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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701064
한자 三陟炭鑛地域衣食住
분야 생활·민속/생활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강원도 삼척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도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의식주

[정의]

강원도 삼척시 도계 지역 탄광 근로자들과 이들 가족의 의식주.

[개설]

강원도 삼척시 도계 지역 탄광 근로자와 이들 가족의 의식주를 민속학 관점에서 조사·분석한 내용으로, 탄광 사택이 있는 도계리·전두리·흥전리·상덕리와 사택에 입주하지 못하고 세를 얻어 살던 지역이 대상이다.

조사·분석 내용은 제보자로부터 수집한 구전 자료, 생활 경험담, 사진 자료를 주로 하였다. 제보자는 현재 이 지역에 살고 있거나 과거 광산에서 근무한 근로자 및 광부 가족을 대상으로 하였다.

[의생활]

1. 의복

가. 작업복

본사 직원과 달리 사외 도급업체에 소속된 광부들에게는 작업복이 지급되지 않아서 개별로 작업복을 구입하였지만 1982년부터 작업복이 한 벌씩 지급되었다.

경동탄광도 1980년부터 광부들에게 작업복을 지급하였다. 지급 방법은 탈의장에 작업복 치수에 따라 대·중·소로 구분하여 두면 광부들이 작업장에 들어갈 때 자신의 치수에 맞는 작업복을 골라 입고, 작업이 끝나면 작업복 수집함에 두게 하였다. 이렇게 수거된 작업복은 회사에서 일괄 세탁한 뒤 이튿날 다시 작업장에 들어가는 광부들이 입을 수 있도록 제공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분실하는 사례가 생기고, 다양한 치수의 작업복이 요구되었으며, 경동탄광 근로자들이 철도를 점거하는 등 광부 복지 시책 확대 등 요구가 강력하게 표출됨에 따라 1986년부터 명찰을 달아서 개인 지급 방식으로 바꾸었다. 1년에 작업복 두 벌을 지급한 가운데 작업복과 함께 장화, 마스크 필터, 마스크, 모자, 목 수건[광목 사용]을 지급하였다.

광부들이 깨끗한 옷을 입고 작업을 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하루 전날 작업이 끝나면 세탁소에서 일괄 세탁한 뒤 광부 개인 옷장에 작업복을 넣어 두었다. 이 방식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경동 탄광에 소속된 도급 업체 소속 광부들에게도 몇 년 후 이와 같은 방식으로 작업복을 지급하고 세탁도 해 주고 있다.

이와 같은 광부용 작업복 충당을 위해서는 대한석탄공사가 작업복을 자체 제작하였으며, 1986년 경동탄광도 작업복 공장을 자체로 만들어서 작업복을 보급하였다. 초창기에는 나일론을 사용하여 제작하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땀 흡수가 잘되는 혼방으로 재질을 바꾸었다.

작업복 재질은 대한석탄공사가 공급하는 작업복은 면 성분이 주류임에 비해 경동탄광이 지급하는 작업복은 나일론이 많이 섞여 있는 재질의 천으로 제작해서 보급하고 있다.

작업복에 직원은 이름표, 근로자는 번호표를 각각 붙였다. 개인 옷장에는 이름과 개인 번호를 부착하였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 탄광 지역 여성들은 주로 몸빼를 입고 다녔다. 선탄부 소속 여성들이 경석을 골라내고 돌을 나르는 사진에서 몸빼를 입고 작업하는 모습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나. 외출복

1971년께부터 독일에 광부를 파견하면서 이들에게는 재건복을 지급하였다고 한다. 대한석탄공사도 독일로 광부를 파견할 때쯤 전 직원에게 재건복을 1벌씩 나누어 주었지만 이후에는 지급하지 않았다. 이때 재건복을 양복점에서 맞추어 입은 경우도 있었다. 1970년대에는 이를 국민복이라 하여 박정희 정권 때 공무원, 교사 등이 정부 지침으로 입었다. 광부들 가운데에서도 외출을 하거나 집안 제사를 지내거나 각종 행사에 참석할 때 재건복을 입은 사례가 많았다고 한다.

