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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화리 새마을운동 이전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400821
한자 三花里-運動
분야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충청남도 당진시 석문면 삼화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변병훈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전개 시기/일시 1972년연표보기 - 삼화리 새마을 가꾸기 기본 사업 실시
전개 시기/일시 1973년 - 삼화리 새마을 가꾸기 기본 사업 및 소득 증대를 위한 사업 추진
전개 시기/일시 1974년 - 삼화리 새마을운동 자조 발전 단계 돌입 및 소득 증대와 연계된 생산 기반 시설 사업에 역점
전개 시기/일시 1975년 - 삼화리 새마을운동 자조 발전의 중간 년도로 주민의 의식 구조 개선과 농가의 소득 증대에 역점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75년 - 삼화리, 새마을운동 우수 마을로 선정되어 대통령 하사금 지급
전개 시기/일시 1976년 - 삼화리 새마을운동 자조 발전의 마지막 해로 기초 사업 환경 사업 마무리 및 소득 사업에 돌입
전개 시기/일시 1977년 - 삼화리 새마을운동 생산 소득 향상을 위한 사업과 생활 환경 개선 중심으로 전환
전개 시기/일시 1979년 - 삼화리 새마을운동 새마을 정신에 입각한 행동 철학 확립 및 근대화 교육 실시
발생|시작 장소 삼화리 새마을운동 - 충청남도 당진시 석문면 삼화리 지도보기
성격 사회 운동

[정의]

충청남도 당진시 석문면 삼화리에서 벌인 새마을운동.

[개설]

새마을운동은 생활 환경의 개선과 소득 증대를 위한 지역 사회 개발 운동으로 1970년대에 시작되었다. 충청남도 당진시 석문면 삼화리에서도 1970년대에 새마을 운동을 활발히 벌였고, 1975년에 새마을운동 우수 마을로 선정되었다.

[역사적 배경]

1970년 4월 22일 전라남도 광주에서 개최된 지방 장관 회의에서 고 박정희 대통령이 "우리 스스로가 우리 마을을 우리 손으로 가꾸어 나간다는 자조 정신과 자립 정신을 불러 일으켜 땀 흘려 일한다면 모든 마을이 머지않아 잘살고, 아담한 마을로 그 모습이 바뀔 것을 확신한다."라고 말하며 이 운동을 "새마을 가꾸기 운동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라고 한 것에 따라 '새마을운동'이 시작되었다. 1970년 10월 5일 전국 읍장, 면장에게 새마을 가꾸기 교육을 실시하고 1971년에 새마을 가꾸기 사업을 시험하기 위하여 마을마다 시멘트를 335대씩 균일하게 무상 지원하고 10개의 예시 사업을 추진하였다.

충청남도 당진시 석문면 삼화리에서는 종교인들이 나서서 새마을운동을 추진하였다. 장로인 한대근이 이장을 맡고 이인화 목사가 새마을 지도자를 겸직하면서 마을 내 주막 6개를 모두 철거하고 부녀회에서는 남편들을 모두 교회로 인도하였다. 삼화리 새마을 운동은 교회를 중심으로 한 기독교 공동체를 통한 결집력을 활용하여 새마을운동 이전부터 진행해 왔던 4H(에이치) 운동을 주도한 마을 청년들의 적극적인 추진력에 의해 진행되었다. 야간 횃불 작업으로 가꾸기 사업들을 추진하여 1973년에 전국 최우수 마을로 자립 마을이 되었으며, 광주 대회에서 한대근 이장이 새마을 훈장 근면장을 수상하였다. 1975년 2월 5일 청와대에서 고 박정희 대통령에게 '새마을 경제 동향 보고'를 하는 등 당진군의 새마을 운동은 전 국민 운동을 이끌어 가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

[경과]

삼화리 새마을운동은 1972년 새마을 가꾸기 기본 사업을 시작으로 1973년으로 이어지는 새마을 가꾸기 기본 사업 및 소득 증대를 위한 사업이 추진되었다. 우선 삼화 2리의 숙원 사업인 마을과 국도를 연결하는 농로작업을 시작하였다. 삼화 2리는 길이 좁고 굴곡도 많았고 산과 밭에서 흘러나오는 물로 인해 사람이 다니기 힘들 정도로 도로 형편이 나빴다. 새마을운동의 일환으로 시작된 농로 작업에 7,380명의 대규모 인원이 참여하여 착공한 지 90일 만에 너비 6m, 길이 4,500m의 도로가 완성되었다. 다음 작업은 지게나 사람들이 짐을 직접 운반할 수밖에 없는 마을 안길 확장 사업을 실시하였다. 길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군청의 기술 지도를 받아 토관 제작 매설 등 정비 작업을 체계적으로 진행하였으며, 배수 갑문을 겸한 다리를 놓아 조수 피해를 예방하였다.

