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에 묘소가 있는 조선 전기의 노비. 김동(金同)은 강녕 부정(江寧副正) 이기(李祺)의 노비라고 기록되어 있을 뿐, 그 밖의 자세한 가계나 내력은 알려져 있지 않다. 이기는 세종의 아들인 영해군(寧海君) 이당(李瑭)의 손자로서 작위를 물려받아 부정이 되었는데, 후에 당파에 붙어 정사를 관여했다 하여 관직을 삭탈당한 채 생애를 마쳤다. 이후 이기는 영조 때 도정...
서울특별시 도봉구 쌍문동에 살았다고 전해지는 효자. 쌍문동(雙門洞)이란 동명의 유래는 몇 가지가 전해지고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효자 계성(鷄聲) 이야기다. 계성은 지금의 도봉구 쌍문 1동 286번지 근처에 살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계성과 그 부인이 병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그러자 그 아들이 생전에 부모를 정성껏 봉양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여 부모의 무덤 앞에 움집을 짓고 여...
조선 전기 현재의 도봉구 지역이 포함된 양주 지역에 살았던 효녀. 김윤금(金閏今)의 가계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중종실록(中宗實錄)』에 양주(楊州)에 살고 있었으며, 그의 아버지가 수호군(守護軍)이었던 김검성(金檢成)이라고만 기록되어 있다. 김검성이 밤에 장막 밖에서 자다가 호랑이에게 잡혀갔다. 이때 20세였던 그의 딸 김윤금이 용기를 내어서 몸을 날려 호랑이...
조선 후기 도봉 지역에 살았던 효자. 도봉구 쌍문동(雙門洞) 지명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전설이 있다. 그 가운데 조선 시대의 효자 남궁지(南宮墀)와 그의 처 하동 정씨(河洞鄭氏), 그리고 그의 아들인 남궁조(南宮鋽)까지 효자문을 받은 데서 유래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남궁조는 승지공파(承旨公派) 23세손으로 자는 성립(聖立)이다. 조봉대부(朝奉大夫) 동몽교관(童蒙敎官)으로...
조선 후기 도봉 지역에 살았던 효자. 도봉구 쌍문동(雙門洞) 지명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전설이 있다. 그 가운데 조선 시대의 효자 남궁지(南宮墀)와 그의 처 하동 정씨(河洞鄭氏), 그리고 그의 아들인 남궁조(南宮鋽)까지 정문을 받은 데서 유래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함열 남궁씨 족보』에 따르면 남궁지는 승지공파(承旨公派) 22세손으로 자(字)는 여구(汝九)이다. 아버지는...
조선 전기 현재의 도봉구 지역이 포함된 양주 지역에 살았던 효자. 신안선(申安善)의 가계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세종실록(世宗實錄)』에 신안선이 양주부(楊州府)에 살고 있었으며, 훈도(訓導)를 지냈다고만 기록되어 있다. 신안선은 다섯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홀로 남은 어머니를 극진한 효성으로 보살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아버지의 무덤에 합장하였으며, 이후로...
조선 후기 도봉 지역에 살았던 효부. 도봉구 쌍문동(雙門洞) 지명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전설이 있다. 그 가운데 조선 시대의 효자 남궁지(南宮墀)와 그의 처 하동정씨(河洞鄭氏), 그리고 그의 아들인 남궁조(南宮鋽)까지 정문을 받은 데서 유래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함열 남궁씨 족보』에 따르면 남궁지의 부인 정씨는 본관이 하동(河東)으로 부정(副正)을 지낸 정노성(鄭老星)의...
조선 전기 현재의 도봉구 지역이 포함된 양주 지역에 살았던 열녀. 박충간(朴忠幹) 처 곽씨(郭氏)는 충청도 면천에 살았던 충순위(忠順衛) 곽순(郭純)의 맏딸로서 박충간과 혼인하였다. 곽씨에게는 여동생이 한 명 있었는데 16세에 구세충(具世忠)에게 시집갔으며, 남편 구세충이 죽자 상을 치를 때 애절히 하였으며 거상이 끝난 후에도 소복을 입고 고기를 먹지 않아 언니와 더불어 열녀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