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4005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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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唐津靑年同盟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충청남도 당진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남석 |
[정의]
일제 강점기 충청남도 당진 지역에서 결성된 청년 단체.
[개설]
당진 청년 동맹은 더욱 조직적이면서 강력한 청년 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1928년경 설립되었다. 또한 청년 동맹은 1920년대 당진 지역에서 활동한 여러 청년 단체를 통합하였다. 당진 청년 동맹은 일제의 간섭과 억압이 계속되는 와중에도 당진 지역의 교육 운동, 주민 계몽 운동, 노동자 농민을 위한 각종 쟁의에 참여하는 등 당진 지역 민족 운동의 구심체 역할을 하였다.
[역사적 배경]
1920년대 중반, 민족 운동은 운동 단체마다 이념과 노선의 차이로 다양하게 분화되었고 민족 운동을 효과적으로 펼치지 못하였다. 이에 따라 민족 운동 세력의 통일을 요구하는 여론이 높아져 갔다.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로 분화되어 있던 국내 민족 운동도 민족 단일당 결성이 절실하게 요구되었다. 그 결과 1926년 ‘정우회 선언’을 계기로 각 운동 세력은 파벌 투쟁을 극복하고 통일된 민족 운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이때 설립된 단체가 신간회이고 청년 동맹이었다.
[변천]
당진 청년 동맹 창설 움직임은 1928년 연초부터 시작되었다. 즉 군 단위의 청년 동맹이 실현되지 못함을 유감으로 여긴 군내 각 5개 청년 단체[신합 청년회·합덕 청년회·설성 청년회·틀모시 청년회·범천 청년회]가 1928년 1월, 합덕 청년 회관에서 각 단체 대표 위원회를 개최하였다. 마침 신간회 당진 지회가 1927년 12월에 창설된 직후였다.
당진 청년 동맹은 1928년 1월 28일에 설립되었다. 대회 장소는 당진군의 군청 소재지인 당진 읍내의 당진 회관이다. 대회 준비 위원은 정학원·정형택·정환석·최병국·이충범·이종익·박준일·엄주봉·주윤흥·홍병철·원명희·박창신·이민성 등이다. 이들은 대부분 신간회 당진 지회 회원들이며, 이미 당진 소작 조합 회원으로서 당진의 농민 운동을 지도하고 있었다.
청년 동맹의 활동은 이들이 창립 시에 발표한 3대 강령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첫째, 본 동맹은 전조선 청년 대중의 정치적·경제적·민족적 이익의 획득을 기함. 둘째, 본 동맹은 전조선 청년 대중의 의식적 교양 훈련의 철저를 기함. 셋째, 본 동맹은 전조선 청년 대중의 확고한 조직의 완성을 기함. 이를 위해 당진 지역 각지에서 순회강연과 야학 교육, 농민 운동을 통해 대중 의식을 고양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결과]
당진 청년 동맹을 중심으로 하는 청년 운동은 1930년대 초에 거의 끝난다. 1930년 1월에 발생한 석문 공립 보통학교 만세 사건에 신간회와 당진 청년 동맹 회원들이 관여한 것으로 알려져 중심 인물이 경찰에 구속되었고, 또 청년 동맹의 핵심 운동가인 임종만과 정학원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는 등 계속되는 총독부의 탄압 때문이었다.
[의의와 평가]
당진 청년 동맹은 일제 강점기였던 1928년, 민족 유일당 운동의 결과로 통합된 당진 지역 청년 운동 단체였다. 당진 청년 동맹은 다양한 단체를 통일함으로써 더욱 조직적이고도 강력한 민족 운동을 전개할 수 있었다. 지역 사회의 교육 운동을 전개하였고, 문맹 퇴치, 대중 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순회강연에 나섰으며, 소작 쟁의를 중심으로 농민 운동을 전개하면서 당진 지역 민족 운동의 중심에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