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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향을 꿈꾸며 미륵을 기다리다 - 매향과 봉황산 미륵불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700021
한자 理想鄕-彌勒-. 埋香-鳳凰山彌勒佛
분야 종교/불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강원도 삼척시
시대 고려,조선
집필자 배재홍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삼척 매향방 - 강원도 삼척시 근덕면 맹방리 지도보기
봉황산 미륵불 - 강원도 삼척시 남양동 지도보기

[정의]

조선시대 민중의 구원자로서 미륵을 기다리며 향을 묻은 삼척시 근덕면의 매향터와 민중의 안식처 역할을 한 봉황산 기슭의 미륵불.

[개설]

민중은 미륵을 기다리며 살아왔다. 지배층에 비해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온 민중은 그들이 주인 되는 새로운 세상이 도래하기를 기원하였다. 아름다운 미래를 꿈꾸며 현재의 고통을 참아 내는 민중은 그들을 구원해 줄 구원자로서 미륵을 기다렸다. 미륵이 민중의 마음속 안식처로 자리한 것은 바로 이 같은 이유 때문이다.

강원도 삼척시 근덕면에는 미륵을 기다리며 향을 묻은 매향터가 있다. 고려시대부터 삼척 지역에서는 미륵에게 바칠 침향을 만들기 위해 매향을 하였다. 매향은 향을 오랫동안 땅에 묻어 침향을 만드는 것으로, 불교에서 침향은 여러 가지 향 가운데 으뜸이었다. 미륵불이 용화세계에서 성불하여 수많은 중생을 제도할 때 미륵에게 공양할 향을 만들기 위하여 매향을 하였고, 매향은 미륵불의 교화를 받아 미륵 정토에서 살겠다는 소원이 담겨진 것이다.

강원도 삼척시 남양동봉황산 기슭에는 미륵불이 있다. 삼척 지역의 민중들이 즐겨 찾아가 기도를 올리는 곳이다. 조선 후기 민중 사이에서 유행한 것이 미륵 신앙이다. 희망의 미래를 가져다줄 구원자로서 미륵은 민중의 안식처였다. 이에 따라서 미륵불은 다양한 부처가 모셔진 절이 아니라 집에서 가장 가까운, 그래서 언제나 쉽게 찾아갈 수 있는 곳에 있었다.

[소원을 담아 향을 묻다, 매향]

매향(埋香)은 향을 묻는 것을 말한다. 내세(來世)에 미륵불 세계에 태어날 것을 염원하면서 향을 묻고 비석을 세웠다. 그 비석이 매향비이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매향의 사례는 1309년(충선왕 복위 원년)에 세운 고성 삼일포 매향비와 1335년(충숙왕 복위 4)에 세운 정주 매향비, 1387년(우왕 13)에 세운 사천 매향비, 1405년(조선 태종 5)에 세운 암태도 매향비, 1427년(세종 9)에 세운 해미 매향비 등을 비롯하여 16사례를 확인할 수 있다.

매향이라고 하면 향을 오랫동안 땅에 묻어 침향을 만드는 것이다. 향을 오랫동안 땅에 묻어 두면 더욱 단단해지고 굳어져서 물에 넣으면 가라앉게 되기 때문에 침향이라고 한다. 침향은 불교에서 으뜸가는 향으로 삼고 있다. 이와 같이 매향은 미륵하생경(彌勒下生經)에 근거한 신앙 형태로서, 향을 묻는 것을 매개체로 하여 발원자가 미륵불과 연결되기를 기원하는 것이다. 즉 미륵불이 용화세계(龍華世界)에서 성불하여 수많은 중들을 제도할 때 그 나라에 태어나서 미륵불의 교화를 받아 미륵의 정토에서 살겠다는 소원을 담고 있다. 이와 같은 소원을 기록한 것이 매향비이다.

[삼척에서 이루어진 매향]

미륵의 하생을 기다리며 삼척 사람들은 향나무를 묻었다. 매향이다. 향(香)은 불교에서 다(茶), 화(花), 과(果), 미(米)와 함께 다섯 가지 공양물에 속한다. 향은 선인들이 제사를 올릴 때 불을 피워 사르는 나무를 일컫는다. 이때 향을 태우는 풍속은 창공에 떠도는 영혼을 이끌기 위한 촉매이며, 의식이다. 지금도 제사 때 향을 사르고 술잔을 올리는데 거기에 함유된 의미는 상징성이 있다.

향 가운데 침향은 향목이 굳은 목심 부분으로, 물에 가라앉는 것이 향이 짙다고 하여 최고로 평가받았다. 침향은 향을 오랫동안 땅에 묻어서 만드는 것이다. 향을 오랫동안 땅에 묻어 두면 더욱 단단해지고 굳어져서 물에 넣으면 가라앉게 되기 때문에 침향이라고 한다. 그러한 향을 불교에서는 으뜸가는 향으로 삼고 있다. 민중은 내세에 미륵불 세계에 태어날 것을 염원하면서 향을 강이나 바다에 묻는 매향을 하였다.

