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40045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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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漢陽趙氏烈女門 |
영어공식명칭 | Memorial Gate for Lady Hanyang Jossi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충청남도 당진시 석문면 삼봉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남석 |
건립 시기/일시 | 1824년 - 한양조씨 열녀문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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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축|증축 시기/일시 | 1858년 - 한양조씨 열녀문 중수 |
현 소재지 | 한양조씨 열녀문 - 충청남도 당진시 석문면 삼봉리 산224-12 |
원소재지 | 한양조씨 열녀문 - 충청남도 당진시 석문면 삼봉리 산224-12 |
성격 | 정려 |
양식 | 한옥 맞배지붕 |
정면 칸수 | 1간 |
측면 칸수 | 1간 |
[정의]
충청남도 당진시 석문면 삼봉리에 있는 한양조씨의 열녀문.
[개설]
『밀양 박씨 열행기』에 따르면, 한양조씨(漢陽趙氏)[?~?]는 박내정(朴來貞)의 부인이다. 부부는 19세기 순조 때 당진시 석문면 삼봉리 기시미 마을에 살았다. 한양조씨가 시집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남편이 병이 들어 사망하였다. 얼마 후 한양조씨도 병을 얻어 친정에서 치료를 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도적 10여 명이 한밤중에 한양조씨를 보쌈해서 납치했다.
도적들은 이덕원의 집 밀실에 한양조씨를 가두고 온갖 방법으로 회유하였다. 하지만 뜻을 이루지 못한 도적들은 강제로 추행하려 했지만 한양조씨의 완강한 저항에 막혀 실패에 그쳤다. 이 와중에 한양조씨는 도적들의 손길이 자신의 가슴에 닿은 것을 분개하여 칼로 자신의 가슴을 도려내고 팔을 잘라 자결하였다. 당황한 도적들은 시체를 삿자리[갈대로 엮어 만든 돗자리]에 싸서 바닷가에 암매장하였다.
한양조씨의 시동생이었던 박영홀(朴永忽)은 형수가 납치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끼니도 잊은 채 백방으로 수소문했고, 도적들의 정체가 이덕원과 양원명이란 사실을 밝혀냈다. 결국 도적들은 관가에 체포되어 취조 끝에 죄상이 드러났다. 범인 이덕원은 장살에 처해졌고, 나머지 도적들은 죄의 경중에 따라 귀양을 떠났다.
그 후 1824년(순조 24)에 아들 박영화가 왕이 행차할 때 바라를 울려 진정하게 되었고, 결국 왕명에 의해 열녀 정려를 세우게 되었다. 초기에는 재력이 부족하여 초가 정려를 세웠고, 1858년 무렵에 양지바른 곳에 열녀문을 다시 세웠다.
[위치]
한양조씨 열녀문은 충청남도 당진시 석문면 삼봉리 산224-12번지 기시미 마을에 있다. 마을 중앙의 작은 언덕에 두 개의 열녀문이 있다. 좌측의 작은 열녀문은 평산 신씨의 열녀문이고, 우측의 약간 큰 열녀문은 손자며느리인 한양 조씨의 열녀문이다.
[형태]
한양조씨 열녀문은 황토 기단 위에 정면 1간, 측면 1간으로 맞배지붕이며 겹처마 양식이다. 둥근 형태의 낮은 초석 위에 둥근기둥을 세웠다. 정면은 하방 밑까지 시멘트로 처리하고 하방 위로 홍살을 설치하였다. 측면과 후면은 중방 밑까지 시멘트 벽으로 처리하고 그 위에 홍살을 배치하였다. 열녀문 현판에는 ‘고 학생 박래정 처 유인 한양조씨 열녀지문 상지이십이년 갑신구월일 명정려(故學生朴來貞妻儒人漢陽趙氏烈女之門上之二十二年甲申九月日命旌閭)’로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간지 ‘갑신(甲申)’은 순조 24년으로, ‘상지22년(上之二十二年)’은 ‘상지24년(上之二十四年)’의 오기(誤記)로 보인다.
[현황]
한양조씨 열녀문은 평산 신씨 열녀문과 함께 잘 관리되고 있다. 정려의 위치도 마을의 중앙에 있고, 마을길도 정려 주변에 있다. 주민들은 정려 주변을 통행하면서 자연스럽게 열녀에 관한 내용을 주고받을 수 있게 되었고 주민과의 공감대도 깊게 형성하고 있었다.
[의의와 평가]
평산 신씨와 한양조씨의 열녀문은 밀양 박씨 문중에서 자랑하는 두 열녀문이다. 또한 평산 신씨와 손주며느리인 한양조씨는 모두 당진시 석문면 교로리에 세거지를 형성하고 있는 성씨인 만큼 이들의 열행은 석문 지역 세 가문의 자랑일 뿐 아니라 석문면의 자랑으로 여겨지고 있다.
[박문수 전설]
석문면에는 박문수(朴文秀)[1691~1756] 어사와 관련된 전설이 전한다. 어느 날 암행어사 박문수가 석문 지역 해변이었던 기시미 마을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박문수는 삼경이 지난 한밤중에 한 여인이 슬피 우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다음 날 사유를 알아보니, 이 마을의 밀양 박씨 문중에는 고부간인 두 과부가 살고 있었다고 한다. 시어머니는 38세였고, 며느리는 18세였다. 그런데 이틀 전에 며느리가 자결했다는 것이었다. 이웃 마을의 어떤 홀아비가 며느리를 보쌈하려다 실패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남자의 손길이 며느리의 가슴에 닿았다고 한다. 이를 수치스럽게 생각한 며느리는 예리한 칼로 자신의 가슴을 도려내고 자결하였고, 이를 슬프게 생각한 시어머니가 통곡하였다는 것이다. 이후 시어머니도 기시미 마을 앞바다에 뛰어들어 자살하였다.
박문수는 두 과부의 열행에 감동한 나머지 과부의 집 뒤편에 열녀문 2동을 나란히 세울 것을 명하고 손수 열녀 정려 현판 두 개를 직접 써서 매달아 놓았다고 한다. 하지만 암행어사 박문수는 18세기에 활동했던 인물이고 한양조씨 열녀문은 1824년에 세운 것으로 전혀 사실과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