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4011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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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男女服飾 |
영어공식명칭 | The Clothes of Men and Women |
분야 | 생활·민속/생활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충청남도 당진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강순희 |
[정의]
충청남도 당진시에서 시대와 신분에 따라 의복의 변천 과정을 볼 수 있는 복식 문화.
[개설]
충청남도 당진시의 복식 문화는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시대의 특성에 따라 혹은 신분에 따라 발전과 변천을 거쳐 왔다. 복식 문화의 변천 과정을 개화기와 광복 이후, 1980년대 이후 3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역사 속의 복식 문화]
『후한서(後漢書)』의 동이전 마한 조(東夷傳馬韓條)와 『진서(晋書)』의 사이전 마한 조(四夷傳馬韓條)에 보면 "삼한 중 마한 사람들은 무명을 짜고, 전잠(田蠶)을 하였으며 상투를 틀고, 목걸이와 귀걸이를 하였다."라고 하였으며 "진한 사람들은 긴 머리에 흰옷을 즐겨 입었으며 고깔을 좋아하고 넓은 폭의 곱고 가는 삼배를 잘 짰다."라고 하였다. 마한은 오늘날의 당진 지역을 포함하는 지역이다. 삼국 시대의 복식에 대해 많은 학자들이 고구려, 백제, 신라가 거의 유사하다고 결론 내린다. 이것은 주로 그동안 발굴된 백제의 고분에서 출토된 부장품이나 고구려의 벽화, 그리고 중국의 역사서인 『양서(梁書)』의 열전제이 백제 조(列傳諸夷百濟條)나 『남사(南史)』의 동이 백제 조(東夷百濟條), 그리고 『당서(唐書)』의 동이열전 백제 조(東夷列傳百濟條), 『북사(北史)』의 열전 백제 조(列傳百濟條)」, 그 밖에 『위지(魏志)』의 동이전 마한 조(東夷傳馬韓條)」, 『사기(史記)』, 『후한서(後漢書)』, 『북사(北史)』의 「신구당서(新舊唐書)」, 우리나라 역사서인 『삼국유사』 등에 등장하는 백제권의 복식 문화에 대한 언급을 근거로 하고 있다. 여기서 백제권이 바로 당진 지역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고려 시대의 두루마기는 유학자들은 조주위구라는 중국식 포를 입었고, 농공상인들은 백저포를 입고 속대를 하였으며, 서민은 띠 없는 두루마기를 입었다. 신은 주로 초리(草履)를 신었는데 앞이 낮고 뒤가 높다. 이것은 남녀노소가 같다. 진사와 사원은 혁리를 신었고, 민장과 이인(吏人)은 오혁구리(烏革句履)를 신었다. 통일 신라 때는 신분의 차별 없이 썼던 복두가 고려 시대에 와서는 관모가 되었고, 평민들은 주로 사대문라건을 썼으며 바지 저고리는 삼국 시대와 큰 차이가 없고 백저포는 남녀노소 공용으로 많이 입었다. 특히 백저포는 고려 시대의 유일한 유물로 충청남도 서산시 문수사에서 발굴된 백저의가 동국 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이는 서산 지방이나 당진 지방에서 백저 직물이 당시 활발히 생산되었음을 뜻한다.
조선 시대의 당진 지역 양반들의 옷차림은 권위적이고 여유 있어 보이는 갓이나 도포 차림이었고, 서민들은 주로 담백한 색조나 흰색의 소박한 재료로 만든 옷을 즐겨 입었다. 조선 후기에는 실학사상의 대두와 함께 다양화를 추구하여 보수적·권위적 차림도 여러 모양으로 변화하고 여자 복식도 꽉 끼는 저고리에 풍만한 치마, 크게 빗은 머리 모양 등이 다양하게 등장한다.