삼척시 근덕면 맹방에 매향을 하였다. 이 같은 사실은 고성 삼일포 매향비에 기록되어 있다. 고성 삼일포 매향비는 고성 삼일포의 남쪽 호반에 있었다고 하지만 비석은 없어지고 비문의 탁본만이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같은 내용이 허목(許穆)[1595~1682]의 『척주지(陟州誌)』김종언(金宗彦)『척주지』에 기록되어 있다. 이들 기록에 따르면 평해(平海) 해안동(海岸洞)에 1000주를 묻고, 삼척맹방정(孟芳汀)에 250주를 묻고, 강릉 정동(正東)에 310주를 묻고, 양양덕산망(德山望)에 200주를 묻고, 동산현(洞山縣)문사정(文四汀)에 200주를 묻고, 간성공수진(公須津)에 110주를 묻고, 흡곡(歙谷) 지말리(知末里)에 110주를 묻고, 압계현(押戒縣)학포구(鶴浦口)에 120주를 묻었다.

삼척시 근덕면 맹방은 기록에 나타난 사실 그대로 매향처로 알려져 있다. 맹방이라는 지명도 매향을 한 곳이라는 의미의 매향방(埋香芳)에서 유래된 것으로 전해진다. 그리고 맹방 주변 해안은 매향을 행한 바닷가라는 뜻에서 매향안(埋香岸) 또는 매향맹방정(埋香孟芳汀)이라고 한다.

맹방한재를 경계로 삼척시내 남쪽에 자리하고 있다. 삼척시내에서 옛 7번 국도를 따라 남쪽으로 향하면 한재를 만난다. 한재의 정상에 올라서면 발아래 절벽으로 바다가 까마득하게 보인다. 그곳이 바로 원수대(元帥臺)이다. 한재정상에서 내려다보는 바다 경관은 옛날부터 절경으로 꼽혔다. 바람이 불어 파도가 많은 날에는 해안선을 따라 평행선으로 달려오는 파도 모습이 백사장을 따라 줄지어 있는 해송과 어울려 한 폭의 그림을 만들어 낸다. 바로 이 긴 백사장의 끝에 자리하고 있는 산봉우리가 덕봉산(德峰山)[54m]으로, 매향을 한 곳이다.

맹방에는 매향방구택(埋香坊舊宅)이 있었다. 이곳은 삼척현위 조신주(趙臣柱)가 맹방덕봉산 부근에 매향한 후에 인간 세계를 구원한다는 용화회주(龍華會主), 즉 미륵을 기다린 곳이다. 그런데 매향방구택에는 나중에 삼척남양홍씨의 종택이 들어섰다. 남양홍씨삼척 입향조인 홍준(洪濬)이 고려 말 정국의 혼란을 피해 1388년(우왕 14)에 맹방으로 이주하여 이곳에 살았다.

현재 매향방고택 터에는 교수당(敎授堂)이 자리하고 있다. 1970년대 초반에 남양홍씨가 대대로 살아 온 고택(古宅)과 후손들이 지은 해운정(海雲亭)은 없어지고 남양홍씨삼척 입향조 홍준을 기리기 위한 건물 교수당이 자리하고 있다. 건물 이름은 홍준이 춘주(春州)의 유학교수(儒學敎授)를 지낸 것에서 유래한다.

교수당맹방의 넓은 들판 한가운데에 자리하고 있으면서도 소나무와 대나무 숲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산을 등지고 숲속에 있는 듯한 느낌이다. 집 앞에는 초당동굴에서 흘러나온 맑은 물이 모여들어 만든 소한천(昭漢川)이 흐르고, 너머에는 태백산맥에서 뻗어 내린 산줄기가 동해바다로 가다가 멈추어서 만든 거북 모양의 귀산(龜山)이 자리하고 있어 집터의 기운을 더하고 있다. 교수당 누각 위에 오르면 바다에서 올라오는 해무 속에 아련히 펼쳐진 전경이 용화회주인 미륵을 기다릴 만한 곳임을 알 수 있다. 특히 최근 당시에 매향한 향나무가 침향이 되어 발견됨으로써 미륵이 침향을 흠향하기 위하여 금방이라도 내려올 듯하다.

[민중을 닮은 삼척의 미륵불]

조선시대 민중에게 미륵은 그들을 고통으로부터 해방시켜 줄 수 있는 구원자였다. 미륵은 민중이 의지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존재였기 때문에 민중이 살고 있는 마을로 내려왔다. 부처를 찾아서 절에 가기보다는 마을 가까이에 있는 돌이나 석인상(石人像)을 미륵으로 모시고 소망을 빌었다. 그래서 조선시대 미륵은 절보다 마을의 민중 속에 있으면서 마을 미륵이 되었다. 결국 마을 미륵은 우리의 오랜 민속신앙인 성황당 장승과 함께 민중 신앙의 중심이 되었다.

삼척시 남양동에 있는 3기의 미륵은 우리나라 미륵상을 대표한다. 대체로 마을 미륵은 단순하고 투박하며 파격의 형상을 하고 있어서 친근감을 준다. 민중은 꾸미지 않은 순박한 민중 자신의 모습으로 미륵상을 만들었다. 삼척의 미륵상은 우리나라 마을 미륵의 특성을 갖추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정제미와 소박한 맛을 더해서 우리나라 마을 미륵의 대표 주자가 되었다. 국립민속박물관 앞뜰에는 삼척 미륵상의 복제품이 우리나라 미륵신앙을 상징하는 조형물로 전시되어 있다.

