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4000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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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新宗敎 |
영어공식명칭 | New Religion |
이칭/별칭 | 신흥종교 |
분야 | 종교/신종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충청남도 당진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한창준 |
[정의]
충청남도 당진시에 있는 기성 종교에 대항하면서 새로 일어난 종교.
[개설]
일반적으로 신종교(新宗敎)라는 용어는 사회 전역에서 자리 잡고 있는 기성 종교들과 비교하여 성립 시기가 짧거나 새롭게 탄생한 종교들을 지칭한다. 그러나 신종교는 기성 종교와 마찬가지로 일정 수준의 신도 수와 교단 조직 그리고 교리 체계 등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성립 시기가 짧다는 이유와 기성 종교와 주장이 상반된다는 이유 등으로 아직까지 사회적으로 완전하게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는 뜻도 담고 있다.
[원불교]
원불교(圓佛敎)[Won-Buddhism]는 박중빈이 26살 때에 일원상(一圓相)의 진리를 대각하고, ‘진리적 종교의 신앙’과 ‘사실적 도덕의 훈련’으로써 파란 고해(波瀾苦海)의 일체 생령을 광대무량한 낙원으로 인도하기 위하여 개교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원불교 교명에 대하여 제2대 종법사인 송규(宋奎)는 “원(圓)이란 형이상으로 말하면 언어와 명상(名相)이 끊어진 자리라 무엇으로 이를 형용할 수 없으나, 형이하로써 말하면 우주 만유가 이 원으로써 표현되어 있으니, 이는 곧 만법(萬法)의 근원인 동시에 또한 만법의 실재인지라, 이 천지 안에 있는 모든 교법이 비록 천만가지로 말은 달리하나 그 실(實)에 있어서는 원(圓) 이외에는 다시 한 법(法)도 없는 것이다.”라고 밝혔다. 그리고 “불(佛)은 곧 각(覺)한다는 말씀이요 또는 마음이라는 뜻이니 ‘원의 진리’가 아무리 원만하여 만법을 다 포함하였다 할지라도 깨닫는 마음이 없으면 다만 이는 빈 이치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므로 원불(圓佛) 두 글자는 각자 마음에서 근본적 진리를 깨친 바탕 위에서 나타낸 것이므로 서로 떠나지 못할 관계가 있다.”라고 말하였다. 원불교 당진 교당은 충청남도 당진시 무수동1안길 9-46[읍내동 1173]에 있다.
[천도교]
천도교(天道敎)는 1860년 수운 최제우(崔濟愚)가 창시한 동학(東學)에서 출발하여 1905년 손병희(孫秉熙)가 개명한 종교이다. 따라서 최제우(崔濟愚)의 시천주(侍天主) 사상과 최시형(崔時亨)의 사인여천(事人如天) 사상을 계승하여, 손병희(孫秉熙)는 인내천(人乃天) 사상을 주장했다. 제1세 교주인 최제우를 대신사, 제2세 교주인 최시형을 신사, 제3세 교주인 손병희를 성사라고 각각 부른다. 천도교가 등장할 당시 손병희를 중심으로 한 개화파와 김연국 등을 중심으로 한 국내파 사이에 갈등이 있었고, 손병희 측이 일진회 사건을 계기로 김연국 일파를 출교 처분함으로써 결국 동학은 천도교와 시천교로 분리되었다. 이후 천도교는 합동과 재분열의 과정을 겪다가 1940년 최종적으로 합동하게 되었다. 남북 분단으로 인해 교인의 90% 이상이 살고 있었던 북쪽 교단을 상실하게 되었고, 그 결과 현재의 천도교는 동학 시절이나 일제 강점기에 비해 교세가 매우 약해졌다.
당진 천도교회는 1892년 10월에 박용태가 김란수, 차동로, 김재근, 김현구, 신태성 등이 천도교에 입교한 것이 기원이 된다. 박용태가 접주가 되었고 면천 천도교도 같은 시기에 설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표적인 인물로 박희인, 이창구가 있었다. 당시 당진현의 천도교 전교실(傳敎室)은 남면 토곡리[현 충청남도 당진시 당진읍 대덕리 토골]에 1907년 설립하였으며, 같은 해 12월에 교인이 급증하여 전교실을 당진 교구로 승격하였다. 1924년 4월 30일 천도교구는 충청남도 당진시 당진읍 읍내리로 이전하였다. 1947년 9월경부터 교인 수가 외세로 인해 점점 줄어들어 경제적 곤란을 겪게 되면서 교구를 매각하여 천도교 중앙 총부에 입금하고 충청남도 당진시 당진읍 수청리로 이전하였다. 현재는 충청남도 당진시 우강면 창리에 천도교 교당이 있고 소수의 활동인과 이마저도 거의 노인들이라 대외적인 활동은 거의 없는 형편이다.
