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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할아버지, 큰부인, 작은부인에 기원하는 안전과 풍요-안섬, 한진, 성구미의 당진 풍어제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401448
한자 -婦人-婦人-祈願-安全-豊饒-漢津成九尾-唐津豐漁祭
분야 생활·민속/민속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충청남도 당진시 송악읍 고대리 안섬포구|송악읍 한진리|송산면 가곡리 성구미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고대영

[정의]

충청남도 당진시의 안섬, 한진, 성구미 지역에서 마을 민속으로 지냈던 풍어제 제의 의식.

[개설]

충청남도 당진 지역은 활발한 어로 활동과 함께 해안 지역의 많은 마을에서 풍어제가 이어져 왔다. 1960년대 들어 어로 환경의 변화와 공단과 산업 단지가 해안가에 들어서면서 대부분의 마을에서 풍어제가 사라졌고, 오늘날에는 안섬한진풍어제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이러한 풍어제는 마을 주민들의 협력과 비용 부담으로 이루어졌고, 풍어제를 통해 단합하고, 생산 활동이 이루어지는 바다에 대한 두려움을 조금이나마 줄일 수 있었다. 특히 당할아버지인 안섬, 큰부인인 한진, 작은부인인 성구미에 대한 인식은 특이하며 연평도 조기잡이와 관련된 임경업 장군 신앙 역시 주목할 만하다.

[당진의 어업과 포구]

충청남도 당진은 서해안의 도시여서 갯벌과 아산만의 풍족한 어족 자원으로 예로부터 바다를 통한 많은 활동들이 있었다. 바다는 교통로이자, 교역로였고, 조기를 비롯한 물물 교환 시대 화폐처럼 사용할 수 있는 풍족한 어족 자원을 제공하였다. 또한 내륙까지 이어진 수운으로 편리한 교통을 자랑했고, 아산만을 중심으로 나름의 경제권을 유지할 정도였다. 한 달에 12번 장이 섰던 기지 시장은 이러한 활발한 경제를 반영하는 증거이다. 당진의 포구에서는 아산만의 풍족한 자원 중에서 숭어, 준치, 삼치 등을 잡고, 갯벌에서의 조개류, 바닷가에서의 염전이나 자염을 통한 소금 생산 등이 이루어졌으며, 먼바다로 조기잡이를 나가 인근 지역에 공급하며 필요한 물자와 교환했다. 조기는 제사상에 반드시 올려야 하는 제물로서 유교 사회였던 조선 시대 무척 중요한 생선 중 하나이다. 이러한 조기를 잡기 위해 북쪽으로는 연평도 인근 지역까지, 남쪽으로는 전라남도 영광의 칠산 앞바다까지 나가서 조기를 잡았다. 한 번 나가서는 1주일 이상 바다에 있어야 하고, 이렇게 잡은 조기는 소금에 절여 내포 지방의 내륙 수운을 통해 각지에 팔려 나갔다. 조기잡이가 지역 경제에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다 보니 서해안 어민들에게 처음으로 조기 잡는 법을 가르쳐 주었을 뿐 아니라 조기잡이를 주관하는 전지전능한 신격으로 신앙된 임경업 장군 신앙 역시 큰 비중을 차지하여 당집 안에 장군당으로 모셔지고 있다. 이렇듯 안섬이나 한진, 성구미 모두 파시가 형성, 활성화된 포구였으나 6·25 전쟁 이후 소멸되었다. 안섬의 경우 1964년 방조제를 쌓으며 섬마을이 연륙되었고, 안섬이나 한진 모두 마을 주변에 크고 작은 산업 단지가 들어서면서 과거의 어촌은 자취를 잃게 되었다. 성구미의 경우 6·25 전쟁 이후 전승력이 크게 약화된 상태에서 중단되었고, 현재 현대 제철이 공장을 확장하면서 성구미 포구 자체가 사라졌다.