삼척시내 봉황산 기슭에 있는 3기의 미륵은 조선 후기 때 삼척부사에 의해 불상이 아니라 살기(殺氣)를 누르기 위한 석인상으로 만들어졌다. 미륵이 만들어진 내력은 김종언이 쓴 삼척군지 『척주지』에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삼척시내에는 3개의 산이 있다. 삼척의 진산(鎭山)으로 북쪽에 갈야산이 있고, 삼척의 안산으로 남쪽에 남산이 있다. 그리고 시내 한가운데에 봉황산이 있다. 봉황산은 동쪽에 있는 광진산(廣津山)[137m]에서 지맥이 남쪽으로 내려오다가 높게 솟은 산이다. 모양이 코끼리 같다고 하여 코끼리산이라고도 부른다. 그런데 봉황산은 그 석벽이 험하고 기이하여 호악(虎岳)이라고도 불렸다. 봉황산의 동쪽은 낭떠러지로 되어 있어 벼락바위라고 부르기도 한다. 서쪽 또한 낭떠러지로 되어 있다. 산의 북쪽에는 삼척시내를 휘감고 돌아가던 오십천이 만들어 낸 크고 깊은 소(沼)가 있었다. 이 소를 봉황담이라고 한다. 봉황산의 한 자락이 이 소로 들어가고 있어서 멀리서 보면 코끼리가 코를 뻗어서 이 소의 물을 먹는 형상을 하고 있다.

삼척부사 이규헌(李奎憲)이 1835년(헌종 원년)에 석벽이 험하고 기이하여 호악인 봉황산의 살기를 억누르기 위해 3기의 석인상을 산꼭대기에 만들어 세웠다. 이후 1857년에 읍인(邑人)들이 지금의 위치로 옮겨서 읍(邑)의 살기를 진압하고 마을의 안전을 가져오고자 하였다. 그래서 지금도 석인들이 모두 봉황산을 바라보고 앉아 있다.

삼척 민중들은 삼척부사가 살기를 진압하기 위해 만든 석인상을 미륵으로 모시기 시작하였다. 처음 삼척부사가 만든 의도와 달리 석인은 백성들에게 희망을 주는 마을 미륵으로 재탄생된 것이다. 이곳 지명도 미륵바위가 되었다. 특히 이곳은 1962년 남산 절단 공사로 오십천의 수로가 변경되기 전까지 삼척시내를 휘감아 돌던 오십천이 만들어 낸 사대광장이 있던 곳이다. 사대광장은 삼척의 민속놀이인 기줄다리기 등이 행해지던 민중의 광장이었기 때문에 미륵바위는 더욱 민중 가까이에 있었다.

[미륵은 민중을 지키고 민중은 미륵을 지키고]

삼척의 미륵불에게 두 번의 위기가 있었다. 첫 번째 위기는 한국전쟁 중에 일어났다. 『삼척시지(三陟市誌)』에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전쟁터에서 싸우다 다친 병사들이 이곳으로 피란을 왔다. 그런데 이들은 너무 지루해서 흥미 있는 일을 찾다가 한 사람이 “이 미륵을 강에 집어넣으면 어떨까?”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병사들은 장남 삼아 여러 명이 달려들어 미륵을 강물 속에다 집어넣었다. 그때 맑은 하늘에서 번개와 천둥이 쳐서 병사들은 놀라 모두 도망가고 말았다.

미륵이 강물에 빠진 후부터 한 방울의 비도 오지 않았다. 강물이 마르고 곡식들은 여물기도 전에 말라죽었고, 동물들도 물을 못 먹어서 죽어 가고 있었다. 아무리 샘을 찾아 다녀도 샘은 보이지 않았으며, 먼지만 푸석푸석 하늘을 뒤덮었다. 논과 밭은 거북 등처럼 갈라져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촌장의 꿈에 미륵불이 나타나 “이 재앙은 내가 물에 빠졌기 때문에 내가 내린 재앙이다.”라고 말하였다. 촌장은 ”이 재앙을 극복할 방법은 없습니까?” 하고 물으니 미륵불은 “행동과 마음이 선한 사람 50명을 뽑아서 나를 건지면 된다”고 하였다. 촌장은 “고맙습니다”라고 말하고 잠에서 깨어났다. 촌장은 이 일을 동네 어른들과 의논하여 행동과 마음이 착한 사람을 구하기 시작하였으며, 50여 명이 다 모아지자 새끼줄을 정성껏 만들어서 모든 사람이 힘을 모아 당겨 미륵불을 건져 올렸다. 순간 번개와 천둥이 치며 비가 쏟아졌다. 촌장은 동네 사람들과 함께 미륵을 다시 코끼리산에 안치시켰다. 이 당시 물에 빠진 미륵을 건지는 데 동원된 분들이 지금도 그 당시의 상황을 증언하고 있어 진실성은 더해지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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