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4006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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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慶州李氏 |
영어공식명칭 | Gyeongju Yisi|Gyeongju Yi Clan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충청남도 당진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남석 |
본관 | 경주(慶州) - 경상북도 경주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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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향지 | 경주이씨 당진 입향지 - 충청남도 당진시 송악읍 복운리 2구 구두멀 마을 |
세거|집성지 | 경주이씨 당진 세거지 - 충청남도 당진시 송악읍 복운리 2구 구두멀 마을 |
묘소|세장지 | 경주이씨 당진 세장지 - 충청남도 당진시 송악읍 복운리 2구 구두멀 마을 |
성씨 시조 | 알평(謁平) |
입향 시조 | 이협(李浹) |
[정의]
알평이 시조이고 이협이 입향조인 충청남도 당진 지역의 세거 성씨.
[개설]
경주이씨(慶州李氏)의 시조는 신라 6촌의 알평(謁平)이고, 중시조는 이거명(李居明)이다. 충청남도 당진시 송악읍 복운리에 세거지를 형성한 경주이씨는 석탄공파(石灘公派)이며, 입향조는 이협(李浹)이다. 입향 시기는 대략 17세기 중엽인 1650년대로 추정된다.
[연원]
시조는 초기 신라의 6촌중 알천양산촌(閼川楊山村)[급량부(及梁部)]의 촌장으로 전해지는 표암공(瓢巖公) 알평이다. 알평은 6촌장과 더불어 처음으로 화백 회의를 주재하였으며, 박혁거세를 왕으로 추대하여 신라 건국의 공을 세웠다. 알평은 유리왕 때 이씨(李氏) 성을 받았고 법흥왕 때 충헌공이란 시호를 받았다. 또한 무열왕 3년에는 은열왕(恩烈王)에 추봉되었다. ‘표암공’이라는 호칭은 알평이 경주 박바위에 강림했다는 전설에서 유래한다.
경주이씨의 실질적인 시조라고 할 수 있는 중시조는 소판공(蘇判公) 이거명이다. 이씨의 세계는 고려 말 이거명의 16세손에서 크게 8파로 나뉘고 다시 아래로 내려오면서 크고 작은 70여 파로 분파된다. 8대파는 성암공파(誠菴公派)·이암공파(怡庵公派)·익재공파(益齋公派)·호군공파(護軍公派)·국당공파(菊堂公派)·부정공파(副正公派)·상서공파(尙書公派)·사인공파(舍人公派) 등이다. 이 밖에 지손(支孫) 계통으로 판전공파(判典公派)·시랑공파(侍郞公派)·석탄공파(石灘公派) 등이 있다.
경주이씨는 고려 말에 크게 세력을 떨쳤고 조선에 들어와서도 문과 급제자 178명, 정승 8명, 대제학 3명을 비롯하여 10여 명의 공신과 많은 학자·명신을 배출하였다. 특히 고려 말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1287~1367]은 당대의 명문장가로 정주학의 기초를 확립하였고 조맹부 서체를 도입, 유행시켰다. 대표적인 저서로 『익재집(益齋集)』·『역옹패설(櫟翁稗說)』 등이 있다.
조선 시대 대표적인 경주이씨 인물로는 상서공파의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1556~1618]이 있다. 이항복은 임진왜란의 전후 수습에 온 힘을 기울였다. 그 외에 효종 때 북벌 계획의 핵심 인물인 이완(李浣)[1602~1674]이 있고, 향약을 통하여 백성을 계몽하는 데 앞장선 이유태(李惟泰)[1607~1684]가 있다.
근대 인물로는 서간도 삼원포에 신흥 무관 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을 양성한 이석영·이회영·이시영 등 6형제가 유명하다. 또한 헤이그 만국 평화 회의에 파견되었고 연해주에 대한 광복군 정부를 세웠던 이상설(李相卨)[1870~1917]이 있다.
[입향 경위]
충청남도 당진시 송악읍 복운리 2구 구두멀 마을에 자리 잡은 경주이씨는 석탄공파(石灘公派)이다. ‘석탄공’은 중시조 이거명의 19세인 이존오(李存吾)[1341-1371]를 지칭한다. 이존오는 고려 말 충혜왕 때 태어나 20세가 되던 1360년(공민왕 9)에 문과에 급제하였고 정몽주·정도전 등 신진 사대부와 교류하였다. 26세에는 우정언(右正言)이 되어 왕의 총애를 받았는데, 신돈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장사 감무(長沙監務)로 좌천되었다. 그 후 공주의 석탄(石灘)으로 풀려나 은거하면서 신돈의 부패함을 안타깝게 생각하다가 30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경주이씨 당진 입향조는 이존오의 10세손인 이협이다. 정확한 입향 경위는 전하지 않지만 선대 인물들의 묘소가 인근 청양과 해미에 있고 이협의 형인 이급(李汲)과 아버지 이정길(李廷吉)도 면천군 손동면 천방리[족보에 기록된 주소로 현재 송악면으로만 추정]에 묘소가 있는 것으로 보아 분가의 형태로 입향한 것으로 추정된다. 입향 시기는 대략 17세기 중엽인 1650년대로 보인다. 이협의 아들인 이준무(李俊茂)는 무과에 급제하였고 사복시 정(司僕寺正)에 올랐으며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를 지냈다.
[현황]
충청남도 당진시 송악읍 복운리의 경주이씨는 입향조 이래 350년 정도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가구 수는 가장 많이 살 때에는 20여 호에 이르렀으나 현재는 13호가 거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