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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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김제시 복죽동에 있는 자연마을. 마을 뒷산이 풍수지리상 왕개미를 닮은 형국으로, 그 머리 부분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개머리’ 또는 ‘개미머리’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한자로 전환하면서 의두리(蟻頭里) 또는 의두마을이라 하였다. 한편 개머리의 북서쪽에 신평천(新坪川)이 흐르고 있는데, 지금은 하류인 성덕면 수교에 수문을 설치하여 바닷물이 들어오지 않지만 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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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김제시 성덕면 성덕리에 있는 자연마을.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마을의 위치는 만경면 남쪽 13리이며, 백제시대에는 무근촌현(武斤村縣)으로 부르다가 신라시대에 무읍(武邑)으로 이름이 바뀌면서 김제군 관할이 되었다. 고려시대에 이르러 부윤현(富潤縣)으로 바뀐 뒤 잠시 임피현에 속하였다. 그 후 만경현(萬頃縣)에 속하였다가 현이 폐지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고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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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청도리에 있는 자연마을. 옛날 이곳에 도예지가 있어 그릇골이라 하다가 구릿골이 되었고, 이를 한자로 옮기면서 구리 ‘동(銅)’자와 골짜기 ‘곡(谷)’자를 써서 동곡(銅谷)이라고도 하였다. 도기촌이라고도 한다. 구릿골은 김제시 금산면 청도리 하운동마을의 서남쪽에 있는 마을로, 증산교도들이 성지로 받드는 동곡약방(銅谷藥房)[구릿골약방]이 있어 널리 알려진 마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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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용호리에 있는 자연마을. 마을 앞에 거북의 머리 같은 바위가 있고 마을 뒷산 모습이 거북등을 닮았으며, 마을은 거북의 꼬리 부분에 알을 낳은 형국이라 하여 ‘구미란(龜尾卵)’이라는 이름이 유래했다고 한다. 구미란은 1894년 12월 동학농민운동 당시 일본군과 관군을 대적한 동학군이 이곳에서 싸우면서 마을이 모두 불타 버리고 수백 명의 동학군이 죽었다는 전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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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김제시 서암동에 있는 자연마을.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구수산(九水山)[46m]의 모습이 마치 소나 말의 여물을 담는 구수통[구유통의 사투리]과 같다 하여 구수멀이라고 했다는 설과 마을 뒷산의 구수산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있다. 또한, 구수산 밑의 샘구멍이 아홉 개여서 구수멀이라고 했다는 설과 구수산 아래 있는 마을이라는 뜻에서 붙여졌다는 설도 있다. 구수산은 신곡동·갈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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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김제시 금구면 산동리에 있는 자연마을. 구암마을 서쪽에 위치한 둔산마을 동쪽 들 가운데에 큰 바위가 있는데, 마을 어귀에 있는 팽나무 밑에서 바라보면 영락없이 거북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마을 이름을 거북 ‘구(龜)’자를 써서 구암(龜岩)이라 하였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거북 구(龜)자 대신 아홉 ‘구(九)’자를 써서 구암(九岩)으로 바뀌었다. 199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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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김제시 부량면 옥정리에 있는 자연마을. 김제시 부량면 옥정리의 고잔(古棧)은 일명 ‘배수지’ 또는 ‘나루터’라고도 했는데, 배가 닿는 곳이라서 부두에서 바다로 나가게 만들어 놓은 다리가 있는 곳이라는 의미로 ‘고잔’이라 했다고 한다. 2009년 11월 현재 총 10가구에 19명[남자 8명, 여자 11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고잔은 앞군개 동북쪽에 있는 마을로, 보통은 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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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김제시 황산면 남산리에 있는 자연마을. 