[당진의 할아비당, 안섬 풍어제]

당진과 주변 지역에서 안섬은 할아비당[남편], 한진은 큰할미당[본부인], 성구미는 작은할미당[작은부인]으로 인식되고 있는데, 이는 당제가 처음 시작된 마을이 안섬이며, 이후 한진성구미로 분화되었음을 반영하는 산물로 볼 수 있다.

안섬 당집은 마을의 당산에 위치하고 있으며 본당, 장군당, 각시당이라는 3위의 신격을 모신다. 본당신은 바다를 관장하는 용을 상징하고, 장군당은 임경업 장군을, 각시당은 여성인 서낭신을 의미한다. 임경업 장군은 서해안 어민에게 조기 잡는 법을 가르쳐 주었고, 조기잡이를 주관하는 신으로 신앙되었다. 제사에 올리는 조기가 주된 물물 교환의 수단이 되었기에 당진의 어민에게는 신으로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안섬 당제는 동짓달 그믐에 회의를 거쳐 당주의 선출, 제수 비용의 마련, 대제인지 소제인지 등 행사 전반에 대해 논의하며 준비가 시작된다. 소제는 단골무당이 참여하는 작은 제사이며, 격년 혹은 윤년에 벌어지는 대제는 인근 지역의 무당을 초빙하고, 소를 희생으로 준비하는 등 보다 큰 행사이다. 제관들은 용과 연관되는 뱀의 상극인 돼지고기도 먹지 않고, 몸을 삼간다. 과거에는 집집마다 호구를 방문하여 돈이나 쌀을 걷어 행사 비용을 충당하였으나 오늘날에는 충청남도 무형문화재에 지정되면서 충청남도와 당진시의 지원을 받아 개최된다. 당제가 가까워지면 당집 주변을 청소하고 금줄과 황토를 편다. 제수는 흥정하지 않고 구입하며, 소는 가장 중요한 제물 중 하나였다. 제주로 사용할 조라술은 술을 담가 당집에 두는데, 날씨가 아무리 추워도 술이 잘 익는다고 한다. 또한 뱃기나 봉죽기 역시 만들어 행사를 준비한다.

무당과 악사들이 마을로 들어오면 당주 집에서 굿을 하고 하룻밤 잔다. 저녁에 선주들은 자신의 집에 보관되던 뱃기를 당주 집에 모아 두며, 다음 날 당집에 가지고 올라간다.

당제는 본제, 당굿[당맞이], 배고사, 거리굿, 지신밟기의 순으로 진행된다. 당일 오후 당주와 무당, 선주들은 뱃기를 들고 당집으로 향한다. 풍물패가 함께 따라오며 농악을 연주하며 선주들의 뱃기가 배의 크기에 따라 서는데 행진을 하며 배치기 소리를 흥겹게 부른다. 당 입구에 오면 무당이 부정풀이를 하고, 당에 도착하면 뱃기를 당집 추녀에 세워 두고 각 당마다 제물 두 벌씩을 진설한다. 당주가 먼저 재배하고 선주들이 재배하고 무당이 굿을 한 자리 하고 소지를 올린 뒤 저녁을 먹는다. 이어서 하는 당굿은 부정풀이, 본당굿, 대동굿, 어망굿, 지석굿, 하전굿 등 여섯 석의 굿을 한다. 어망굿은 풍어를 빌고 해상 안전을 기원하는 굿인데, 선주들의 소지를 태워 공중으로 띄우며 축원을 한다. 이때 천장에 닿거나 높이 올라갈수록 좋은 의미가 있다고 한다. 소지를 태우는 과정에서 갑자기 당집 문을 열면 올라가던 소지가 떨어지게 되는데, 이 경우 다툼이 일어나기도 한다. 굿이 끝나면 명도를 가리며 선주들의 운수를 빌어 준다. 이튿날 당주는 당굿을 한 제물을 선주들에게 분배한다. 이 음식을 당 맞은 음식이라 하며, 각자 배로 가지고 가서 배고사를 지낸다. 배고사를 지낼 때에는 봉죽기와 뱃기를 앞세우는데, 먼저 도착한 배는 그해 풍어가 든다고 하여 모든 선주들이 뛰며 장관을 연출한다. 배고사 이후에는 불을 붙인 발심지를 바다에 띄우는데, 오후에는 장승제, 용왕제, 거리제 등 거리굿을 행한다. 안섬 당제는 1960년대 이후 포구의 기능이 약화되는 등 전승 환경이 악화되어 대제를 지내지 못하고 소극적으로 행사를 운영하였으나 1993년 지역 문화인들의 노력으로 대제를 복원하였고, 1994년 전국 민속 경연 대회에서 우수상을 수상하고, 2001년 충청남도 무형문화재에 지정되었다. 이후 전수 교육관이 건립되고, 행사비와 전승 활동에 필요한 비용 일부를 충청남도와 당진시에서 지원받고 있다. 하지만 안섬을 두고 좌우 양쪽에 큰 산업 단지가 들어오면서 고립되었고, 전승력 역시 떨어져 몇 년째 정상적인 풍어제를 치르지 못하고 있어 전문가의 자문과 지방 정부의 지원이 필요한 실정이다.

