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400460 |
---|---|
한자 | 韓山李氏烈女門 |
영어공식명칭 | Memorial Gate for Lady Hansan Yisi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충청남도 당진시 신평면 순성로 982[상오리 산27-5]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남석 |
[정의]
충청남도 당진시 신평면 상오리에 있는 고엽의 아내 한산이씨의 열녀문.
[개설]
충청남도 당진시 송악읍 본당리에 살던 한산이씨(韓山李氏)[1820~1841]는 인근 마을인 신평면 상오리에 사는 고엽과 혼인하였다. 하지만 혼인한 지 불과 2년 만에 고엽이 질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자 자신의 허벅지 살을 베어 달여 먹임으로써 소생시켰다. 3년 후 고엽이 결국 사망하자 한산이씨는 남편의 관을 잡고 순절하였다. 조정에서는 이를 안타깝게 여기고 열녀문을 세우게 하였다.
[위치]
한산이씨 열녀문은 충청남도 당진시 신평면 순성로 982[상오리 산27-5]에 있다. 오봉제 저수지 버스 정류소 위쪽이다.
[건립 경위]
한산이씨는 송악면 본당리 출신으로 열일곱 살 때 인근 마을인 신평면 상오리의 고엽과 혼인하였다. 혼인한 지 불과 2년 만에 남편 고엽이 전신에 종기가 나는 질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자 정성을 다해 간병하였으나 차도가 없었다. 결국 한산이씨는 자신의 허벅지 살을 베어 달여 먹였고 남편 고엽은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하지만 고엽은 3년 만에 결국 사망하였고, 한산이씨는 장례 절차를 마치자마자 남편의 관을 끌어안고 순절하였다. 한산이씨의 열행은 널리 알려졌고, 충청도 관찰사가 조정에 건의하여 1842년(헌종 8)에 정려가 내려졌다.
[변천]
한산이씨 열녀문은 1842년(헌종 8년) 5월에 세웠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와 해방, 한국 전쟁을 거치는 과정에서 허물어지고 방치되었다. 그 후 1960년 정려를 복원하고 종손이 보관하던 열녀 목판과 열행을 기록한 현판을 봉안하였다. 하지만 이 열녀문도 점차 쇠락해지자, 1995년 4월 당진군의 지원으로 정려를 새롭게 지었다.
[형태]
한산이씨 열녀문은 대리석 기단 위에 기둥을 세우고 맞배지붕으로 정려를 지었다. 정려 안에는 붉은 현판이 있고 ‘열녀 고 학생 고엽 처 유인 한산이씨지문(烈女故學生高燁妻孺人韓山李氏之門)’, ‘상지 이십이년오월일 명정(上之二十二年五月日命旌)’이라 기록하였다. 또한 정려의 뒤편에는 한산이씨의 행적을 한문으로 기록한 현판을 매달아 두었다. 그리고 이 현판 내용을 한글로 번역하고, 그 번역문을 정려 앞의 비석에 새겨 세웠다.
[의의와 평가]
한산이씨의 열행으로 처가 마을인 송악면 본당리의 이씨와 시댁 마을인 신평면 상오리 고씨들 간에는 더욱 깊은 유대관계가 맺어졌고, 두 마을의 미담으로 많은 주민들에게 회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