증산교 신자들이 황무지를 개간하여 형성한 마을이라는 뜻으로 개전곡(開田谷) 또는 개전지(開田地)로 불리다가, 지형적으로 북쪽이 막혀 있고 남쪽이 트여 사철 따뜻한 햇볕이 내리쬐는 곳이라 하여 남양(南陽)이라 부르게 되었다. 1945년 8·15 광복을 전후하여 증산교 신자들이 터를 잡고 살기 시작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이후 마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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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김제시 죽산면 홍산리에 있는 자연마을. 1040년경 마을이 처음 형성될 당시 비홍락지(飛鴻洛地)라는 명당이 있어 홍산촌(鴻山村)이라 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마을에 살던 박씨 문중의 한 장수가 전쟁터에서 전사한 뒤 그의 말과 안장 그리고 칼만 돌아왔는데, 그 말이 죽은 뒤에 묻었다는 말뫼동산, 기러기가 날아가다 쉬어 간다는 홍지뫼[鴻止山], 화초산(花草山) 줄기로 둘러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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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김제시 연정동에 있는 자연마을. 마을에 만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차디찬 샘물이 나오는 곳이 있다 하여 냉정(冷井)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냉정이란 이름과 관련하여 마을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한다. 옛날 어느 마을에 성질이 아주 포악하고 몹시 심술궂은 박우남이라는 사람이 살았다. 마을 사람들은 박우남을 마을 밖으로 쫓아내려고 하였는데, 마침 그가 알 수 없는 피부병에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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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김제시 부량면 대평리에 있는 자연마을. 넓은 들 가운데 자리 잡고 있어 ‘큰들’이라 부르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당시 한자로 표기하면서 대장(大場)으로 바꾸었다. 대장마을은 해발고도 약 5m 미만에 위치하여 부량면의 다른 마을들과 마찬가지로 동진강(東津江)과 원평천(院坪川)의 물이 서해로 빠지는 물길 주변인 탓에 홍수로 인한 피해가 심하였다. 대장마을은 부량면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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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김제시 백구면 유강리에 있는 자연마을. 옛날 마을에 15세쯤 되는 두 아이가 장사를 하면서 살았는데, 어느 날 바다에 나갔다가 풍랑을 만나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두 아이가 살던 마을이라 하여 동자(童子)라 불렀다고 한다. 본래 익산군 오산면 오산리에 속한 지역이었으나, 1973년 7월 1일 만경강(萬頃江)을 경계로 김제군에 편입되었다. 1995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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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김제시 금구면 산동리에 있는 자연마을. 마을 뒤를 휘감고 병풍처럼 감싸고 있는 산자락이 마치 소가 누워 있는 모양과 같다 하여 풍수지리상 와우혈(臥牛穴)이라고 하는데, 그중 마을은 소의 머리 부분에 해당한다. 이처럼 산이 마을을 빙 둘렀다고 하여 ‘두른산’이라고 하다가 ‘둔산’이 되었다. 또 다른 유래로는 임진왜란 때 군사들의 주둔지였기 때문에 군사산이라고 부르다가 둔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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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김제시 복죽동에 있는 자연마을. 조선시대인 1650년경 마을 입구에 마을로 들어서는 리문(里門)이 세워지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당시 마을에 대나무가 무성하여 대메[竹山]라고도 불렀으며, 나중에 마을이 커짐에 따라 상죽(上竹)과 하죽(下竹)으로 나누어졌다. 이때 서쪽의 상죽마을을 죽절, 동쪽의 하죽마을을 리문이라고 불렀다. 리문안 터에 자리를 잡고 살기 시작한 사람은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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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김제시 양전동에 있는 자연마을. 