안섬 풍어제의 배치기 소리는 다음과 같다.

어-허 명복을 받았소

어-허 명복을 받았소

서낭님 전에서 명복을 받았소

어-어허이 어-어-어-어-어-어 어-하오

이이야 어여차 닻 들러 메고 연평 바다로 돈 실러 가잔다

어-어허이 어-어-어-어-어-어 어-하오

연평 바다 임 장군님 우리 배불러서 도장원 했구나

어-어허이 어-어-어-어-어-어 어-하오

이 등 저 등 다 제쳐 놓고 가운데 등에서 도장원 했구나

어-어허이 어-어-어-어-어-어 어-하오

섣달그믐 달은 봉죽 오월 망증에 또 다시 밝았다

어-어허이 어-어-어-어-어-어 어-하오

배임자네 아주머니 거동 좀 보소 막걸리 동이를 머리에 이고

엉덩춤 추면서 나온다

어-어허이 어-어-어-어-어-어 어-하오

황금산 만대봉 하니 세코 난지에 풍도가 있구나

어-어허이 어-어-어-어-어-어 어-하오

일 년 열 두 달 정성 정성 속에 우리 마을에 만복이 왔구나

어-어허이 어-어-어-어-어-어 어-하오

[고집스럽게 이어오고 있는 한진리 풍어제]

한진은 당진 제일의 항구이자 해상 교통의 요지였다. 송악읍 최북단이며 어업의 전성기에는 크고 작은 어선 100여 척이 조업하며 아산만과 연평도와 칠산 앞바다까지 조업하러 나갈 정도로 활발하였다. 또한 당진이나 내포 지역에서 평택이나 안산, 인천, 서울 마포 등지로 이동하는 기점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후 1960년대 육상 교통이 발달하며 이어 진행된 간척 사업으로 연안 어업이 쇠퇴하며 과거의 영광은 기억 속에만 남게 되었다. 오늘날에도 과거와 같은 100여 척의 배가 있으나 과거보다 배의 규모가 작아졌으며 아울러 주변 산업 단지 입주와 식당, 숙박 등으로 새롭게 변모하고 있다. 한진 1리의 풍어제는 음력 정월 첫 진일에 시작해 다음 날까지 당제를 지냈다. 과거 한진이 활성화되었을 때에는 제의가 화려하고 규모 역시 컸으나 오늘날에는 당주를 중심으로 간략하게 제를 올린다.