1980년대에는 재건복이 거의 사라지고, 양복점도 많이 줄었다. 이때는 결혼식 등 주로 집안 행사 때나 명절을 앞두고 고향 갈 때를 대비하여 옷을 맞추었으며, 기성복을 구입하여 입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1990년대 이후에도 기성복을 사 입는 경우가 더욱 늘었다. 이는 임금 상승과 유행을 잘 반영한 기성복이 이들의 취향과 잘 어우러졌기 때문으로 보인다.

양복은 대한석탄공사 간부들이 평소에 입었고, 직원이나 광부 개인으로는 집안 잔치가 있어서 하객으로 갈 때 재건복이나 양복을 입었다고 한다. 그러나 1970년대에는 하객으로 갈 때 점퍼를 입고 가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1980년대 도계 지역에 있던 양복점에서는 수선도 일부 하였다. 그러나 광부들과 양복점의 관련성은 거의 찾을 수 없고, 광부 나름의 패션 규명도 어려웠다. 광부들은 평소에 양복 입을 일이 없었고, 집안 행사가 있을 때는 양복이나 한복을 입었기 때문이다. 광부들의 양복 제작 주기는 개인에 따라 다르지만 대체로 1980년대에는 3~4년에 한 번 정도 맞추어 입었다고 한다.

1960년대나 1970년대 여성들은 교외로 놀러 가거나 특별한 외출을 할 때 주로 한복을 입었다. 1970년대에는 월남 치마가 유행하여 외출 때 월남 치마를 입고 외출하는 여성이 많았다고 한다. 이후 1980년대에 접어들어서는 몸빼, 월남 치마 등에서 벗어나 요즘과 같이 다양한 옷을 구입해서 입게 되었다.

2. 머리 손질

광부들의 머리 손질 일반 형태는 스포츠형보다 조금 길게 한 상고형 머리였다. 이들은 작업장에서 나오면 온몸이 석탄가루로 범벅이 되다시피 해서 매일 목욕을 해야 하기 때문에 머리카락이 길면 머리에 묻은 석탄가루를 쉽게 씻을 수 없었다. 이러한 상고머리 형태는 초기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관리자들 또한 현장에서 일하는 광부들과 비슷하게 머리카락을 짧게 다듬었다. 1980년대 5공화국 때는 주로 스포츠형 머리였다고 한다.

물론 장발 형태도 일부 있었다. 이유는 머리카락이 완충 역할을 하여 안전모를 밀착시키고, 외부 충격을 흡수할 수 있다고 여긴 것이다.

이발은 주로 이발소에서 하였다. 그러나 1960년대까지 광부들에게 이발비를 싸게 받거나 개인 집에서 이발을 해 주는 곳이 있었다. 이때 위생 상태가 불량하여 머리 피부 밑으로 사상균이 침입해 일어나는 피부병인 두부백선[두부백선은 기계충으로 잘못 알려져 있는 기계총이라고도 한다.]으로 고생한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

이발을 하는 횟수는 1960~1970년대에는 한 달에 두 번, 1980년대에는 한 달에 한 번, 1990년대 이후에는 한 달 반에서 두 달에 한 번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예전에는 이발소를 주로 이용하던 광부들도 지금은 미장원에 가서 머리 손질을 하는 예가 많아졌다. 이발소는 고전 형태여서 유행에 뒤떨어진다는 인식 때문으로 보인다. 이런 이유로 유행에 민감한 시대 흐름에 부응하기 위하여 미장원을 주로 이용하게 된 것으로 여겨진다.

3. 기타 장착품

가. 모자

모자는 일반 모자와 안전모로 나눌 수 있다. 이들 모자는 개인이 구입하여 착용하였다. 이 가운데 안전모는 장날이나 철물점에서 구입하였다. 1982년께부터는 회사에서 일반 모자를 지급하였지만 처음에만 주고 닳으면 개인이 구입하였다.

그리고 예전에는 관리직과 광부직의 안전모 색상이 달랐다. 그러다가 1987년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노사협의회를 개최하고 8월 29일 모두 8개 항의 합의 사항을 발표하면서 이 가운데 관리직과 생산직 광부들의 안전모 색상을 같게 한다고 합의한 뒤 색상에 의한 구분은 폐지되었다.