만석동은 벼 만석을 거두어들일 만큼 큰 부자가 나올 좋은 터라는 풍수지리에 따라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과 망석산(網石山)[37m, 되뫼산]이 있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망석동이 만석동으로 변음한 것이라는 설이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만석꾼이 나오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이 김제와 연결되는 지방도 714호선을 개설하면서 마을 북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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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김제시 신풍동에 있는 자연마을. 모새멀은 신풍동의 신흥마을, 대촌마을, 소라단 지역 등 김제역(金堤驛) 앞의 서남부 지역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모새는 모래의 사투리이다. 모래땅 위에 세워진 마을이라서 모새멀이라고 했다는 설과 1912년 김제역이 개통되면서 각지에서 새롭게 모여든 사람들이 마을을 이루고 살기 시작하여 만들어진 마을이라는 의미로 모새멀이라고 불렀다는 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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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청도리에 있는 자연마을. 백운동(白雲洞)이라는 명칭은 이 마을이 높은 산의 기슭에 자리하고 있어 항상 흰 구름에 둘러싸여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백운동은 한때 ‘제2전매청’이라 불렀다고 한다. 광복 후 담배 사기가 몹시 힘들었던 시절에 마을 사람들이 집집마다 담배 마는 기계를 설치하고 담배를 만들어 팔아 생계를 꾸려 나갔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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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김제시 용지면 부교리에 있는 자연마을. 백자를 굽던 마을이라 하여 백자동(白磁洞)이라고 부르다가, 도공들이 천대받는 사회에서 자신들의 신분을 감추고 마을이 번창하기 위해서는 자식을 많이 낳아야 한다고 해서 백자(百子)라 불렀다고 한다. 조선 후기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박해가 심해지자 당시 익산군 함라현에 살던 유군심이 박해를 피해 숨어들어 살면서부터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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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김제시 죽산면 신흥리에 있는 자연마을. 만경강(萬頃江)의 바닷물이 마을 앞뒤로 드나든다 하여 보안(洑岸), 복이 많이 들어온다는 뜻에서 복간(卜間)이라 했다고 한다. 한때 일본인들이 ‘신복’이라고 부르다가, 광복 후 다시 복간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옛날 조수를 막기 위해 쌓았던 제방 사이에 있는 마을이라는 의미에서 보간(洑間)이라고 부르다가, 발음이 변하여 복간이 되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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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쌍용리에 있는 자연마을. 금을 많이 캐내어 부자가 된 마을이라는 뜻으로 부평(富坪)이라 했다는 이야기가 있는가 하면, 금을 캔 구덩이를 메우고서 그 위에 집을 짓고 사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뜰 ‘부(浮)’자를 써서 부평(浮坪)이라고 했는데,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부자 ‘부(富)’자로 고쳤다는 이야기도 있다. 부평마을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사금(砂金)을 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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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김제시 상동동에 있는 자연마을. 서남쪽 야산 사이에 구수 새암골, 모래 새암골, 군수 새암골 등 세 골짜기의 물이 마을 앞으로 모여서 삼수동(三水洞)이라 하였다. 삼수동에 처음 터를 잡은 사람은 노장군이며, 이후 박씨와 조씨가 들어온 뒤 지금은 여러 성씨가 살고 있다. 삼수동은 10~20m의 구릉지에 위치하며, 경위도상 위치는 북위 35° 49′ N, 동경 126° 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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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김제시 진봉면 고사리에 있는 자연마을. 석소마을은 옛날 질 좋은 숫돌이 나서 나라에 바치게 되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두곡서원(杜谷書院)에 모셔져 있는 신천강씨(信川康氏) 중시조인 봉호당 강원기(康元紀) 덕분에 나라에 숫돌을 바치던 제도가 정읍시 태인(泰仁)으로 넘어갔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남쪽으로 진봉반도(進鳳半島)의 간척지가 광활하게 펼쳐져 있지만 낮은 구릉들이 마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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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김제시 죽산면 종신리에 있는 자연마을. 