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400651 |
---|---|
한자 | 慶州金氏 |
영어공식명칭 | Gyeongju Gimsi|Gyeongju Gim Clan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충청남도 당진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남석 |
입향조 생년 시기/일시 | 1589년 - 경주김씨 당진 입향조 김부광 출생 |
---|---|
입향조 몰년 시기/일시 | 1638년 - 경주김씨 당진 입향조 김부광 사망 |
본관 | 경주(慶州) - 경상북도 경주시 |
입향지 | 경주김씨 입향지 - 충청남도 당진시 송악읍 복운리 |
세거|집성지 | 경주김씨 세거지 - 충청남도 당진시 송악읍 복운리 |
묘소|세장지 | 경주김씨 세장지 - 충청남도 당진시 송악읍 복운리 |
성씨 시조 | 김알지(金閼智) |
입향 시조 | 김부광(金孚光) |
[정의]
김알지가 시조이고 김부광이 입향조인 충청남도 당진 지역의 세거 성씨.
[개설]
경주김씨(慶州 金氏)의 기원은 김알지(金閼智)이고, 당진시 송악읍 복운리에 입향한 인물은 김부광(金孚光)[1589~1638]이다. 김부광은 17세기 초기 인물로 이곳에 400년 넘게 집성촌을 형성하며 거주하고 있다. 현재 이들은 많이 거주하지는 않지만, 한때 20여 호가 거주할 정도로 많이 살았다. 충청남도 당진 지역에서 매우 연원이 깊은 성씨이다.
[연원]
경주김씨(慶州金氏)의 기원은 김알지(金閼智)에서 시작한다. 김알지는 서기 65년(탈해왕 9)에 금성 서쪽 시림(始林)[계림(鷄林)]의 나무 끝에 걸려 있던 금궤에서 태어났다. 탈해왕은 이를 기뻐하여 ‘김(金)’이라는 성을 하사하였는데, 여기서 경주김씨가 시작되었다. 경주김씨는 김알지의 후손 미추(味鄒)가 신라 13대 왕에 등극함으로써 신라의 왕성(王姓)이 되었다.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할 때까지 경주김씨는 신라 56왕 중에서 38왕을 배출하여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성씨를 이룰 수 있었다.
경주김씨는 신라 왕계를 통하여 내려오면서 왕족이 분가하여 다른 본관을 갖는 경우도 있으나 대개는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아들들로부터 세계가 이어 내려오고 있다. 즉, 셋째 아들 김명종(金鳴鍾)과 넷째 아들 김은열(金殷說)의 후손으로 이루어진 경우가 대다수이다. 당진시 송악읍 복운리의 경주김씨는 김알지의 41세손 김인관(金仁琯)의 후손으로 태사공파(太師公派)이다. 태사공파는 다시 전서공파(典書公派), 상촌공파(桑村公派), 우제공파(愚齋公派), 송재공파(松齋公派)로 나뉜다.
주요 인물로는 우선 고려 시대의 김부식(金富軾)[1075~1151]을 들 수 있다. 김부식은 고려 숙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인종 때에는 묘청의 난[1135~1136]을 진압하였고, 우리나라의 현존하는 최고의 사서인 『삼국사기(三國史記)』를 편찬하였다. 『삼국유사(三國遺事)』를 남긴 승려 일연(一然)도 경주김씨 후손이다.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에 빠진 고기(古記)의 기록들을 원형대로 전하는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고대의 신화, 전설, 민속, 사회, 옛날 말 등을 금석문이나 고적(古籍)에서 인용하여 전해 준다. 특히 향가 14수는 다른 문헌에서는 찾을 수 없는 귀중한 것이다.
고려 시대 명문으로서 많은 인물을 배출한 경주김씨는 조선 시대에 들어서도 계속 번창하였다. 조선 말기의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영조 및 정조 시대의 사극에 등장하는 정순 왕후(貞純王后)도 경주김씨 후손들이다. 특히 김정희는 순조 때에 문과에 급제해 암행어사를 거쳐 이조 참판 등을 지냈고 학문에 있어서는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주장하였으며, 역대 명필의 장점을 연구해 독특한 ‘추사체(秋史體)’를 이루어 예서, 행서 등에 전무후무한 경지를 개척하였다.
[입향 경위]
충청남도 당진시 송악읍 복운리에 입향한 인물은 전서공파 16세손 김부광이다. 벼슬은 사직(司直)을 지냈고 증직으로 승지(承旨) 정원 좌승지(政院左承旨)를 받았다. 묘소는 당진시 송악읍 중흥리 2구 한천동(漢泉洞)에 있다.
김부광이 당진 지역에 입향한 것은 아버지와 관련이 깊은 것으로 보인다. 김부광의 아버지 김경신(金敬信)[1565~1625]은 족보에 의병장으로 관직은 감찰(監察)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김경신은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옥천(沃川)에서 의병을 일으켜 700여 명을 이끌고 청주에서 적을 대파하였고, 도주하는 적을 추격하여 금산에 이르렀으나 힘에 부침을 알고 퇴각하였으며 면천으로 낙향하였다고 전한다. 김경신의 묘소는 충청남도 면천군 중흥면 신산동(新山洞)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현재 전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종중에서는 김경신의 아들인 김부광을 낙향조로 모시고 있다.
[현황]
충청남도 당진시 송악읍 복운리 2구 구억말 마을에 세거지를 이루고 있는 경주김씨는 전서공파이다. 원래 경주김씨는 김알지를 시조로 하는데 전서공파는 41세손인 김인관을 중시조로 하여 세계(世系)를 잡고 있다. 전서공파는 김인관의 4세손인 김자정(金子汀)을 파조로 하고 있는데, 김자정이 가선대부(嘉善大夫) 공조 전서(工曹典書)를 지냈기에 붙여진 파명이다.
경주김씨 전서공파는 당진시 송악읍 복운리에 많이 살 때에는 20여 호에 이르기도 하였다. 하지만 인근에 많이 분가하여 충청남도 공주시나 충청남도 아산시 인주면, 혹은 당진시 신평면 매산리에도 10여 호가 거주하고 있다. 현재 복운리에는 10여 호가 남아 있다.
[관련 유적]
경주김씨 효열비(慶州金氏孝烈碑)는 당진시 대호지면 적서리 뱃말 마을에 있는 비석이다. 경주김씨는 대호지면 적서리에 거주하던 차숙보(車淑輔)의 며느리로, 남편이 죽은 뒤에도 시부모를 지극한 정성으로 봉양하였다. 남편을 대신하여 인천을 왕래하다가 해난 사고로 사망하였다. 대호지면 적서리 진흥회에서 1942년 경주김씨의 효성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