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90046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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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義貞宮主 |
이칭/별칭 | 궁주 조씨(宮主趙氏)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왕족·호족 |
지역 |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나종현 |
혼인 시기/일시 | 1422년 - 의정궁주 이방원의 후궁으로 간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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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년 시기/일시 | 1454년 - 의정궁주 졸 |
묘소|단소 | 의정궁주 묘 -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산77 |
성격 | 후궁 |
성별 | 여 |
본관 | 한양 |
[정의]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에 묘가 있는 조선 전기의 후궁.
[가계]
본관은 한양(漢陽). 한양 조씨 시조 조지수(趙之壽)는 중국에서 귀화하였으며, 그 아들 조휘(趙暉)는 몽고에 투항한 뒤 쌍성총관(雙城摠管)에 임명되었다. 손자 조돈은 쌍성총관부 수복 작전을 도우면서 고려에 귀화하였다. 조돈의 아들 조인옥(趙仁沃)은 의정궁주(義貞宮主) 조씨의 할아버지로 위화도 회군과 조선 건국에 공을 세워 개국공신 1등에 서훈되었다. 시호는 충정(忠靖)이다. 아버지 조뢰(趙賚)는 경기 감사, 평안도 관찰출척사, 지돈녕부사 등을 역임하였으며, 시호는 절효(節孝)이다. 선조들이 대대로 함경도 지역에 근거하여 살면서 이성계의 가문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조휘의 딸은 도조(度祖) 이춘(李椿)의 둘째 부인이며 조인옥의 형 조인벽(趙仁璧)은 환조(桓祖) 이자춘(李子春)의 사위이므로, 이성계와 인척 관계가 된다.
[활동 사항]
1422년(세종 4) 변계량(卞季良)의 건의로 태상왕 태종의 빈을 뽑기로 하여, 2월 28일 의정궁주 조씨가 간택되었다. 필단(匹段)과 견자(絹子)를 조뢰의 집으로 보냈으나 태종이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 해 5월 10일 태종이 죽자, 조뢰가 혼인식은 올리지 않았더라도 택일까지 하였으니 마땅히 성복(成服)해야 할 것이라 하여, 조씨 또한 입궁하여 여러 빈들과 같이 성복하고 여러 범절을 궁주의 예와 같게 하였다.
9월 25일 의정궁주가 되었는데, 본래 세종은 조씨를 빈에 봉하고자 하였으나 혼인의 예를 이루지 못했으므로 궁주로 삼았다. 1453년(단종 1) 큰오빠 조순생(趙順生)이 계유정난 당시 안평 대군의 일파로 몰려 이듬해 죽임을 당하였다. 궁주 조씨 또한 1454년(단종 2) 세상을 떠났다.
[묘소]
우이 계곡 입구에서 방학 사거리 방향으로 방학로를 따라가면 고개를 넘어서기 전 좌측에 연산군 묘가 위치해 있다. 묘역에는 총 5기의 묘가 있는데, 최상단에 연산군과 거창군부인 신씨의 묘가 쌍분 형태로 조성되어 있고, 최하단에는 연산군의 사위 능양위(綾陽尉) 구문경(具文璟)과 휘순 공주(徽順公主)의 묘가 있다. 그 사이에 단독으로 조성된 묘가 바로 의정궁주 조씨의 묘이다. 묘역이 위치한 땅은 본래 세종의 아들 임영 대군의 땅이었는데, 의정궁주의 제사를 임영 대군이 맡도록 하여 이곳에 궁주를 안장하였다고 한다. 실제 인근에 임영 대군파 오산군 묘역이 조성되어 있기도 하다.
연산군 묘는 본래 강화도 교동에 있었으나, 임영 대군의 외손녀인 거창군부인 신씨의 요청으로 이곳으로 옮겨져 의정궁주의 묘와 함께 위치하게 되었다. 묘소의 봉분에는 네모꼴의 호석을 둘렀으며, 상석·묘표·문인석 등이 배치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