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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400646
한자 杞溪兪氏
영어공식명칭 Gigye Yusi|Gigye Yu Clan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성씨/성씨
지역 충청남도 당진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김남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입향 시기/일시 15세기
본관 기계(杞溪) - 경상북도 포항시 기계면
입향지 기계유씨 당진 입향지 - 충청남도 당진시 면천면 성상리 지도보기
입향지 기계유씨 당진 입향지 - 충청남도 당진시 우강면 창리 지도보기
세거|집성지 기계유씨 당진 세거지 - 충청남도 당진시 면천면 성상리
세거|집성지 기계유씨 당진 세거지 - 충청남도 당진시 우강면 창리
묘소|세장지 기계유씨 당진 세장지 - 충청남도 당진시 면천면 자개리 지도보기
묘소|세장지 기계유씨 당진 세장지 - 충청남도 당진시 우강면 창리
성씨 시조 유삼재(兪三宰)
입향 시조 유승탄(兪承坦)|유언광(兪彦鑛)

[정의]

유삼재가 시조이고 유승탄과 유언광이 입향조인 충청남도 당진 지역의 세거 성씨.

[개설]

기계유씨(杞溪俞氏)는 신라 때의 유삼재(兪三宰)를 시조로 하는 성씨다. 충청남도 당진시 면천면 성상리에 주부동정공파(主簿同正公派), 우강면 창리에는 단성공파(丹城公派)가 세거지를 형성하고 있다. 면천면 성상리기계유씨 입향조는 유승탄(兪承坦)이고, 우강면 창리의 입향조는 유언광(兪彦鑛)이다. 성상리기계유씨는 약 500여 년의 역사를 갖고 있고, 창리기계유씨는 약 300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이들은 지역 사회의 유지로서 많은 활약을 하였고, 그 흔적을 각종 선정비로 남겼다.

[연원]

기계유씨의 시조 유삼재는 신라 때 아찬(阿飡) 벼슬을 지냈으나 자세한 기록이 전하지 않는다. 유삼재의 묘소는 현재 경상북도 포항시 기계면 현리에 있으며 유허비(遺墟碑)와 부운재(富雲齋)가 세워져 있다.

고려 초기의 유의신(兪義臣)은 고려 태조 왕건이 신라를 통합한 뒤 벼슬하기를 권유하였으나 신라의 신하로 남기를 바라며 왕건이 준 벼슬을 거절하였다. 이에 왕건은 유의신을 기계현(杞溪縣) 호장에 임명하였고, 후손들은 기계(杞溪)를 관향으로 삼았다.

그 후 기계유씨는 15개 파로 분파되었는데 그중 ‘주부동정공파’가 충청남도 당진시 면천면 성상리에 세거지를 형성하였다. 주부동정공파는 고려 시대 사재시(司宰寺) 주부동정(主簿同正)을 지낸 유형무(兪逈務)가 파조다. 또한 ‘단성공파’는 충남 당진시 우강면 창리에 세거지를 형성하였다. ‘단성공’은 단성 현감(丹城縣監)을 지낸 조선 후기의 문신인 유호(兪灝)가 파조다.

고려 시대의 기계유씨는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여러 대에 걸쳐 은둔 생활을 했다. 고려 말에 서서히 두각을 나타냈고, 조선 전기에 유응부(兪應孚)[?~1456]를 배출했다. 유응부단종을 위해 절의를 지킨 사육신의 한 사람이다. 기계유씨는 조선 시대 중종 때 예조 판서를 지낸 유여림(兪汝霖)[1476~1538] 대에 와서 중흥을 맞이한다. 조선 시대 명성을 떨친 기계유씨 인물들은 거의 유여림의 후손이다.

근현대 들어서 『서유견문록』을 저술한 유길준(俞吉濬)[1856~1914], 법학자 유진오(俞鎭五)[1906~1987]를 배출하기도 한 기계유씨는 조선 시대에 많은 명사를 배출했다. 특히 학문과 서화에서도 많은 뛰어난 인물을 배출했다.