서민들은 저고리나 바지가 고작이었으며 비단옷이나 문양이 있는 옷은 입지 않았다. 남자들은 갓 대신 패랭이를 썼다. 감투(坎頭)는 탕건과 비슷하나 턱이 없어 민틋하게 만들었다. 당시의 감투는 말총이 아닌 죽감투였으나 뒷날 가죽 헝겊 등으로 만들어 사용하였고, 신은 미투리, 나막신, 짚신 등을 신었다. 승려의 평복으로 동방이 있고 관모는 송낙(松蘿), 굴갓(屈笠), 고깔, 대삿갓(竹笠) 등이었다. 옷은 잿빛으로 하고 기워서 만든 누더기 옷인 납의(衲衣)를 입었다. 여성들은 저고리에 치마를 입었는데 치마는 양반가의 부인은 왼쪽으로 여미고 서민 계층의 부인은 오른쪽으로 여몄다. 양반들은 출가하여 아기를 낳을 때까지는 다홍치마를 주로 입고 중년이 되면 남색 치마, 노년이 되면 옥색, 회색 계통의 치마를 입었다. 또한 부부가 함께 살아 있으면 아무리 늙었어도 큰일이 있을 때는 남색 치마를 입었고 과부는 평생 흰옷을 입었으며, 노비는 5세 때까지는 별 차이 없이 다홍치마를 허락하였으나, 그 외에는 분홍이나 유록 치마를 입었고, 중년 이후에는 감색이나 고동색을 입었다. 옷감으로는 단(緞), 사(紗), 주(紬)는 주로 양반이 입었고 서민들은 무명을 입었다. 또한 일할 때 치마를 더럽히지 않으려고 행주치마라는 앞치마를 덧입기도 하였다. 치마 안에는 속옷으로 바지를 입었다. 이것은 단속곳, 속속곳 위에 입었는데 바지의 모양은 남자 바지와 비슷하나 밑이 따로 떨어져 있고 허리끈이 달려 있는 것이 많다. 겨울철에는 솜을 넣어 만든 누비바지도 많이 입었다. 봄과 가을에는 겹으로 만들고, 여름에는 항라, 모시, 생노방, 베 등으로 홑으로 만들어 입었다. 이것을 고쟁이라고도 부른다. 고쟁이는 아랫도리만 겹으로 하여 겉치마가 가라앉지 않도록 모양을 내기도 한다. 다리속곳은 제일 안에 입는 속곳이며 속속곳은 바지 안에 입는 속옷으로 단속곳과 비슷하다. 너른바지는 상류층 여자들이 정장을 할 때 밑에 받쳐 입는 옷으로 단속곳 위에 입어 하체를 풍성하게 하였다. 기녀는 삼회장 저고리나 겹치마를 입을 수 없었고, 치마도 오른쪽으로 여며야 했다.
근대 이후의 복식 문화]
1. 개화기 이후의 복식 문화
1894년 갑오개혁 이후 밀려 들어온 서구의 질서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분야에 개화의 바람을 불러일으켜 당진 지역의 복식 문화에도 커다란 변화를 일으켰다. 복식 문화는 정부의 관리나 개화의 새 질서를 지지하는 세력들이 서구적인 복식을 착용하면서부터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개화와 함께 정부 관리들이 입었던 사모에 반령착수(盤領窄袖), 품대들은, 칠립(漆笠), 답호, 사대(絲帶)로 바뀌었고, 1900년 일제의 침략 정책이 노골화되면서부터는 관료들의 복식이 양복으로 바뀌고, 의식을 지낼 때는 이른바 모닝 코트[연미복(燕尾服)]와 실크해트[정장용 서양 모자]를 쓰게 되었으며, 화자(靴子)도 구두로 바뀌었다. 그리고 서인들은 칠립에 두루마기, 도포, 사대 정도로 바뀌면서 상하 귀천의 구별이 점차 없어지게 되었다. 특히 단발령이 내려지면서 일부 수구적인 선비들은 이에 저항하였으나, 많은 사람들이 머리를 깎게 되었으며 일본에 유학을 가는 젊은이들을 비롯해서 국내의 남녀 고등 보통학교와 중학교 남녀 학생들이 양복으로 교복을 만들어 입으면서 서구적 복식은 점차 확대되어 갔다. 그러나 한말 관직에 있었거나 한문이라도 수학한 지방의 완고한 선비와 노년층들은 바지저고리에 조끼 두루마기를 입었고 머리는 상투에 탕건과 망건을 했으며, 아래에는 대님을 매고 버선에 짚신 또는 고무신을 신었다. 개화기 이후 여자는 치마저고리를 개량하여 더욱 짧게 만들어 입고 통치마도 즐겨 입었다. 남자도 속내의가 보급되면서 단속곳, 속속곳류의 안복식도 점차 줄어들게 되었다. 1930~1940년대는 일제의 탄압으로 흰옷을 입지 못하게 하여 지방에 따라서는 면직물이나 명주(明紬)옷을 물들여서 많이 입었고 군이나 면직원, 학교 교원 등은 양복을 착용하게 되었다. 이때의 양복들은 대개 검은색이나 회색이 많았다. 신발은 운동화, 다비[지까다비(地下靴)] 등이 보급되어 짚신이 점차 사라지고 남바위 등 모자도 중절모로 바뀌어 갔다. 논밭이나 바닷가에서 일하는 농부들도 점차 양복을 입게 되었고 한복을 입어도 일하기 간편하게 줄여 입었다. 이렇게 서구화되어 가는 복식 문화 중에서 전통적인 복식을 유지한 것은 관혼상제(冠婚喪祭) 의례 복식뿐이었다. 일본 정부도 이러한 민족 고유의 풍속까지는 바꾸지는 못하였다.
