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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이 알려진 민화작가, 이규황과 황승규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700017
한자 -民畵作家,李圭璜-黃昇奎
영어공식명칭 Well Known Folk Painting Artists Lee Kyuhwang and Hwang Suengkyu
이칭/별칭 황노인,이초시 노인
분야 문화·교육/문화·예술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강원도 삼척시
시대 근대
집필자 배재홍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황승규 생가 - 강원도 삼척시 근덕면 동막리 지도보기

[정의]

강원도 삼척시 출신의 민화 작가 이규황황승규의 작품 및 생애.

[개설]

민화는 민중 화가가 민중을 위하여 그린 그림이다. 민화는 예술을 위한 예술이 아니라 삶을 위한 예술로, 일반 민중의 실용 요구에 응해 그려진 소박하고 꾸밈없는 그림이다. 민화는 또 민중의 꿈, 사랑, 믿음을 표현한 그림이다. 민화는 민중의 가슴속에 공유하고 있는 꿈과 희망을 솔직하게 표현한 그림으로, 민중의 삶과 얼과 멋을 느낄 수 있다. 이에 따라서 민화에는 민중에게서 느낄 수 있는 해학과 여유가 넘쳐흐른다. 새로운 창조를 위한 기교를 부리기보다는 몇 번이고 중첩된 화면을 그려 내는 과정에서 능숙하고 넉넉한 사랑이 넘치는 그림을 탄생시켰다.

민화는 작가가 잘 드러나지 않은 그림이다. 민화는 민중을 위해 민중 화가가 그린 그림이기 때문에 작가나 제작 연대가 알려져 있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 민화가 민중에게 상당한 인기를 누리고 있었으면서도 민화 작가가 알려지지 않은 것은 민화의 목적이 생활 속의 필요성을 만족시키기 위한 실용에 의해서이지 개성이나 독창성을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었고, 민화를 그리는 작가에 대한 사회 인식이 그리 높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민화 작가 가운데 이름이 알려진 화가 두 명이 있다. 바로 삼척에서 활동한 연호이규황석강황승규이다.

[그림 같은 황승규의 생애]

황승규(黃昇奎)[1886~1962]의 호는 석강(石岡)이며, 본관은 평해(平海)이다. 그러나 그는 호보다 ‘황노인’이라는 별칭으로 더 알려져 있다. 그의 그림과 글씨를 ‘황노인 그림’, ‘황노인 글씨’라고 불렀다. 황승규는 1886년 11월 5일 아버지 건(湕)과 어머니 김녕김씨 사이의 외동아들로 태어나서 1962년 5월 12일에 향년 76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황승규의 이름은 셋이다. 호적상의 이름은 황응선(黃應先)이다. 평해황씨 족보에는 황기영(黃玘英)으로 되어 있다. 실제 불린 이름은 황승규(黃昇奎)로 알려져 있다. 이는 족보에서 자(字)가 승규(昇奎)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사용한 이름은 황승규이지만 호적상에 응선으로 오른 것은 일제강점기에 있은 창씨개명 때문으로 보이며, 족보에 황기영으로 된 것은 항렬자를 따서 이름을 바꾸어 족보에 등재하였기 때문이다.

황승규는 경상북도 울진군 평해읍 기성에서 태어나 강원도 삼척시 근덕면 동막리로 이주하였다. 그의 아버지 황건(黃湕)은 평해읍 기성면 덕실에서 황대구(黃垈九)의 둘째로 태어났으며, 결혼 후 삼척으로 이주한 것으로 짐작된다. 당시 장자 우위 상속으로 말미암아 선대로부터 별다른 재산을 물려받지 못한 황승규의 아버지 황건은 동해안을 따라 올라와 삼척시 근덕면 동막리에 정착하였다. 이 때문에 황승규의 가세는 한미(寒微)[가난하고 지체가 변변하지 못함]할 수밖에 없었다.

