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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감록』 역모 사건 이전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400388
한자 鄭鑑錄逆謀事件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충청남도 당진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학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단 시기/일시 1785년 - 주형채, 북도원수로 군사 동원 계획 수립
발생|시작 시기/일시 1785년 2월 29일 - 『정감록』 역모 사건 발생
전개 시기/일시 1785년 - 『정감록』 역모 사건, 정조의 친국으로 조사
특기 사항 시기/일시 1785년 - 『정감록』 역모 사건, 기인(奇人) 실체 조사를 위해 지리산 수색
종결 시기/일시 1786년 - 『정감록』 역모 사건 종결
성격 역모 사건
관련 인물/단체 주형채|문양해|이율|구선복|허계

[정의]

조선 후기 1785년에 당진 지역 사람들이 연루된 역모 사건.

[개설]

조선 후기 정조(正祖) 때 발생한 『정감록』 역모 사건(鄭鑑錄逆謀事件)주형채, 문양해, 양형 등 평민이 주축이 되어 좌의정 홍낙순 아들 홍복영, 노론 벽파지만 권력에서 소외된 이율, 훈련도감 구선복 등 양반을 설득하여 자금 지원을 받고 정감록에 따른 새 왕조를 도모한 역모사건이다. 『정감록』 역모 사건 당시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군사를 일으켜 한양을 공격하려 하였는데, 김이용(金履容)의 고변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정감록』 역모 사건은 평민들이 주축이 되어 조선 왕조를 전복하고자 했는데, 당진 지방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연루되었다.

[역사적 배경]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전란을 겪는 동안 조선은 국력이 쇠하고 백성들은 도탄에 빠졌다. 조선 왕조를 부정하는 도참사상(圖讖思想)이 영조 때부터 민간에 유행하기 시작했는데, 대표적인 도참사상이 『정감록(鄭鑑錄)』이다. 『정감록』은 이씨(李氏) 왕이 망하고 정씨(鄭氏) 왕이 나라를 세운다는 역성 사상(易姓思想)이다. 자연스레 『정감록』을 믿고 실천하려는 세력이 출현하였고, 정조가 즉위하고 난 이후 조정의 대신들까지 연루된 정변이 발생하였다.

[경과]

1785년 2월 29일 전 현감 김이용이 고변하여 문양해·이율·양형(梁衡)·홍복영·주형채(朱亨采)·김두공(金斗恭)이 관련된 역모 사건이 알려졌다. 이날 정조는 숙장문(肅章門)에 나아가 김이용과 이율·양형을 직접 심문하였다. 이 사건의 실상은 『정조실록(正祖實錄)』 권 19, 1785년 2월 29일, 3월 8일, 3월 16일 조,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제1577책, 1785년 2월 29일 조, 그리고 「정조 대왕 행장」 등에 잘 드러나 있다. 홍복영에 가담한 중앙 세력은 이율·양형 등이고 주형채, 문양해가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특히 훈련도감 훈련대장 구선복과 조카와 아들인 좌포도대장 구명겸, 우포도대장 구이겸이 연루되었던 것이 밝혀졌고, 충청도에서는 태안(泰安)·은진(恩津)·면천(沔川)·서산(瑞山) 등지에서 군사를 일으키려 하였다. 이 중 조두진(趙斗鎭)·서홍기(徐弘基)·한제만(韓際滿)은 당진(唐津)에 살고, 허계(許啓)는 면천(沔川)에 살았다. 이 사건 당시 당진에 많은 동조자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결과]

주형채, 문양해, 양형 등은 1785년 2월 29일 김이용의 고변으로 말미암아 혁명적인 무귀천의 이상향 건설에 실패하고 죽임을 당하였다. 4월 1일 『정감록』 역모 사건을 마무리 짓는 포상 논의가 본격화되었다.

[의의와 평가]

『정감록』 역모 사건은 민중의 고통을 해소하고 새로운 세상을 열고자 했던 사건으로 평민들이 중심이 되어 추진되었다는 점에서 체제 변혁 운동의 한 유형으로 규정할 수 있다. 『정감록』 역모 사건홍경래의 난과 동학 농민 혁명으로 이어져 신분 해방과 지배 구조 변화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당진 지역에서 동학 농민군의 활동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던 것은 『정감록』 역모 사건과 무관하지 않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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