2. 광복 이후의 복식 문화
혼인복이나 상복 등은 8·15 광복까지도 큰 변화가 없었으나 6·25 전쟁 이후 근대화의 물결에 따라 서구식 혼례를 치르게 되면서부터는 의례 복식도 달라져 갔고 상복도 양복에 행전과 휘장을 두르는 정도로 하고 굴건, 요질, 수질 등은 많이 사라져 갔다. 1950년의 6·25 전쟁을 기준으로 우리 사회는 급격히 서구화하여 복식 문화의 변화에도 가속이 붙어 한복은 도시에서 농촌으로, 농촌에서 다시 깊은 산골로, 시간이 지나면서 산골 마을에서도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3. 1980년대 이후의 복식 문화
1983년은 교복이 전면 자율화된 해이다. 그전까지 당진 지역의 학생들과 일반인들은 양장점이나 양복점에서 옷을 맞추어 입는 경우가 많았고, 기성복 매장은 거의 전무한 실정이었다. 교복이 자율화되고 이름 있는 기성복 매장이 생겨나 기성복을 많이 구매하고 맞춤옷은 점차 줄어들었다. 당진 지역의 복식 문화는 1995년 조사에 의하면 86%가 양복을 입고, 양복이나 한복을 곁들여 입는 숫자를 합하면 100%가 되므로, 한복을 항상 입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는 실정이었다. 당진 시민의 옷은 이때 양복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양복들의 옷감은 국내에서 만들기도 했지만 외국에서 수입한 것이 더 많았다. 다양한 기성복이 시장에 범람하여 양복점에서 옷을 맞추어 입는 사람은 드물고 주로 기성복을 사서 입었다. 현재는 화학 섬유류가 범람하여 당진에서 재배된 베나 면직류의 옷감들은 자취를 감추고 새로운 섬유로 만든 양복, 점퍼, 코트, 스포츠 웨어가 일상 상용 복식이 되었다. 전통적인 복식에서 서구식 복식으로 변화된 것은 불과 70년 안팎이며 1894년 갑오개혁을 기준으로 100년이 조금 넘었을 뿐이지만 당진 시민이 입고 있는 양복은 이미 서양의 옷이 아니라 당진 시민의 복식 문화로 자리 잡았다. 다행인 것은 아직 관혼상제나 명절 등 의례시 우리 고유의 복식을 유지하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점이다.
[당진의 특산물 모시]
모시에 대해서는 송나라 사신 서긍(徐兢)이 쓴 『고려도경』에 "고려의 백저(白苧)는 빛깔이 결백하기가 백옥과 같으며, 깔깔하여 몸에 붙지 않고 강도가 높아 질기고 조직에 통풍 공간이 있어 여름철 옷감으로 상하 계급을 막론하고 즐겨 입는다."라고 하였다. 이 모시는 충청남도 한산 지방에서 생산되는 것을 으뜸으로 친다. 한산 지방과 가까운 충청도 문화권인 당진은 고려 시대부터 저직물, 마직물의 본고장 역할을 하였다.
[남이흥 장군의 출토품에서 본 복식 문화]
왕이 입는 옷 중에서 첩리[천익(天翼)이라고도 함]는 문사들도 입고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이후에는 장군들도 입었다. 첩리는 융복으로 입을 경우 활동적이고 소매를 떼어 입는 등 변조도 가능해서 장군들도 선호했다. 그래서 왕이 하사하기도 하였다. 소매를 뗄 수 있게 한 것은 전투에서 유사시 이것을 붕대로 사용했을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첩리는 충청남도 당진군 대호지면 도이리에 있는 충장사의 남유(南瑜) 장군과 남이흥(南以興) 장군의 묘소 출토품에서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