황승규는 기골이 장대한 6척 거구였지만 품성은 인자하고 온순하였다. 남에게 싫은 소리를 할 줄 몰랐으며, 남의 부탁을 받으면 거절을 하지 못하는 성미였다. 어느 날 친구로부터 화투 한 벌만 그려 달라는 부탁을 받고 밤을 새워 화투 한 벌을 정성스레 그려서 이튿날 아침에 친구에게 건네준 이후 동네 화투 제작은 그의 몫이 되었다. 이 때문에 황승규에게는 늘 많은 친구가 함께하였고, 인근의 칭송도 자자하였다.

황승규가 가장 가깝게 지낸 사람은 옥람(玉藍)한일동(韓溢東)[1879~1951]이었다. 한일동은 당시 강원도 근대 서화가를 대표하던 인물이었다. 황승규한일동보다 일곱 살 아래였다. 두 사람은 말술을 마다하지 않을 정도였지만 술에 취하였다 하더라도 한 점 흐트러짐이 없었다. 황승규의 생가에 걸려 있던 ‘石岡’이라는 현판은 바로 한일동의 작품이다. 한일동황승규의 호를 지어 주고 직접 글씨를 써서 보내 준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도난당하여 생가에서 이를 확인할 수가 없다.

황승규는 다재다능하여 ‘칠능(七能)’이라고 불렸다. 시(詩), 서(書), 화(畵), 기(棋), 주(酒), 재담(才談)에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였다. 나이 스무 살 때는 동네 사람들로부터 ‘문장가 어른’, ‘황문장(黃文章) 어른’으로 불릴 정도로 문장력이 뛰어났다. 그리고 기억력이 뛰어나고 배우고자 하는 집념도 대단하여 장기, 바둑은 스스로 익혀서 황승규를 당해 낼 자가 없었다. 황승규의 손재주 또한 뛰어났다. 뒷간에서 용변을 보는 동안 한지를 꼰 지승(紙繩) 씨앗 바구니를 만들어서 나오기도 하였다. 특히 그의 재담은 좌중을 압도하였고, 한 번 시작하면 끝날 줄을 몰랐다. 사랑방에 모여 든 사람들을 상대로 얘기를 시작하여 말문이 터졌다 하면 삼국지 같은 경우 한 달이 걸려도 끝나지 않을 정도였다. 구수하고 재치 있게 끌어가는 말솜씨는 책 속의 주인공과 당시에 함께 산 것 같이 생동감이 있어서 듣는 사람들이 밤새도록 보채고 성화를 대곤 하였다.

[생계를 위해 배운 민화]

황승규가 민화를 처음 배운 사람은 ‘이초시 어른’으로 알려진 연호이규황(李圭璜)[1858~1926]이다. 이규황황승규의 생가가 있는 삼척시 근덕면 동막리의 강 건너편인 근덕면 부남리에 살면서 대대로 민화를 그려 온 집안의 후손이다. 이규황은 아들 이종하(李鍾夏)에게 민화를 전수하였다. 이규황은 1868년생으로 황승규보다 18년 연장자였다. 이규황은 아들 이종하황승규에게 민화를 가르쳤다. 황승규는 그림과 손재주가 뛰어나 그림 공부를 시작한 지 반년도 안 되어 이규황에게서 더 이상 배울 것이 없었다. 이후 황승규는 자신의 손재주를 바탕으로 지혜를 모아 독학을 하였다.

황승규의 재주가 뛰어나고 그림을 잘 그린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주문이 쇄도하였다. 당시에 병풍 수요는 상당히 많은 편이었다. 웬만큼 사는 집에서는 용도가 다양한 병풍을 마련하고자 하였다. 혼수용 병풍인 혼병(婚屛)으로는 부부의 인연을 맺을 때 쓰는 모란 병풍과 신랑·신부의 신방 분위기를 감싸 주던 화조 병풍이 있었다. 제병(祭屛)은 제사나 장례식 때 사용하는 병풍으로, 글씨나 사군자를 색깔 없이 그렸다. 이 밖에 일상병(日常屛)으로 노인방 외풍을 막아 주는 머리 병풍, 아낙네가 화장할 때 가려 주는 가리개 병풍 등이 있었다. 이것들은 감상용이 아니라 장식 위주의 실용 병풍이었다.

