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40147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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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申泰舜 |
영어공식명칭 | Sin Taesun |
분야 | 정치·경제·사회/정치·행정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충청남도 당진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학로 |
[정의]
충청남도 당진 출신의 천도교 간부이자 독립운동가.
[개설]
신태순(申泰舜)[1884~1929]은 충청남도 당진시 당진동 대덕리 토골 853번지에서 출생했다. 어려서 고향에서 한학을 배운 후 일찍이 천도교에 입교하였다. 1904년 김현구, 박용태 등과 함께 천도교 당진 교구를 창설하는 데 공헌하였고,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 이후 고향을 떠나 상경하였다. 이후 당진을 대표하는 종교인이자 독립운동가로 성장한 신태순은 평생을 천도교 활동과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였다.
[가계]
신태순의 본관은 평산(平山)이다. 신석윤의 셋째 아들이다.
[활동 사항]
신태순은 천도교에 입도한 이후, 1919년 3·1운동 당시 손병희와 함께 독립운동에 참가하여 활약하다가 일본 관헌에게 수차례 연행되어 고초를 당하였다. 그 후 1922년 11월에 조직된 '민립 대학 기성회'에 참여하여 민족 교육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천도교 중앙 종리원 서무과 대표 위원, 천도교 청년 동맹 중앙부 대표 등을 역임하는 등 천도교의 중심 인물로 성장하였다. 1927년 12월에는 민족 협동 전선인 신간회 경성 지회 재정부 총무 간사로 선임되어 지회를 이끌었으며, 1929년 1월 30일 신간회 당진 지회를 조직하고 전국을 순회하며 지방 조직 결성에 참여하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 과정에서 수차례에 걸쳐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가혹한 고문을 당했으며, 이른바 요시찰 인물로 지목되어 경찰의 감시를 받다가 1929년 고문 후유증으로 45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신태순의 장례는 당진 최초의 사회장으로 치러졌는데, 독립운동을 함께한 동지, 전국의 천도교인, 당진군민 등 지방 각급 사회단체에서 참가하여 신태순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독립운동에 헌신한 신태순의 공적을 기려 1980년에 대통령 표창을, 1990년에는 건국 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