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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400488
한자 金光烈神道碑
영어공식명칭 Memorial Stone for Kim Kwanglyel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유적/비
지역 충청남도 당진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김남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관련 인물 몰년 시기/일시 1545년 - 김광렬 사망
건립 시기/일시 1972년 8월연표보기 - 김광렬 신도비 건립
현 소재지 김광렬 신도비 - 충청남도 당진시 정미면 수당리 산4-1 지도보기
원소재지 김광렬 신도비 - 충청남도 당진시 정미면 수당리 산4-1
성격 신도비
양식 비석
관련 인물 김광렬(金光烈)
재질 화강석 대석 위에 오석 비신
소유자 강릉 김씨 대종회
관리자 강릉 김씨 대종회

[정의]

충청남도 당진시 정미면에 있는 조선 전기 문신 김광렬의 신도비.

[개설]

김광렬(金光烈)[?~1545]은 영돈령 좌원 부원군 윤여필(尹汝弼)의 외손자다. 중종 대에 생원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현감에 오르고 사직서 영(社稷暑令)을 역임하였다. 인종이 경학으로써 익찬(翊贊)에 선발하여 장차 크게 쓰려 하였으나 굳이 사양하고 혼란한 정치를 피해 정미면으로 낙향하였다.

신도비 비문에 따르면, 1534년(명종 원년)에 왕이 궁 밖으로 피신한 일이 있었는데 이때 김광렬은 가솔을 이끌고 올라가 임금이 탄 수레를 호종(護從)하였다. 그때 길에서 도적과 맞닥뜨리자 김광렬은 이들을 꾸짖으며 싸우다 결국 전사하였다. 이때 맏아들 김철명(金哲命)도 아버지와 같이 죽임을 당하였고, 김광렬의 부인 성씨도 비보를 접하고 자결하였다.

성혼(成渾)은 사건이 일단락되자 김광렬의 공적을 명종에게 알렸고, 조정에서는 김광렬의 공적을 기려 가선대부 이조 참판을 증직하였다. 또한 부인 성씨에게도 정부인을 추증하고, 열녀문을 내렸으며, 맏아들 김철명에게도 정려를 내렸다. 김광열의 부인인 성씨, 아들인 김철명, 후손인 효자 김도혁(金道爀) 등 3위를 배향한 ‘충효열문(忠孝烈門)’이 충청남도 천안시 병천면 도원리에 있다.

[건립 경위]

김광렬충청남도 당진시 정미면 신시리에 묘소가 있는 호조 판서를 지낸 김기종(金起宗)의 할아버지이다. 후손들이 1972년 8월 조상의 충효 사상을 기리기 위하여 신도비를 세웠다.

[위치]

김광렬 신도비충청남도 당진시 정미면 수당리 산4-1에 있다.

[형태]

김광렬 신도비는 화강석 기단 위에 오석으로 비신(碑身)[비문을 새긴 비석의 몸체]을 세웠고, 그 위에 지붕돌을 덮었다.

[금석문]

김광렬 신도비에는 ‘증가선대부 을사 명현 강릉 김공 휘 광열 신도비(贈嘉善大夫乙巳名賢江陵金公諱光烈神道碑)’라고 쓰여 있다. 비문은 15대손 김홍래(金洪來)가 글을 짓고, 13대손 김원기(金元起)가 글씨를 썼으며, 두전(頭篆)[비석 몸체의 머리 부분에 돌려 가며 쓴 전자(篆字)]은 김덕기(金德起)가 썼다.

[현황]

충청남도 당진시 정미면 신시리수당리에 거주하는 강릉 김씨 후손들이 관리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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