성 소리가 실려 온다. 북소리도 함께 울린다. 비류의 군대인가? 북쪽 고갯길을 넘어 문학벌을 내려다보니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문학 경기장에서 프로 야구 경기가 한창 진행되고 있다. 산에서 내려다본 문학 경기장은 흰 돛을 단 거대한 범선이다. 파란 하늘에 떠 있는 구름 조각들이 마치 바다 물결처럼 보이며 문학 경기장은 망망대해를 향해 힘찬 출항을 하고 있다.

문학산은 조금만 올라가도 인천의 풍경을 한편의 파노라마처럼 감상할 수 있을 만큼 시야가 좋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풍경은 바다. 멀게 느껴졌던 바다가 바로 코앞이다. 살짝 기운 해 때문에 바다가 은빛으로 잘게 쪼개져 반사되고 있다. 하얀 바다에 물새가 내려앉은 듯 점점이 떠 있는 크고 작은 섬들…….

송도 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언뜻 보면 송도 국제 도시의 위용이 신기루처럼 보이지만 그 모습은 실제 상황이다. 특히 포스코 주상 복합 빌딩 4개동은 마치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의 돌기둥처럼 거대하게 솟아있다.

이내 정상으로 발걸음을 옮기지만 철조망이 앞을 가로 막는다. 배꼽이라 불리는 정상에 군부대가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여기부터는 민간인 통제선이다. 아쉬운 대로 남쪽 우회 등산로로 길을 잡았다. 부대 바로 밑으로 난 등산로는 다소 길이 험하다. 군데군데 막돌로 쌓은 산성의 흔적들이 보인다. 남쪽 산허리에 걸쳐 문학산성의 잔재가 길게 이어진다. 산꼭대기에 천혜의 요새를 쌓아 외적의 침입을 막고자 했던 구국의 의지가 지금까지 전수된 것일까. 그곳에는 아직도 군사 시설이 인천 앞바다를 굽어보고 있다.

낭떠러지 길을 조심스럽게 돌아 문학산연경산이 이어지는 산허리로 접어든다. ‘사모지 고개’로 불리는 이곳은 옛날에 인천도호부 관아 쪽에서 인천광역시 연수구 청학동·동춘동·연수동 지역과 연결되던 교통로였다. 그래서 백제 시대에 바닷길로 중국으로 갔던 출발지인 능허대로 가려면 이 고개를 넘어야 했다.

사모지 고개에서 연경산 정상으로 향한다. 산길은 등산로라기보다는 산책로라는 말이 맞을 정도로 좀 심심하다. 그래서 산악자전거를 즐기는 사람들이 즐겨 찾는 코스이기도 하다. 중간에 키 작은 소나무 숲이 잘 정돈된 곳이 있다. 솔밭에 잠시 앉으니 솔 냄새가 코를 간질이고 뇌를 시원하게 해준다. 세파에 찌든 때가 씻겨 나가는 듯한 느낌이 든다.

약간의 오르막을 거치니 정자 하나가 눈앞에 나타났다. 산 이름을 따서 ‘연경정’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연경산 봉우리는 인천의 산세를 살피기에 아주 좋은 지점이다. 천마산과 계양산의 이어짐, 소래산과 관모산의 연결선 그리고 청량산과 문학산의 끊어질 듯하며 계속되는 산줄기.

정자를 뒤로 하고 또 하나의 고개를 넘는다. 노적봉 가는 길이다. 203개의 나무 계단이 기하학적으로 하늘을 향한다. 한남 정맥(漢南正脈)[경기도 안성시 칠장산(七長山)에서 북서쪽으로 뻗어 경기도 김포시의 문수산(文殊山)에 이르는 산줄기의 옛 이름]으로 시작된 산줄기의 기나긴 선이 훠이 훠이 달려와 문학산연경산 그리고 노적봉을 거쳐 해안선에서 멈춘다. 땅의 한계와 바다의 무한이 교차되는 접점에 조망대가 서 있다. 산의 끝점에서 바라 본 바다에는 선홍빛 물감이 풀어지기 시작한다. 어느덧 서쪽 하늘에는 장엄한 노을이 펼쳐지고 있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9.10.15 문화재 명칭 변경으로 인한 현행화 인천도호부 청사 -> 인천도호부 관아
이용자 의견
오** 오오옷!♡♡
멋짐! 멋짐! 중요한걸 쏙쏙! 쿨 합니당~~^^♡♡
  • 답변
  • 디지털미추홀구문화대전을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2020.05.13
오** 와우. 멋지신데요!
중요한게 많네요.
  • 답변
  • 디지털미추홀구문화대전을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2020.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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