수교(水橋)는 약 130년 전까지만 해도 신평천(新坪川)이 서해로 유입되는 하구의 나루터였다. 이곳에 사람들이 모여 마을을 이루면서 벼농사에 필요한 물을 대고자 소나무로 일종의 보(洑)를 만들어 물을 가두었는데, 이 보가 장마 때에는 무너미[봇물을 대기 위해 도랑을 걸쳐 막은 부분]가 되고, 평소에는 다리가 되었으므로 수교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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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김제시 신덕동에 있는 자연마을. 백제 때 벽골제(碧骨堤)를 쌓을 당시 5개의 수문을 만들었는데, 이 중 북쪽 제1수문인 수여거 옆에 벽골제에 물이 가득 찼을 때 둑을 보호하기 위한 무너미를 만든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이 무너미를 한자로 하면 수월(水越)이 되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변하여 수월(水月)이 되었다. 지금도 동쪽 입구에 마치 갈치처럼 생긴 길이 약 200m,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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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김제시 난봉동에 있는 자연마을. 1910년대 사금 채취가 활발해지면서 새로 마을이 형성되었으므로 신성(新成)이라 하였다. 마을 동쪽 약 2.5㎞ 지점에 있는 쌍감리의 고산[높은뫼, 63.8m] 쪽 봉우리에서 솟아오르는 아침 해를 잘 볼 수 있어 해바라기라고도 한다. 1915년경 황산면 두월천 일대에서 사금 개발이 활발해지면서 사금을 캐는 사람들로 붐빌 때 일본인 월천(月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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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김제시 진봉면 심포리에 있는 자연마을. 지명이 목너머→갈너머→안하의 순서로 바뀌었다. ‘목너머’는 기러기의 목처럼 긴 안행산에서 길곶으로 넘어가는 고개 너머 마을이라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다. ‘갈너머’는 7월 중순쯤 바닷물이 넘치면 마을이 떠내려가 다시 다른 곳으로 마을을 옮기곤 했던 당시 마을 뒷산의 이름이 갈매기산이었기 때문에 갈매기산 너머 마을이라고 부르던 것이 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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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김제시 백산면 상정리에 있는 자연마을. 마을 주위에 여뀌[마디풀과의 한해살이풀. 잎이나 줄기에 털이 없으며, 매운맛으로 향신료나 약재로 쓰임]가 무성하고 마을 앞에 냇물을 건너는 다리가 있어 여뀌 ‘요(蓼)’, 다리 ‘교(橋)’자를 써서 요교(蓼橋)라고 부르던 것을 우리말로 풀어 ‘여꾸다리’가 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지형은 물이 동쪽에서 서쪽,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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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김제시 용동에 있는 자연마을. 옛날 밀물과 썰물이 드나들던 포구였는데 바닷물이 빠지고 갯벌이 드러나면 포구의 모양이 여우의 생김새와 같아서 여시개라고 부르던 것이 변하여 여수해(麗水海)가 되었다는 설이 전한다. 또 마을 뒤를 감싸고 있는 산의 형국이 마치 여우와 같아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입천(立川)·선내라고도 한다. 고려 예종 말에 나석(羅碩)이 터를 잡고 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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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에 있는 자연마을. 오리알터[일명 오리터]는 금평저수지(金坪貯水池) 일대를 말하는 것으로, 신라 말엽 중국의 풍수지리를 한반도에 소개했다고 알려진 도선대사가 장차 오리가 알을 낳는 곳이 되리라는 예언에 따라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실제로 1961년 이곳에 금평저수지가 축조되면서 겨울이면 철새인 물오리가 많이 날아들어 이름 그대로 오리가 알을 낳는 곳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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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김제시 죽산면 홍산리에 있는 자연마을. 홍산리에 속한 내촌[당시에는 내리] 바깥쪽에 있는 마을이므로 외리(外里)라 하였다. 약 300년 전 장씨와 임씨 등이 처음으로 터를 잡고 살기 시작하면서 형성된 마을이다. 