1974년에는 새마을운동 자조 발전 단계 돌입 및 소득 증대와 연계된 생산 기반 시설 사업에 역점을 두고 시행하여 새마을운동으로 농작물의 수확과 가격도 상승하는 등 주민들의 새마을운동에 대한 기대가 높아지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삼화 2리의 성공 사례로 점차 이웃 마을에도 빠르게 새마을 운동이 확산 전개되었다. 특색 사업으로는 밭농사에 중점을 두어 특작, 잠축, 어농 겸업 등으로 농가를 구분하여 소득 증대 사업을 실행하였으며 농사 방법에서도 재래식 방법을 개선하여 기계를 이용한 영농법을 도입하고, 수익성이 좋은 특수 작물을 재배하고 농작물 가공 공장을 설립하여 농가 부업 소득에 기여, 농가 경영 체제를 새롭게 전환하는 등 외적 환경 개선 운동을 전개하였다.

1975년은 새마을운동 자조 발전의 중간 년도로 주민의 의식 구조 개선과 농가의 소득 증대에 역점을 두는 시기로 주민들에게 새마을 교육, 새마을운동의 철학 등 새마을 정신을 고취시켰으며 소득 증대 사업을 지속적으로 실시하였다. 1975년 2월 5일에 '새마을 경제 동향 보고' 때 고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받은 하사금 300만 원과 마을 기금 150만 원으로 굴 양식장 10만㎡를 조성하여 마을의 장기 소득원을 기대하였고, 고공품[짚이나 풀줄기로 엮어 만든 수공예품, 주력 상품은 가마니] 생산 공장을 신축하여 마을 주민들의 소득 증대 및 생산 기반 시설을 자체 설립하였다. 1975년 삼화리 새마을운동은 새마을운동 우수 마을로 선정되어 대통령 하사금을 지급[당진군이 새마을운동 전국 최우수 군으로 선정]받았다.

1976년에는 새마을운동 자조 발전의 마지막 해로 기초 사업 환경 사업 마무리 및 소득 사업에 돌입하는 시기로 마을이 형성된 이래 최대량인 퇴비 2,500톤을 공동으로 생산하는 협동 작업을 진행, 약 132㎡ 규모의 공동 창고를 건축하여 마을 기금을 늘리고 농산물 저장고로 활용하였다.

1977년은 생산 소득 향상을 위한 사업과 생활 환경 개선 중심으로 전환하는 시기로 마을의 기초 사업 일환으로 생활 환경 개선 병행 사업을 추진하여 새마울 부녀회를 중심으로 개개인의 가정생활 개선과 가정 단위 병행 사업인 변소 개량, 아궁이 개량 등의 사업을 완료하였고 식량 증산, 공동 양식 사업으로 소득 증대에 중점을 두는 한편 농경지, 과수 단지를 조성하는 등 새마을운동을 통한 외적 기반을 형성하였다.

1979년에는 새마을 정신에 입각한 행동 철학 확립 및 근대화 교육을 위해 주민들을 대상으로 농업 지도사 및 농사 기술자들을 초빙하여 근대화된 농사 기술을 습득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하고, 정서 순화 교육, 문맹 퇴치 운동과 같은 계몽 운동도 함께 병행하여 새마을운동의 내적 기반의 틀을 만들었다.

[결과]

새마을운동을 통해 농로 사업, 지붕 개량 사업과 기계화된 영농 방법 개선 등 농촌의 물리적인 환경 개선 사업이 진행됨에 따라 삼화리는 빠른 속도로 근대화에 접근할 수 있었다. 부엌, 하수구, 변소 개량 등 20여 종의 가정 단위 병행 사업을 완료하고 식단 개선, 전기 사용 등과 같은 문화 복지 조건을 갖추어 감에 따라 생활 환경의 불편함을 해소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고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받은 하사금 300만 원과 마을 기금 150만 원으로 마을의 장기 소득원을 조성할 목적으로 굴 양식장을 조성하였으나, 기술 부족과 손이 많이 가고 오랜 시간이 필요한 이유로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하였다. 게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굴 양식장 근처에 방조제가 만들어져, 개펄이 필요한 굴 양식장을 활용한 소득원 사업은 중단되었다. 이렇듯 환경 개선 사업에는 놀라운 성과를 보였지만 주민들의 소득 증대 향상에서는 큰 성과를 내지 못하였다.

[의의와 평가]

삼화리 새마을운동은 물리적이고 외부적인 환경 개선 사업에서는 큰 발전을 가져왔고 전국적으로 추진된 새마을운동의 확산에 영향을 주었다. 하지만 개발에 따른 주민들 개개인의 소득 증대 향상에 대한 성과 기대는 환경 개선 사업 성과에 비해 기대에 미치지 못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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