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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400533
한자 孫秉熙遺墟
영어공식명칭 Son Byong-hi Historic Site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유적/건물
지역 충청남도 당진시 남부로 307-57[수청동 692]
시대 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집필자 윤성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관련 사항 시기/일시 1898년 8월~1899년 10월 - 손병희 당진 은거 시작·완료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12년 6월 19일 - 손병희 유허 윤성의와 남광현이 현지 답사하여 발견
현 소재지 손병희 유허 - 충청남도 당진시 남부로 307-57[수청동 692]지도보기
원소재지 손병희 유허 - 충청남도 당진시 남부로 307-57[수청동 692]
성격 가옥
양식 슬레이트 지붕[위채]|함석 지붕[아래채]
정면 칸수 [위채 6간]|[아래채 4간]
측면 칸수 [위채 4간|[아래채 2간]
소유자 차상윤
관리자 차윤영

[정의]

충청남도 당진시 남부로에 있는 천도교 3대 교주 손병희가 일시 은거하였던 가옥.

[개설]

손병희 유허(孫秉熙遺墟)는 천도교(天道敎) 3대 교주이며 기미 독립 선언(己未獨立宣言) 민족 대표 33인 중의 한 명인 손병희(孫秉熙)[1861~1922]가 동학 농민 혁명 실패 후 1898년 8월부터 1899년 10월까지 1년 3개월간 은거하던 집으로, 민족 격동기의 중요한 유적이다.

[위치]

손병희 유허는 충청남도 당진시 남부로 307-57[수청동 692]에 있다. 당진시청 앞에서 순성 방향으로 가다 보면 왼쪽에 당진1동 '띠울 마을'이란 안내 표지판이 서 있다. 그 길로 들어서면 서쪽에 마을 회관이 있고 300m 정도를 더 가면 길 왼쪽에 가옥 두 채가 있는데 두 채 중 서쪽의 빈집이 손병희 유허이다.

[형태]

가옥은 역 'ㄱ' 자형의 위채와 역 'ㄴ' 자형의 아래채로 이루어져 전체적으로 'ㅁ' 자 형태를 이루고 있다. 위채는 마루가 딸린 방 3개와 부엌, 그리고 광으로 이루어져 있고, 아래채는 마루가 딸린 방 1개와 대문간과 창고로 되어 있다.

[현황]

현재 집은 비어 있으며, 집 뒤에 있는 대밭에서 뻗어 나온 대나무가 마루를 뚫고 나오는 상태이고 아래채는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하다.

[발견 경위]

천도교 서울 교구에 있는 이동초로부터 부탁을 받은 향토 사학자 윤성의가 2012년 6월 19일 당진시청 문화재팀장 남광현과 함께 모동(茅洞) 소재 구옥(舊屋) 위주로 탐문하던 중 차윤영에게서 증언을 확보하였고, 서울 교구에 연락하여 『천도교사』의 내용과 정황이 부합함을 확인하였다.

[생활 민속적 관련 사항 ]

손병희가 이곳에 와 보니 식수로 사용할 만한 물이 없었는데, 집 앞에 물이 말라 버린 샘이 있어 쌓인 낙엽을 치우고 손질하니 물이 잘 나와 식수로 사용하였는데, 이듬해 손병희가 떠나고 나서는 물이 다시 말랐다는 이야기가 『천도교사』에 기록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손병희 유허는 동학 혁명사 및 우리 민족의 수난기 역사를 조명하는 데 중요한 유적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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