임씨들이 주축이 되어 저수지를 쌓으면서 번성하기 시작하였다고 하는데, 저수지의 흔적은 찾아보기 어렵다. 외리는 홍산[24m]에서 서쪽으로 뻗어 내린 낮은 구릉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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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김제시 부량면 신용리에 있는 자연마을. 용추의 ‘용’자와 벽골제(碧骨堤)의 ‘골’자를 따서 용골(龍骨)이라 하였다. 벽골제 둑을 따라 길게 늘어선 마을의 모습이 마치 용과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백제시대에 조성한 벽골제 둑이 오랫동안 방치되어 파괴되면서 둑 밑에 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둑이 다시 축조되고 무너지길 반복하면서 시대에 따라 많은 마을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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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에 있는 자연마을. 마을을 감싸고 있는 산줄기가 마치 커다란 용이 누워 있는 형국이어서 용화동(龍華洞)이라 하였다. 1789년 간행된 『호구총수(戶口總數)』에는 용화동(龍化洞)으로 기록되어 있다. 조선 말기 김제군 수류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약 300년 전 처음 마을이 형성되었다. 약 150년 전에는 옥천육씨가 살았고, 뒤를 이어 진사 최씨, 참봉 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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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김제시 만경읍 만경리에 있는 자연마을. 여관을 비롯하여 여인숙·주막 등이 있었고, 서원(書院)에서 유학을 공부하는 학자들이 모여 살았다 하여 원거리(院巨里)라 하였다. 또한 이곳에 죄인들의 사형을 집행하는 터가 있어 백성들의 원망이 높았기 때문에 원거리(怨巨里)라고도 하였다. 동산(東山)[60m], 사직산(社稷山)[25m], 능제저수지(菱堤貯水池)가 마을을 둘러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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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김제시 입석동에 있는 자연마을. 입석(立石)은 마을에 선돌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교동월촌동의 법정동인 입석동의 중심 마을로 구릉지에 자리 잡고 있다. 김제 시가지에서 남쪽 부량면 방향으로 약 1.5㎞ 지점이다. 입석마을은 진가·제남·남산·용현·신촌·용두 등의 마을과 더불어 입석동에 있는 자연마을로 입석동의 중심 마을이다. 문화재로 전라북도 민속자료 제7호인 월촌입석(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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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김제시 만경읍 몽산리에 있던 자연마을. 군산 방면에서 만경으로 들어오는 길목에 장승이 서 있었기 때문에 장승배기라 하였다. 과거 만경현의 읍치인 만경읍에서 청하면 또는 군산의 옥구현으로 가는 길목에 있던 마을로 만경강(萬頃江)과 가깝다. 과거에는 장승배기와 이웃한 몽포까지 배가 드나들던 포구여서 육상과 해상 교통로가 교차하는 곳에 자리 잡은 전형적인 주막촌이었을 것으로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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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김제시 공덕면 저산리에 있는 자연마을. 배의 닻을 매어 두던 곳이라는 뜻에서 닻매라 하였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닥나무 ‘저(楮)’자와 골 ‘동(洞)’자를 써서 저동(楮洞)으로 고쳤다. 1500년대에 남평문씨(南平文氏)가 터를 잡고 살기 시작하면서 형성된 마을이다. 만경강(萬頃江)의 직강 공사가 이루어지기 전에는 강물이 마을 뒤에 있는 당제산(堂祭山)[29m]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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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김제시 봉남면 대송리에 있는 자연마을. 옛날 벽골제(碧骨堤)가 제구실을 할 때 황산(凰山)[118m]이 섬이 될 정도로 물이 들어와 이곳까지 배가 드나들었으므로 접주(接舟)라 하였다. 일설에는 구성산(九城山)[487.6m]에서 바라보면 바다 위에 떠 있는 형상을 하고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하고, 배에 짐을 많이 실으면 가라앉듯 큰 부자가 나도 그 영광이 얼마 못 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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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김제시 봉남면 종덕리에 있는 자연마을. 