나. 장갑

광산에서 사용하는 장갑을 근로장갑이라 하였다. 근로장갑은 손목에 닿는 부분만 면이고 나머지는 고무로 된 장갑이었다. 1980년대 초반까지는 개인이 장날이나 철물점에서 구입하였다. 기혼자는 세탁해서 사용했기 때문에 7~8켤레를 준비하였고, 미혼인 총각들은 한 번 사용하고 버리는 예가 많았다. 지금은 공판장에서 구입하고, 월별로 일정 수량을 지급하고 있어서 철물점에서 구입하지는 않는다.

다. 양말

양말은 주로 두터운 면양말을 사용한다. 갱도에서 고무장화를 신고 작업을 해야 하기 때문에 합성섬유로 만든 양말은 쉽게 미끄러지는 등 발이 불편해서 면양말을 주로 신는다. 추운 겨울 때는 발을 보온하기 위하여 양말을 두 켤레 겹쳐 신기도 하였다.

라. 신발

광부들은 갱도에서 목이 긴 작업용 고무장화를 신는다. 예전에는 고무장화를 개별로 구입하였기 때문에 신발 가게에서는 1970~1980년대 경기가 좋을 때 광부용 고무장화만 창고에 꽉 차도록 갖다 놓으면 한 달 만에 전부 팔 수 있었다고 한다. 광부용 고무장화는 목이 길고, 굽은 대체로 높고 단단해서 두 달 정도 신을 수 있었다고 한다.

1970년대 중반부터는 회사에서 작업용 장화를 지급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회사에서 지급하는 장화는 앞 부분에 쇠가 덧대어 있어 무거웠다. 이 때문에 광부들은 개별로 신발 가게에서 장화를 구입하여 신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지금은 광부들 대부분이 구내 공판장에서 장화를 구입하고 있어 시내에 있는 신발 가게에서는 한 달에 5~6켤레 팔려 나간다고 한다.

그리고 도계 읍내의 경우 지금처럼 포장되기 이전에는 석탄 가루가 날리고 쌓여서 비라도 내리면 땅이 매우 많이 질퍽거려서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누구나 장화를 신고 다녀야 하였다. 이처럼 장화는 일상 생활에서 친숙하게 접하는 신발이었다. 평상시에도 장화와 단화 중간 형태인 반장화를 많이 신고 다녔다. 반장화는 도계 지역이 본격 포장되기 시작한 1980년 중반까지 많이 신었다. 겨울에는 내피가 있는 반장화를 신었다. 그러나 가정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은 장화 살 돈이 없어서 검정 고무신을 신고 다니는 예도 많았다고 한다.

개인 간 차이는 있었지만 광부들은 1980년대까지 양화점에서 수제작한 구두를 1년에 한 켤레 정도 주문해서 신었다고 한다. 당시 개인이 소유한 자가용이 없는 시절이어서 대부분 걸어 다녀서 신발이 빨리 닳았기 때문이다. 1980년대까지 도계에는 양화점이 12곳 있었다. 이는 당시 많은 광부가 구두를 주문해서 신었음을 알 수 있다.

학생과 어린이는 주로 운동화나 고무신을 신었다. 1980년대 초까지 남학생은 검정 고무신, 여성은 굽이 조금 높은 흰 고무신을 많이 신었다. 청장년층에서는 1960~1970년대에 군화를 신고 다니는 사람도 있었다.

집에서는 나무로 직접 제작한 나막신[게다(외래어표기법에 따른 올바른 표기는 게타)]을 만들어 신은 사람도 많았다. 이들은 광산에서 사용하다 남은 갱목을 가져와서 신발 바닥을 만들고, 발가락이 걸리는 부분은 폐타이어를 잘라서 가로로 건 다음 고정시켜 신었다. 주로 집 안이나 동네에서 신고 다녔다. 현재의 슬리퍼와 같은 형태였다.

마. 기타

광부들은 일반 허리띠에 군용 탄띠 수통용 혁대를 착용하여 수통과 배터리 따위를 걸 수 있는 용도로 활용하였다. 그러나 군용 탄띠는 땀이 많이 차고 빨리 닳아서 1년에 두 개 정도 소요되었다. 지금은 컨베이어벨트의 겉 고무를 탄띠만큼 잘라서 사용한다. 고무 허리띠는 땀도 안 차고 오래 쓸 수 있어서 많이 사용하였으며, 개인이 준비하였다.