[입향 경위]

당진시 면천면 성상리에 입향한 인물은 청풍당(淸風堂) 유승탄이다. 유승탄은 고려에 대한 충절이 남달라 조선 건국에 반발하여 입향하였다. 당시 같은 마을에 살았던 밀양 박씨인 명월당(明月堂) 박양(朴陽)과 교분이 깊어서 유승탄과 박양은 ‘청풍명월(淸風明月)’을 강조하며 술로 시름을 달래고, 학문과 시를 읊다가 세상을 하직하였다고 전한다.

또한 당진시 우강면 창리에 입향한 인물은 유언광인데, 유언광은 단성공파 파조인 유호의 7세손이다. 유언광은 조선 후기 숙종 때의 인물이다.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이 발생하자 과거 시험에 뜻을 버리고 경기도 안성에서 우강면 창리로 낙향하였다.

[현황]

유승탄의 후손들은 1986년 순성면 양유리에 있던 입향조 유승탄의 묘를 면천면 자개리로 이장하고 비석을 세웠다. 그리고 매년 음력 10월 12일에 시향(時享)을 올리고 있다. 유승탄의 후손들은 면천면 성상리에 집성촌을 이루었으나, 산업화가 진행되어 대부분 마을을 떠났고 2017년 현재 30여 호만 남아 있다.

우강면 창리에 입향한 유언광도 시와 술로 세월을 보냈다고 전한다. 유언광의 아들인 유한팔(兪漢八)은 효자였는데, 아홉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예법에 따라 장례를 치렀고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3년간 시묘살이를 하였다. 이에 유림의 추천으로 효자 정려를 받았고, ‘의정부 이조 참의(議政府吏曹參議)’에 추증되었다. 유언광의 손자인 유백환(兪百煥)은 동지돈령부사(同知敦寧府事)를 역임하였고, 증손자인 유치흥(兪致興)은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를 역임하였다. 또한 증손자 유치영(兪致永)은 면천 군수를 지내고, 고손자인 유진우(兪鎭雨)는 관상감 참봉(觀象監參奉)을 지내 명문으로서 자리매김하기에 이르렀다. 후손 가운데 유해준(兪海濬)[1917~1986]은 한국 광복군 제3 지대장으로 활동했던 독립운동가였고, 광복 이후 국군 창설에 가담하여 1967년 육군 소장으로 예편하였다. 유해준에게는 1977년 건국 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우강면 창리기계유씨들은 10여 대 300여 년 동안 집성촌을 형성하였지만, 이들도 거의 대도시로 이주하여 현재 몇 호만이 남아있다.

[관련 유적]

충청남도 당진시 우강면 창1리에는 기계유씨 관련 비석이 있다.

1) 전 청양 유치흥 시혜 불망비(前靑陽兪致興施惠不忘碑): 빈민의 세금을 납부해 준 유치흥의 선정을 기념한 비석[건립 연대 미상].

2) 전 승지 유치흥 영세 불망비(前承旨兪致興永世不忘碑): 유치흥이 흉년을 맞은 빈민들에게 곡식을 나누어 주어 수천 명의 목숨을 구한 것을 기념한 비석[1902년 건립].

3) 동돈녕 유백환 유애 불망비(同敦寧兪百煥遺愛不忘碑): 유백환이 1,000여 호에 달하는 주변 빈민들에게 저리로 융자해 주었고, 빚을 아예 탕감해 준 것을 기념한 비석[1898년 건립].

4) 대자선가 전 비서원 승 유공진태 송덕비(大慈善家前秘書院丞兪公鎭泰頌德碑): 유진태가 곡식을 풀어 빈민의 세금을 대신 납부해 주고 구제한 것을 기념한 비석[1921년 건립].

충청남도 당진시 합덕읍 성동리합덕 방죽 언덕 위에도 유치흥 기념비 1기가 있다. 전면에는 ‘종이품 유공 치흥 영구 기념비(從二品兪公致興永久紀念碑)’라 적고, 세부적인 기념 내용을 기록해 두었다. 후면에는 비석의 설립 시기를 기록하였는데 1911년으로 확인된다. 유치흥이 합덕 연제 물을 사용하는 주민들에게 곡식을 풀어 구제해 준 것을 기념하여 세운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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