종정(從政)은 고려시대부터 부르던 이름으로, 이곳에 행정을 수행했던 치소(治所)가 있던 데서 유래하였다. 고려시대 종정현의 관청이 있던 마을이다. 그 흔적으로 당시에 세운 것으로 여겨지는 높이 2m가량의 ‘종정문주’라고 불리는 자연석이 남아 있다. 옛 종정현에는 월평(月坪)·회평(回坪)·원평(院坪)·내주평(內注坪)·신주평(新注坪)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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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김제시 복죽동에 있는 자연마을. 마을에 대나무가 무성하여 대메[竹山]라 하였는데, 나중에 마을이 번창하여 상죽(上竹)과 하죽(下竹)으로 나누어졌다. 이때 서쪽의 상죽마을은 죽절(竹節), 동쪽의 하죽마을은 리문(里門)이라고 하였다. 죽절이 있는 복죽동은 원래 김제군 대촌면 지역으로 1914년 월촌면이 되었고, 1989년 김제읍이 김제시로 승격하면서 김제시 교동에 편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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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김제시 청하면 동지산리에 있는 자연마을. 마을 뒤에 있는 산의 지형이 마치 자처럼 길게 생겼다고 하여 척산(尺山)[일명 잣뫼, 30.1m]이라 하였다. 또한 만경강(萬頃江)을 거슬러 올라와 약탈을 일삼던 왜구들을 막기 위해 이곳에 성을 쌓았는데, 그 성이 마치 자처럼 길게 뻗어 있어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1450년경 수원에 살던 정성여라는 사람이 과거에 낙방하자 고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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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김제시 백학동에 있는 자연마을. 1930년대 원평천(院坪川)에 배수갑문이 설치되기 이전 두월천(斗月川)이 조수의 영향을 받을 때 서해에서 원평천과 두월천을 따라 여수해(麗水海)를 거쳐 이곳에 닻을 내렸는데, 포구 안에 마을이 있었으므로 포내(浦內)라고 하였다. 포내의 앞 논 한가운데에는 당시 배를 매어 두었던 돌기둥이 있었는데, 경지 정리를 하면서 마을 앞 모정으로 옮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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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김제시 만경읍 화포리에 있는 자연마을. 깨끗하고 물맛이 좋은 우물이 있어 토물이라 하였다가 토정(土井)으로 고쳤고, 후에 마을 규모가 커지자 대토(大土)라 하였으며, 행정구역 개편 때 일본인들이 토정(土亭)으로 고쳤다. 『토정비결(土亭秘訣)』을 지은 이지함(李之菡)이 살았던 곳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약 500년 전에 청풍김씨(淸風金氏) 중시조가 터를 잡고 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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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김제시 백학동에 있는 자연마을. 마을 한가운데 큰 우물이 있어서 한우물 또는 대정(大井)이라 하였다. 두월천(斗月川) 북쪽 구릉에 형성된 마을로 자연 샘물이 있던 곳이다. 마을 한가운데에 있던 큰 우물의 깊이는 약 5m, 수심은 약 3m로 아무리 많은 물을 사용해도 줄지 않았다고 한다. 옛날 김제 지역에 극심한 가뭄이 들었을 때 이 우물만은 마르지 않아 황산면에서 배를 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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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김제시 교동에 있는 자연마을. 교동에 있는 향교·교남·성산·신동·사직단 등 5개 자연마을 가운데 향교마을과 교남마을을 향교골이라고 한다. 향교골은 향교가 있는 마을, 향교가 있는 골짜기에 형성된 마을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향교골은 과거 김제 교육의 중심지로 성산(城山)[42m] 동남쪽에 자리 잡고 있다. 문화재로 2007년 사적 제482호로 지정된 김제군 관아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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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김제시 죽산면 대창리에 있는 자연마을. 해창(海倉)이란 지명은 해상 교통이 편리한 이곳에 나라에서 세운 창고가 있었던 데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된다. 해창은 원평천(院坪川)이 서해와 만나는 하구에 발달한 포구 마을이었다. 김제시 죽산면 죽산리에 있는 명량산(鳴良山)[300m]에서 뻗어 나온 구릉이 서해와 만나 멈춘 지점에 마을이 자리 잡고 있어 예로부터 해산물과 육산물의 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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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김제시 장화동에 있는 자연마을. 