[통일교]
통일교[The Unification Church]의 공식 명칭은 ‘세계 기독교 통일 신령 협회’이다. 지상 천국(地上天國)과 영계(靈界) 완성을 지향하는 종교로 1954년 5월 문선명(文鮮明)이 창시하였다. 전지 전능한 무형의 부모인 신(神)을 신앙하고, 신의 체(體)를 쓰고 있는 동시에 신과 분리된 존재인 문선명에게 중요한 위치를 부여하고 있다. 경전은 『원리 원본』을 보완한 『원리 해설』, 다시 이를 보완한 『원리 강론』이 있으며, 400여 권의 『문선명 선생 말씀 선집』과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내용들을 선별하여 최근에 발간한 『천성경(天聖經)』이 있다. 주요 의례로는 조상 해원식, 조상 축복식, 훈독회, 합동 결혼식 및 이를 간소화한 성주식 등이 있다.
세계 평화 통일 가정 연합 당진 가정 교회는 1957년 정대화에 의해 개척 하계(夏季) 40일 전도가 있었고, 1961년 7월 20일부터 8월 28일까지 천옥자, 김명대, 여순봉, 문원양, 허양, 이수정, 문명호 외 다수가 개척 전도를 진행하였다. 1975년 8월 27일에 충청남도 당진군 당진읍 읍내리에 교회를 준공하였고, 2013년 10월 13일 현재의 교회 장소인 원당리로 이전하였다. 교회 목회자는 제1대 김홍기 목사[1960년 7월 20일~1963년 7월 3일]로부터 현재 제24대 문두균 목사[2013년 3월 9일~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세계 평화 통일 가정 연합 당진 가정 교회는 가정에 대한 중요성을 홍보하고, 통일 교회의 전도 활동과 예배를 주활동으로 하고 있으며, 당진 원패밀리 다문화 센터 운영을 통해 다양한 지역 봉사 활동을 추진하고 있다. 또한 일본 전통 무용인 하나가사 공연 활동을 하고 있으며, 주기적으로 소외된 지역민에게 빨래 봉사, 집수리 봉사, 통역 봉사, 소외 아동 교육 사업, 요양원 방문 등의 봉사 활동을 추진하고 있다.
세계 평화 통일 가정 연합 당진 가정 교회는 현재 충청남도 당진시 원당로 75-42에 있으며, 지하 1층, 지상 3층 건물이다. 현재의 교회장은 문두균 목사가 맡고 있으며, 교회 임직자는 문두균 목사 외 17명이 맡고 있다. 세계 평화 통일 가정 연합 당진 가정 교회는 당진시에서 통일 교회의 전도 활동과 다문화 센터 운영 등 지역에 다양한 봉사 활동을 추진하고 있다.
[여호와의 증인]
여호와의 증인[Jehovah's Witness]은 1872년 찰스 테이즈 러셀이 미국 펜실베이니아 피츠버그에 세운 국제 성서 연구회로 시작되었다.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이름은 1931년 러셀의 후임자인 조셉 프랭클린 러더퍼드 재임 시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모든 세속 정부로부터 철저히 분리되어 있다.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지 않으며, 병역 의무 수행을 거부하고 선거에 거의 참여하지 않는다. 이들의 목표는 신정 국가인 하느님 왕국의 다스림을 받는 것이다. 러셀은 1874년을 그리스도의 보이지 않는 재림의 해로, 1914년을 그리스도가 재림하고 이방인 시대를 마감하는 해로 잡았다. 이들은 왕국 회관에서 집회를 열고 침례를 베풀며, 간음을 제외한 상황에서 이혼을 인정하지 않고 수혈을 거부한다. 한국에는 1912년 선교사 R. R. 홀리스터에 의해 전파되었다.
