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40038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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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百濟復興運動 |
이칭/별칭 | 백제 부흥 전쟁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충청남도 당진시 석문면 장고항리 |
시대 | 고대/삼국 시대 |
집필자 | 김학로 |
[정의]
충청남도 당진시를 비롯한 내포 지역에서 백제 유민들이 벌인 백제 부흥운동.
[역사적 배경]
고구려와 백제, 신라 삼국이 대립하고 있었던 650년대 삼국 중 가장 약소국이던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침공에 국가 존망이 위태로웠다. 신라는 국력의 열세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고구려와 동북아 패권을 다투던 당나라와의 동맹을 제안하였다. 고구려 침공에 여러 번 실패했던 당나라는 "백제를 먼저 멸망시키고 고구려를 남북에서 협공하자"는 신라의 제안을 수용하여 고구려를 격하기에 앞서 백제를 침공하게 되었다.
[경과]
660년 8월에 나당 연합군이 침공하여 9월 백제가 항복하였다. 따라서 당나라가 옛 백제 땅을 점령한 후 웅진 도독부를 두어 다스리게 했는데 그 통치가 매우 가혹하였다. 그해 9월 이후 복신, 도침, 흑치상지 등은 오늘날 당진을 비롯한 내포 지방에 해당하는 백제 서북 지방에서 나당 연합군에 대항하여 백제 부흥운동을 전개하였다. 백제 유민들은 초기의 자연 발생적인 저항에서 복신, 도침, 흑치상지 등 지도부를 구성하고 체계화하기에 이르렀다.
예산 임존성에서 시작된 부흥운동은 당진을 비롯한 서북부의 200여 개의 성과 3만의 백제 장정들이 호응하여 모여들었다. 당나라 군사의 공세를 이겨낸 백제 부흥군은 여세를 몰아 나당 연합군을 사비성에 몰아 넣고 포위 공격하였다. 『삼국사기』 문무왕 조에 의하면 이때 사비성의 2만 나당 연합군은 패망 직전에 이르렀는데 신라 원병의 도움으로 겨우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백제 부흥군은 왜국에 가 있던 왕자 부여풍을 왕으로 삼았다. 근거지도 예산의 임존성에서 홍성의 주류성으로 옮겼으며, 663년에는 당진 면천에 있는 피성으로 옮기게 되는데 피성은 오늘날 면천 몽산성이다. 이후 백제 부흥군은 고구려와 왜군의 지원을 이끌어 내 나당 연합군에 대항했지만 전력을 대폭 증강한 나당 연합군의 공격과 풍왕과 복신 간의 갈등 등 내분으로 나당 연합군의 총공세를 이기지 못하고 패망하고 말았다.
서기 663년 일본이 백제 부흥군을 지원하기 위하여 일본군 2만 7000여 명과 400여 척의 병선을 보냈으나, 10월에 백강구에서 나당 연합군과 치열한 전투 끝에 일본 지원군이 대패하였다. 일각에서는 '백강구(白江口)'를 흰 모래와 자갈이 해변에 가득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보고 오늘날 충청남도 당진시 석문면 장고항리 일대라고 주장하는 의견이 있다.
[결과]
백제 부흥군은 풍왕과 복신 간에 불신이 생겨 서로 반목하게 되었다. 복신을 제거하고 권력을 잡은 풍왕은 왜군의 도움으로 백강구에서 나당 연합군과의 최후의 전투를 치르게 된다. 백강구 전투는 동아시아 최초의 국제 해전으로 네 차례에 걸친 치열한 전투 끝에 나당 연합군이 백제와 왜의 연합군을 물리치는 것으로 판가름이 났다. 이로서 백제 부흥군의 백제 복원의 꿈도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의의와 평가]
백제 부흥운동은 나라 잃은 백성으로서 나라를 되찾기 위한 투쟁의 여정이다. 오늘날 충청남도 당진 등 내포 지방인 백제 서북부 지방 백성들은 패망한 나라를 복원하기 위한 투쟁을 벌였다. 백제 부흥운동은 비록 내분과 전력 차이로 인해 실패로 끝났지만 백제 유민들의 독립 정신과 저항 의지는 역사적으로 높이 평가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