후장(後長)이 있는 장화동은 1450년경 당시 성균관 진사였던 돈화 정임(鄭任)이 벼슬을 그만두고 화산(花山)으로 내려와 살면서 마을 이름을 장화(張華)라 한 데서 유래하였다. 장화(障化) 또는 꽃잔[華殘]이라고도 하였다. 마을 서쪽에 있는 화초산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 장화동이 커지면서 전장[전장화]과 후장[후장화]으로 나누어졌다.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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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김제시 흥사동에 있는 자연마을. 흥복(興福)은 승가산(僧伽山)[56m]에 있는 흥복사(興福寺)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흥복사는 원래 650년 고구려의 고승 보덕대사가 승가사를 지은 곳으로,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 절이 파괴된 뒤 1625년(인조 3) 김제 사람 흥복이 재산을 털어 다시 절을 짓고 흥복사라 이름하였다고 한다. 전설에 따르면, 흥복은 당시 김제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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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김제시 광활면 옥포리에 있는 자연마을. 일제강점기 마을 주민들이 일본인이 경영하던 농장 지배인의 못마땅한 행동에 울분을 참지 못하고 시위를 벌이다가 주모자가 잡혀 수모를 당하자, 일을 수습하기 위해 창고에 모여 자주 회의를 열었다고 하여 회령(會寧)이라 하였다. 바다를 건너온 중국 사람들이 제방 쌓는 일에 참여했다 하여 대국촌(大國村)이라고도 한다. 일제강점기에 갯벌이 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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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김제시 만경읍 몽산리에 있는 자연마을. 앞마을 소덕(小德)에 화양거사(華陽居士)가 세운 화양사(華陽寺)가 있어 화양(華陽)이라 하였다. 화양은 일제강점기 간척되기 전에는 바닷물이 드나들던 지역으로, 만경읍에서 북서쪽으로 뻗은 구릉 끝자락에 자리 잡고 있다. 해발 고도 2m 안팎의 낮은 평야 지대가 펼쳐져 있어 벼농사가 주로 이루어진다....
고지명·자연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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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김제시 요촌동 상가 밀집 지역의 옛지명. 본정통(本町通)은 일제강점기 때 김제 지역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였던 서독안경사거리[전북지업사, 과거 박약국 간이 배차장]~안경박사사거리~금만사거리 구간을 말한다. 금만쇼핑거리라 부르기도 하였다[박약국사거리까지를 말하기도 함]. 일제강점기에 혼마찌라고 하다가 해방 이후 본정통이라 불렀는데, 당시 김제에서 가장 번화했던 상가 밀집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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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김제시 요촌동에 있는 거리의 고지명. 사정거리는 활을 쏘던 홍심정(紅心亭)이 있던 데서 유래한 지명이다. 홍심정은 1789년(정조 13) 열두 고을 마을 사람들이 모여 성산공원 북쪽 언덕에 활터를 만들고 활을 쏘았던 곳으로 지금도 ‘벽성십이동천(碧城十二洞天)’이라는 비석이 남아 있다. 1820년 옥거리[현 옥산동]로 이전하였고, 1826년 서변면 사정거리[현 요촌동의 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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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김제시 요촌동의 성황당이 있던 고지명. 서낭댕이는 길가에 큰 정자나무와 성황신을 모시는 사당인 성황사가 있던 데서 유래하였다. 『김제군지』에는 “군의 동쪽 2리에 성황사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현재 서낭당길에서 동북쪽으로 이어지는 김제초등학교와 김제중앙초등학교의 사잇길인 요촌9길에 해당하며, 성황마을과 용성마을 사이이다. 경위도상 위치는 북위 35° 48′ 06″ 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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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김제시 검산동 대검산마을 남쪽 들에 있는 논. 과거 바닷물이 원평천(院坪川)과 그 지류인 두월천(斗月川)을 따라 김제시 백학동 포내마을 앞까지 바닷물이 드나들던 때에, 소금을 가득 실은 배가 이곳에서 사고를 당하였다. 이후 이곳은 논으로 변하였는데 이 논의 이름을 소금배가 뒤집힌 곳이었다 하여 소금배미라고 불렀다. 지금도 가뭄이 들면 제일 먼저 물이 마른다고 한다. 소금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