충청남도 당진시에는 신평면 솔안말길 42[거산리 26-1]에 여호와의 증인의 신평 회중이 있고 충청남도 당진시 합덕읍 운산리 245-4에 여호와의 증인의 왕국 회관이 있다.
[대순 진리회]
대순 진리회(大巡眞理會)는 증산(甑山) 강일순의 가르침을 모태로 하여 박한경에 의해서 세워진 신흥 종교이다. 신앙의 대상은 상제인 증산 강일순이며, 도주(道主) 조철제를 옥황상제로 받든다. 도전인 박한경은 1996년 사망했으며, 뚜렷한 후계자가 없는 상태로 있다. 일반 대중에는 "도를 아십니까?"라며 다가오는 길거리 포교 방식으로 알려져 있다. 길거리 포교로 인해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자 문화 체육 관광부에서는 면허 취소를 하겠다고 통보하였다. 대순 진리회에서는 길거리 포교를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였고, 현재 대순 진리회 본부에서는 적극적으로 길거리 포교 활동을 금지하고 있다. 그러나 대순 진리회를 탈퇴하여 2002년 설립한 대진 성주회에서는 길거리 포교에 적극적이다. 대순 진리회와 교리의 차이가 별로 없어 대순 진리회로 오인하는 경우가 많다.
[태을교]
태을교(太乙敎)는 증산교의 일파이다. 증산교는 증산 강일순(姜一淳)[1871~1909]에 의해 창시되었으며, 1900년 강일순이 29세 되는 해에 전주 부근의 대원사에서 7일간의 혹독한 수련으로 깨달음을 얻었다. 이후 자신의 사상을 전파하고 여러 이적을 보이기 시작하여, 1902년 자신이 인류의 공식적인 일을 주재하기 위해 땅에 내려 온 구천 상제(九天上帝)라 선포하였다. 동학이 제시한 희망을 실현시킬 것이라는 기대와 「정감록」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에게 종교적으로 명성을 떨쳤으나, 1909년 6월 24일에 그가 죽음으로써 명성은 거의 상실되었다. 강일순 사후 강일순의 추종자 중 강일순의 부인인 고부인에 의해 태일교로 승계되었고, 강일순의 제자인 차경석과의 경쟁으로 태을교와 보천교로 분파된다. 태을교는 강일순의 부인인 고부인이, 보천교는 강일순의 제자인 차경석이 이끌어 나간다.
당진군에 나타나는 증산교는 증산교의 한 종파인 태을교가 많이 분포되어 있다. 충청남도 당진시 정미면 덕삼리, 우산리, 산성리, 하성리 지역의 70~80% 주민이 태을교 신자이었고, 순성면 본리, 신평면 청금리 지역 등에서도 신자들이 있었던 것으로 주민들이 고증하고 있다.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태을교도들은 우리의 전통인 한복과 갓 그리고 댕기를 매고, 수염 등 우리 것을 고수했으며, 옛 선비들처럼 행동했다고 한다. 일제의 탄압을 많이 받았으며, 해방 후 세력이 많이 약해졌고, 1997년경에는 충청남도 당진군에서 태을교도들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태을교의 교리는 매우 다신론적이고 무속적인 형태를 지니고 있다. 과거와 현재, 미래라는 삼세설(三世設)을 믿었고, 현재는 과거와 미래가 만나는 시점이라고 한다. 운명은 신계(神界), 특히 인류와 함께 일을 처리하는 하늘의 주재자에 의해서 결정되어진다고 믿었다. 증산 강일순은 자신을 구천 상제의 화신으로 하늘의 주재자라고 주장하며, 첫째, 근심, 고통, 질병으로부터 인류를 구원하고, 둘째, 한국의 주권을 재확립하며, 셋째, 종교를 악으로부터 정화시킴으로써 인류를 구언한다는 세 가지 목표를 가지고 활동하였다.
증산교는 교리 중 많은 요소들이 무속적이고 도교적인 요소를 반영하고 있으며 기독교의 기본 교리도 반영하고 있다. 또한 세계 속에서 한국이 차지하는 위치를 복구시키고 현세와 미래의 정치 질서를 재확립 시킬 수 있는 힘을 주장한 점으로 볼 때 일제의 탄압 대상이 되면서까지 민족의 정치 질서를 세우고자 일제 강점기에 노력을 하였던 민족 종교의 하나로 볼 수 있다.