황승규는 민화를 그리는 것과 함께 표구를 하여서 병풍으로 만드는 작업도 손수 하였다. 10폭 병풍을 기준으로 종이에 그릴 경우 보름 정도가 걸렸으며, 옥양목에 그리면 한 달 정도가 걸렸다. 당시 병풍 한 틀의 가격이 쌀 서너 가마였음을 고려할 때 민화 작가는 그림을 그려서 겨우 생계를 유지할 정도에 지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황승규는 단청 작업에도 참여하였다. 오대산월정사를 비롯하여 근덕면에 있는 신흥사의 단청 작업을 하기도 하였다. 단청 작업은 고도의 기술을 필요로 하는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목돈을 만질 수 있는 기회였다. 황승규의 작품에서는 유채(油彩)보다 분당채(粉唐彩)가 많이 발견된다. 이는 민화를 그리면서 단청 안료를 많이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황승규는 글씨에도 조예가 깊었다. 해서(楷書), 행서(行書), 초서(草書) 3체를 모두 잘 썼다. 민화에는 흔치 않은 화제(畵題)를 직접 썼다. 그리고 병풍의 뒷면에도 행서나 초서로 글씨를 써 넣었다. 그의 글씨는 가장 가까운 친구로 지낸 옥람한일동의 영향이 많이 받은 것으로 여겨진다.

황승규의 글씨 가운데 눈길을 끄는 것이 있다. 이른바 ‘민서(民書)’라는 것이다. 민서는 민화와 대칭되는 것으로, 회화풍을 띠는 상형 글씨를 말한다. 민서는 인간 본능인 작태(作態), 교태(嬌態), 춘의(春意) 등을 은유하는 듯이 쓴 글씨를 일컫는다. 작희 및 해학 넘치는 관념 세계와 예술 시각에서 형상화된 글씨라 할 수 있다. 익살스럽고 빈정거림에 절로 웃음 짓게 하는 민서는 사대부의 사랑방과 같은 장소에서는 절대 금물이었지만 신혼방의 화조병풍 뒤에는 종종 등장하였다.

[황승규 작품의 선과 색]

황승규 민화의 특징은 선과 색에 있다. 대부분의 선은 두툼하고 힘차다. 그러면서도 온유하고 매끄럽다. 이 때문에 황승규 민화의 형상들은 원만(圓滿)하다. 황승규는 ‘색의 마술사’라고 불릴 정도로 색 구사 능력이 뛰어났다. 적·청·황·흑·백의 색을 사용하면서 색상의 대비, 조화, 균형, 비례가 기막힌 관계를 이루며 색다른 멋을 보여 준다.

황승규의 민화 병풍은 수백 점이 넘을 정도로 많은 작품이 전해지고 있다. 그 수만큼이나 산수도, 화조도, 책가도(冊架圖)[문방구류를 기본으로 하여 방 안에서 쓰는 물건들을 곁들여 그린 그림], 영모도(翎毛圖)[새 또는 짐승 그림], 문자도 등 다양한 그림을 보여 준다. 이 가운데 가장 많은 것이 문자도로, 황승규 민화에서 약 80%를 차지한다. 황승규 문자도의 특징은 정형화된 문자도에 상감한 듯 상징성을 그려 넣은 다음 문자 중심으로 상단이나 하단에 산수, 화조, 책거리 등을 첨가하여 이중 구도를 이루게 하였다. 그리고 반드시 그림에다 시문[畵題]을 적었으며, 강렬한 단청류로 채색을 하였다.

[후손에게 남긴 산수화와 생가]

민화에서 산수화는 정통 회화의 관념산수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지만 좀 더 자유롭고 독창성이 두드러진 면이 있어 이들 그림과 구분된다. 산수민화(山水民畵)로는 주로 소상팔경과 관동팔경을 그렸다. 황승규의 산수민화 가운데 대표작은 손자 황창회가 소장하고 있는 작품이다. 소상팔경을 기본으로 하면서 자신의 모든 정열을 바쳐서 그린 10폭의 관념산수도이다.