목수건은 목과 상의에 석탄가루가 들어가는 것을 막는 한편 땀을 닦기 위해 사용하는 수건이다. 마스크가 보급되지 않았을 때는 먼지가 코로 흡입되는 것을 막기 위한 마스크 대용으로도 사용하였다. 초창기에는 광목을 사용하였다. 장날에 광목을 구입하였으며, 광목으로 목수건을 할 경우 1년에 약 180㎝ 소요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주로 수건을 사용한다. 각종 행사나 모임에서 기념품으로 수건을 많이 나누어 주기 때문에 별도로 구입할 필요가 없이 풍족하게 사용하고 있다.

갱도 내에서의 석탄 분진 흡입을 막기 위해서는 방진 마스크를 착용한다. 예전에 마스크가 없던 때에는 목수건을 사용하였지만 철물점에서 마스크를 판매하면서 방진 마스크를 개별로 구입해서 착용하였다. 그러나 갱도 안에서 마스크를 착용한 채로 작업할 경우 땀이 많이 나고 불편해서 대부분 방진 마스크를 벗고 작업을 하였다. 이 때문에 진폐증·규소폐증 환자가 많이 발생하였다. 1980년대에 와서는 우수한 방진 마스크를 회사에서 공급하는 등 광부들의 보건에 기여하고 있다.

4. 의생활과 관련한 속신(俗信)

작업복 주머니에 안전을 기원하기 위하여 부적을 지니고 다니는 사람들도 있다. 그리고 광부들 신발의 앞부분은 안방 쪽으로 정돈하여 둔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광산에서 작업 후 무사히 집으로 돌아올 것을 기원하기 위한 마음 때문이다. 도시락을 항상 준비하여 가기도 하는데 이때 도시락 보자기는 액운을 물리치기 위하여 주로 청색 보자기를 사용한다.

[식생활]

1. 도계 광산 지역은 석탄을 생산하는 지역이면서 한편으로 식생활 문화에서는 대규모 소비 지역이기도 하다. 도계 광산 지역은 거주 인구에 비하여 생활 공간이 좁지만 각종 주식과 부식 등을 공급하는 시장은 5일장과 함께 전두시장, 도원시장, 흥전시장과 매일 새벽 기차 시간에 맞춰 열리는 번개시장 등 독자 영역을 갖춘 시장이 많이 있어서 각종 식자재가 원활하게 공급될 수 있었다. 이와 함께 이들 시장에서 판매된 식자재는 완행열차인 비둘기호 열차를 이용하여 묵호 지역의 어물, 미로 지역의 신선한 야채 등이 공급되었다. 봉화 지역에서는 쌀, 콩, 고기, 고추 등을 공급하여 탄광 지역 나름으로 음식 문화가 형성·발전될 수 있었다.

2. 경제 사정이 매우 어려운 생활을 하며, 사택이라는 획일화된 주거 공간에서 나름대로 텃밭을 일구어 채소를 심고, 동물성 단백질을 얻기 위하여 가축을 사육하며, 건강 증진을 위한 이곳 나름의 음식문화를 다양하게 발전시켰다.

3. 변화를 보인 첫 번째 계기는 1980년 강원도 정선군 사북읍에서 발생한 동원탄좌 사북광업소 노동자들의 집단 행동으로, 이후 광부들에 대한 임금 인상 등 대우가 좋아졌다. 두 번째 계기는 삼척-도계 간 비포장 도로로 1시간 30분 이상 걸리던 교통 여건이 1986년에 포장된 이후 교통 측면에서 매우 폐쇄돼 있던 이곳 광부들이 쉽게 도계 지역을 벗어나서 여가를 즐기고 물품을 구매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다. 세 번째 계기는 1990년대의 석탄 합리화 사업의 일환으로 광산에 구조 조정이 이루어지고, 대형 유통 센터가 들어서는 등 사회 전반에 걸쳐 풍요로운 물질 시대가 전개되면서 현재까지 이어지게 된다.

