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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400401
한자 漕倉
영어공식명칭 Taxation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충청남도 당진시
시대 고려/고려 전기,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학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소재지 면천 남창 - 충청남도 당진시 우강면 창리 지도보기
소재지 면천 북창 - 충청남도 당진시 송산면 당산리 지도보기
소재지 당진 북창 - 충청남도 당진시 우두동 지도보기
소재지 당진 해창 - 충청남도 당진시 고대면 당진포리 지도보기
소재지 홍주 북창 - 충청남도 당진시 순성면 중방리 지도보기

[정의]

충청남도 당진 지역에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에 공세미를 보관하고 경창에 운송하기 위해 설치했던 저장 창고.

[개설]

조창(漕倉)은 조운창(漕運倉)의 줄인 말로서, 지방의 각 고을에서 세금으로 징수한 곡식 등 세곡을 도읍지로 운송하기 위하여 해안이나 강변에 설치한 창고이다. 우리나라에 조창이 처음 설치된 것은 고려 시대였다. 10세기 말 지방 제도를 확립하면서 이를 토대로 바닷가 또는 강변에 조창을 설치하고 세곡을 수납했다. 해안에 설치되어 해로를 이용해 세곡을 운송하던 조창은 해운창(海運倉), 강변에 설치되어 수로를 이용하던 조창은 수운창(水運倉) 또는 수참(水站)·강창(江倉)이라고 했다. 국가가 필요한 세금은 곡물을 수납받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는데 세곡을 쉽게 거두기 위해 각 조창에는 수세 관할 구역이 정해져 있었다. 가을에 추수가 끝난 직후부터 수납한 세곡은 조운할 때까지 일정 기간 조창에 보관되었다. 선박의 운항은 풍랑 때문에 시간적 제약을 받았는데, 운항하기 좋은 때는 봄철이었다. 그래서 세곡은 이듬해 2월부터 가까운 곳은 4월까지, 먼 곳은 5월까지 조운을 마치도록 법으로 규정했다. 세곡을 거두고 조창에 보관하고 조운을 통해 경창으로 세곡을 운반하는 과정은 매우 엄격하게 지켜졌는데 이를 제대로 이행하지 못할 경우 효수에 처하는 등 책임자를 엄하게 문책하였다.

[조창의 운영]

조창의 운영은 고려 말기 사회가 혼란해지고, 왜구들의 약탈이 이어지자 운영이 부실해졌다. 왜구의 노략질을 피해 해안의 조창을 내륙으로 옮겨 운영했으나 그 기능은 점차 약해졌다. 그리하여 1376년(우왕 2)에는 조운을 완전히 폐지하기에 이르렀다. 조창의 기능이 부활된 것은 조선의 건국부터였다. 1388년 위화도 회군으로 정권을 장악한 이성계(李成桂)는 국가의 재정 기반을 구축하기 위해 토지 제도를 개혁하고, 조운 제도를 복구하고자 했다. 조선의 조창은 대체로 고려의 것을 복구하면서 시작되었다.

이렇게 조창의 운영은 조선의 국가 재정을 책임지는 역할을 하다가 16세기 후반 이후 사선(私船)으로 세곡을 운반하기 시작하면서 관선(官船) 조운제가 부실해졌고, 이에 따라 조창의 기능도 약화되었다.

17세기에 운영되던 조창은 6개 조창으로써 충청도 지역에는 공세관창의 후신인 공진창과 가흥창, 전라도 지역에서는 성당창·군산창·법성창, 황해도 지역에는 금곡포창의 후신인 금곡창이 명맥을 유지했으나 수세 관할 구역은 줄어들었다. 조선 후기에는 많은 고을이 사선을 세내어 세곡을 운반했기 때문에 조창에서는 사선의 뱃길이 잘 닿지 않는 곳의 세곡을 운반했으나, 조군(漕軍)들이 일을 회피하고 조선(漕船)이 부족하여 조운이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18세기 영조 때 관선 조운을 복구하기 위해 경상도 남해안에 마산창·가산창·삼랑창을 설치하여 운영했지만 성과가 좋지 못했다. 18세기 말 이후 세곡 운송은 경강선 등 사선이 주로 담당했다. 명목상으로는 조창이 존재했으나 실제로는 유명무실했고 조창의 세곡을 운반하는 선박도 조선이 아니라 운송 용역을 청부받던 주교사(舟橋司)의 집주선(執籌船)이었는데, 그 실체는 사선인 경강선(京江船)이었다.

[당진의 조창]

당진 일대는 아산만이 내륙 깊숙히 들어와 있는 가운데 삽교천과 안성천이 만나고 대호만이나 역천을 통해 내륙으로 더 깊숙히 들어올 수 있는 지리적 여건에 따라 일찍부터 조운을 통한 해상 교통이 발달하였다. 당진 조창의 역사는 조선 초기 아산 선장의 당성창이 토사의 퇴적으로 조운선이 들어올 수 없자 범근내포[당진시 우강면]에 면천 남창(沔川南倉)을 설치되면서 시작되었다. 면천 남창은 1478년(성종 9) 아산 공진곶창으로 조창을 옮기면서 없어질 때까지 홍주목, 공주목 관할의 조세를 받아 경창으로 조운하는 대규모의 조창이었다. 이 밖에 당진의 주요 조창으로는 면천 북창(沔川北倉), 당진 북창(唐津北倉), 당진 해창(唐津海倉) 등을 들 수 있다. 당진과 면천은 관할 군현에 부과된 공세미(貢稅米)를 거두어 보관할 조창을 설치하였던 것이고, 이로 인해 조창과 관련된 지명과 유적이 현재까지 남아 있다. 또한 당진에는 다른 군현 관할 아래 있던 조창도 많이 있다. 이것은 당진에 속했던 지역에 월경지가 많아 자연스럽게 조창이 운영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홍주에 속했던 홍주 북창(洪州北倉), 덕산에 속했던 덕산 해창(德山海倉)과 수많은 사창(社倉)을 포함하면 그 수가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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