황승규가 이 작품을 완성하게 된 의도는 상업 목적이 아니라 후손에게 남기기 위한 것이었다. 옥양목이나 종이에 그린 다른 작품과 달리 비단에다 온갖 정성을 쏟아서 완성하였다. 그리고 병풍 뒷면에도 자신의 글씨로 후손들이 지켜야 할 일들을 유언하듯 써 놨다. 황승규는 병풍 뒷면의 글씨를 다른 사람의 글씨로 받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손자 황창희는 다른 어떤 사람의 글씨보다 조부의 글씨로 써 줄 것을 요청하였고, 황승규는 손자의 청을 받아들여 직접 병풍 뒷면 8폭에 글씨를 썼다.

황승규의 생가는 삼척시 근덕면 동막리에 있다. 7번 국도변에 있는 생가는 황승규가 직접 지은 집이다. 강가의 돌을 가져다가 돌담을 쌓았다. 정면 5칸, 측면 2칸의 규모가 다소 큰 집이다. 그리고 집 주변에는 배나무, 살구나무, 감나무, 호두나무로 울타리 치듯 심었다. 그곳에서 그는 사랑방 문을 연 채 버스에서 내리는 사랑스러운 손자를 기다린 것이었다.

[강원도 영동 민화의 비조, 이규황]

이규황황승규의 스승이자 영동 민화의 비조(鼻祖)이다. 이규황의 행적이 밝혀진 것은 윤열수(尹烈秀)가회박물관 관장의 끈질긴 집념으로 거둔 결실이다. 가회박물관은 민화 전문 박물관이다. 현재 국내에서 민화 작가가 전혀 알려져 있지 않은 상황에서 민화 작가를 찾아 전국을 돌아다니다가 삼척에서 첫 결실을 맺었다. 그것이 석강황승규이다. 윤열수 관장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황승규의 스승인 이규황의 행적을 추적하였다. 이초시로 알려진 황승규의 스승이 이규황임을 밝힘과 동시에 강원도 민화의 계보를 발견한 것이다.

이규황은 신분이 양반이었다. 그는 경상북도 울진에서 살다가 삼척 근덕면 부남으로 이주하여 살았다. 이규황은 영남의 학자들과 교유하면서 학문과 덕을 닦았으며, 초년에는 소과에 응시하기도 하였다. 비록 과거에 급제하지는 못하였지만 삼척에서는 소과에 응시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그의 학문을 인정받기에 충분하였다. 이 때문에 이규황은 이름보다 ‘이초시 노인’으로 더 많이 알려졌다. 1902년(고종 39)에는 특별히 가자(加資)되어 ‘가선대부 중추부사겸오위장’의 품계를 받았다.

그러나 이규황이 어떠한 연유로 민화를 그리게 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이규황에 관한 기록은 후손들에게 전해지는 이야기와 삼척 근덕면 부남 2리 뒷산에 있는 그의 비문이 전부이다. 이규황의 비석은 그의 유언대로 무덤 없이 그가 살던 집 바로 뒷산에 ‘연호호옹유허비’라는 비명으로 쓸쓸하게 남아 있다.

비문에 따르면 그의 이름은 규황이며, 자는 대여이고, 호는 연호이다. 1868년에 태어나 1926년까지 58년이라는 짧지 않은 생애를 통해 많은 걸작의 민화를 남겼다. 특히 그의 책거리문자도는 동해안 민화의 전형을 보여 준다.

연호 이규황의 작품은 대체로 서울, 경기도 일원에서 흔히 보이는 양식으로 보이지만 자세하게 어떤 화풍의 영향을 받아 정형화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이규황의 민화가 동해안 민화의 전형이 된 것은 분명하다. 이규황으로 시작된 동해안 지역 민화의 전통은 제자인 황승규와 아들 이종하가 이어받아 후대로 내려오고 있다. 한편 북쪽으로는 평안도 북청에서부터 남쪽으로는 경북 감포에 이르기까지 같은 양식의 민화들이 발견된다. 동해안의 뱃길을 따라 하나의 화맥을 형성한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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