기본적인 준비는 안섬과 같이 섣달그믐에 마을 회의를 거쳐 당제 시행 여부와 규모, 제관, 날짜 등을 결정한다. 과거에는 대동계가 주관했으나 오늘날에는 대동계가 사라지고 어촌계에서 주관한다. 제관과 마을 사람들은 모두 근신하며, 제수 음식은 당주 집에서 준비한다. 당제 전날 마을 사람들은 뱃기를 당주 집에 가져다 둔다. 당제 당일 마을 사람들은 오후 당주의 집에 모여 뱃기를 가지고 행진한다. 행진 순서는 중선배부터 소형배의 순이며, 당제에 기부를 많이 한 사람이 선두에 선다. 행렬은 마을을 한 바퀴 돌고 당산으로 향한다. 당집 앞에서 솔불을 뛰어넘어 당으로 들어온다. 당집 앞에는 수령이 300~400여 년 된 소나무가 있는데 신목으로서 제사를 지내고 마을 사람들이 소중히 여긴다. 당집에는 당기라는 기를 세우는데 특이한 것이 '上' 의 둘째 획이 왼쪽에 있는 것이 특이한데, 이는 고기나 재물 복이 들어와서 쌓이기를 기원하는 뜻이다. 당제는 밀물이 드는 시점에 시작하는데, 당 내부에 제물을 진설하고, 법사가 독경을 한다. 법사는 당제를 모신 이유와 축원을 한다. 축원 독경이 끝나면 당주가 재배하고, 선주들이 재배한다. 다시 법사의 축원 독경이 이어지고 대동 소지와 선주, 마을의 호주별로 소지를 올린다. 다음 날 당주로부터 제물로 썼던 음식, 즉 ‘당 맞은 음식’을 나누어 받아 법사의 길지와 솔가지를 기에 매단다. 마을에 내려온 후 풍물을 치고 배치기 소리를 한다. 해안에 선주들이 늘어서고, 선주들은 신호에 맞추어 뱃기를 가지고 뛰어가는데, 안섬과 마찬가지로 제일 먼저 뱃기를 꽂은 사람이 가장 고기를 많이 잡는다고 한다. 선주들은 당 맞은 음식으로 배고사를 지내고 거리제, 지신밟기를 한다.

한진 풍어제 역시 오늘날 전승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당집은 1920년대 초에 상량보가 있으나 이후 증축하였다. 현재 건물이 매우 낙후되어 있고, 토지 역시 사유지에 건립되어 있는 실정이다. 별도의 지원이 없어 전승이 어려우나 어촌계의 강한 의지로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지자체의 지원과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한 실정이다.

[흔적 없이 사라진 성구미, 성구미 풍어제]

석문면성구미는 당집이 헐리고, 당제 행사도 단절된 지 오래되었고, 심지어 성구미 포구 자체도 현대 제철 공장의 확장에 따라 지도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성구미 당제는 작은할미당으로 매년 섣달 중순에 마을 회의에서 계획과 당주를 정했다. 당주는 부부로 했는데, 목욕 재개를 하고 기도를 한 다음 집에 금줄을 치며 몸을 삼갔다. 당도 매일 청소하였다. 제물은 밤, 대추, 곶감, 사과, 배, 떡, 쇠고기 산적, 명태포, 술, 숭어적 등이었다. 조라술은 담가 당집에 두어 익혔다. 제물은 당주 부부가 준비했고, 물은 공동 우물을 쓰기 때문에 사용하기 며칠 전부터 물을 품어 내고 깨끗이 청소하였으며, 다른 마을 사람들은 사용하지 않았다.

당제는 밤 11시경에 지냈는데, 당주 부부가 당에 제물을 차려 놓고 제사를 지냈는데, 제를 올리고 마지막에 소지 축원을 하였다. 대동 소지를 올리고 개인 소지를 올렸는데 자정이 넘으면 제사가 끝났다. 마을 사람들은 당에 가지 않았고 당산 아래 공터에서 제사가 끝나길 기다렸다가 제물을 함께 음복했다. 1950~1960년대 외부인이 풍수지리상 당집이 있는 것이 좋지 않으므로 헐어야 한다고 했고, 이에 당집을 헐고,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당제 역시 단절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일부의 증언으로는 6·25 전쟁 때 인민군이 당산에 굴을 파고, 당집도 다 부수고, 이무기[구렁이]도 잡아 죽였다 하여 이후에는 당제만 지냈다고도 한다. 당제 과정을 볼 때도 이미 제사가 쇠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이미 전승력이 현격히 약화된 상황에서 외부인의 간섭, 즉 인민군의 파괴, 혹은 외부인의 조언에 당제와 당집을 지켜 내지 못하고 결국 사라지게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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