[한국SGI]
한국 SGI[Korea Soka Gakkai International]는 법화경의 정수(精髓)인 니치렌[日蓮, 1222~1282] 대성인의 불법(佛法)을 올바르게 계승해 불법의 근본 이념인 생명 존엄 사상을 실천하는 종교 단체이다. 창가 학회는 1930년 마키구치 쓰네사부로[1871~1944]에 의해 설립된 일본의 대표적인 신종교이며, SGI는 일본에서 시작된 창가 학회(創價學會)의 해외 조직으로 한국 SGI는 한국 창가 학회를 이르는 명칭이다. 마키구치는 1903년에 펴낸 『인문 지리학』의 저자로 널리 알려진 교육자이기도 한데, 이후 일련 정종에의 입문을 계기로 일련 정종의 교학에 입각한 교육 이론의 체계화에 몰두하여 『창가 교육학 대계』를 간행했다.
[대종교]
대종교(大倧敎)는 1909년 홍암 대종사(弘岩大宗師) 나철(羅喆)에 의해 탄생한 민족 종교이다. 대종교는 예부터 내려오는 우리 민족의 고유 신앙을 바탕으로 단군(檀君)을 교조로 하여 환인(桓因)과 환웅(桓雄)까지 삼신 일절(三神一切)의 천신을 받들고 있다. 대종교의 내력은 배달 민족의 역사와 같이하며 그 교리는 우리 민족의 정통 사상과 철학에 기인하고 있고 구현의 목표는 홍익인간(弘益人間)과 이화 세계(異化世界)이며 경전으로는 천부경(天符經)과 삼일 신고(三一神誥)와 참전계경(參佺戒經), 팔리경(八理經) 등이 있다. 특히 나철은 일본 침략에 맞서서 구국 운동의 선봉장이 되어 단군교 포명서(檀君敎佈明書)를 선포하였고 1914년에는 총본산을 동만주 화룡현(和龍縣) 청파호(靑波湖)로 이전하고 독립운동과 포교 활동을 동시에 전개하여 교단이 그게 성장하였다.
[의의와 평가]
신종교(新宗敎)라는 용어는 사회 전역에서 자리 잡고 있는 기존의 대형 종교들과 비교하여 성립 시기가 짧거나 새롭게 탄생한 종교들을 지칭한다. 또한 신종교는 기성 종교와 마찬가지로 일정 수준의 신도 수와 교단 조직 그리고 교리 체계 등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성립 시기가 짧다는 이유와 기성 종교와 주장이 상반된다는 이유 등으로 아직까지 사회적으로 완전하게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새롭다는 ‘신(新)’의 의미는 한편으로 별로 기반이 없고 정교화하지 못하다는 뜻이 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호소력으로 이미 저변에 확산이 되어 있다는 의미도 된다. 또한 신종교는 흔히 신흥 종교(新興宗敎)라고 일컬어져 왔으나, 그 용어에는 무시하고 비하하는 일상적인 의미 때문에 점차 사용이 지양되고 있으며, 현재는 신종교(新宗敎)라는 용어가 일반적으로 널리 사용되고 있다. 신종교의 개념을 놓고 일부 학자들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서 발생되었던 종교 운동과 산업화와 더불어 급격히 성장한 1960~1970년대 종교 운동을 구분하여 각각 신흥 종교와 신종교로 따로따로 구분하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신종교의 탄생 배경을 흔히 기성 종교에 대한 비판과 새로운 세계로의 지향에 무게를 두고 있으면서 또 한편으로는 대개 신종교의 열등성과 반사회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제시되는 경향이 강하다. 때문에 신종교의 특성으로써 교리 혼합 주의(敎理混合主義)[syncretism]와 기존 질서에 대한 부정적 관점 그리고 현세적 지상 천국 건설이나 선민 사상(選民思想), 종말론의 강조 그리고 신도 집단 내의 강렬한 연대 의식 등에 대하여 크게 지적받고 있으나 이러한 특성들은 결코 신종교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따라서 신종교를 객관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미 신종교에 부여되어 있는 기존의 관점이나 개념에 대한 철저한 비판 작업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