4. 식생활 형태를 음식 측면에서 주식·대용식·부식·조미료·보존음식·물[식수(食水)]로 세분화하여 조사한 후 식제(食制)와 각종 세시·기념일 등과 관련한 음식 문화, 각종 조리 도구, 식사 도구로 나누어 조사·분석하였다. 조사 및 분석 결과 다른 지역과 달리 도계 탄광 지역은 나름의 열악한 음식 문화 환경을 극복하면서 도계 지역에서 생산된 나물을 활용한 음식 문화와 함께 광산 근무라는 힘든 일을 하는 광부들을 위한 체력 보강과 진폐증·규소폐증 예방을 위한 음식 문화, 안전을 도모하는 음식 문화, 사육한 동물을 같은 사택에 살고 있는 사람들끼리 나누어 먹기 위한 도리탕 문화 등이 발전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주생활]

1. 주택 공급

광산에서 일하는 광부들을 위한 사택의 필요성은 일제강점기에 인식된 것으로 보인다. 이 지역에는 일제강점기에 탄광을 개발하면서 지은 사택이 지금도 남아 있는 곳이 있다. 석탄 채굴이 노동 인력을 많이 투입하여야 하는 노동 집약형 산업이고, 광산이 위치한 곳이 산간 지역이어서 좁은 지역에 많은 사람이 생활해야 하기 때문에 당연히 주택이 많이 모자라서 주거 안정을 위한 회사 나름의 대책을 세울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부족한 사택 문제 해결을 위하여 1950년 11월 대한석탄공사가 창립된 이후 사택 건설이 있었다. 그러나 날로 늘어 가는 수요를 감당키 어려워 탄광 지대의 산기슭은 곧 판자집으로 뒤덮였다. 그러다가 1965년 이후 채탄이 본격화됨으로써 사택 공급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공급된 사택이 부족함에 따라 가구당 가구 구성원이 많았음에도 사택 부족으로 세를 얻어 사는 광부는 단칸방에 월세 형태로 지내는 불편을 겪어야 하였다. 이러한 주택 부족 문제 해결을 위하여 사택 건립이 본격화된 것은 석유 파동 이후부터였다. 이전에도 사택이 지어지긴 하였지만 일부 광업소에 한해 수십 채를 건립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석유 파동으로 말미암아 석탄 증산이 시급해지자 근로자의 사기 진작 차원에서 1974년 1500가구 규모가 일시에 착공된 것을 시작으로 이후 매년 수백 가구 규모로 건설되었다.

석유 파동 직후의 사택은 주택난 해소에 중점을 두어 블록 연립 형태로 지어지다가 1978년 이후 아파트 형태로 바뀌었다. 최초의 아파트 사택은 1976년 부산의 선원아파트로, 5층짜리 1개 동에 30가구가 입주하였다. 광업소 지역에서는 1978년 장성과 도계에 각각 건립된 화광아파트, 증산아파트가 처음으로 11평형 3층 연립 형태로 지어졌다. 1984년 함백에서 13평형 주공아파트가 건립된 것을 시작으로 직원 사택은 5층 아파트로 정착되었다.

사택에 입주하지 못한 직원에게는 사택보조비가 지급되었다. 사택보조비는 1957년 월 150원에서 시작하여 1964년에는 월 750원이 지급되었지만 1967년 수익자 부담 원칙에 따라 사택료를 징수하면서 사택보조비를 폐지하였다.

그 후 1982년 사택 공급이 무상 대여로 전환되면서 광업소 근무자 가운데 미입주자에게 1986년부터 월 5000원이 사택보조비를 지급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1만 원으로 인상되었다. 그러나 석탄산업합리화 정책 이후 직원 감소로 사택이 충분히 공급되면서 사택보조비는 다시 폐지되었다.

사택 확대 보급책과 함께 대한석탄공사는 직원에게 매월 0.5톤의 무연탄을 연료보조비 명목으로 무상 공급을 하고 있다. 연탄으로 공급되는 연료 보조는 1957년 10월 단체협약이 체결되면서 광업소 지역부터 시행되었다.

당초 연료 보조는 원탄의 경우 무상으로 공급하고 연탄 제조에 필요한 비용은 본인이 부담하는 식이었지만 지급 방법은 여러 차례 바뀌었다.

1962년에 유상 지급으로 일시 전환되었다가 1964년 이후 다시 무상으로 바뀌면서 연탄제조비까지 대한석탄공사에서 부담하였다. 그러나 1968년에 또다시 유상으로 변경되었다가 1973년에는 무상 지급에 제조비는 본인이 부담하는 것으로 변경되었다.

유상과 무상을 오락가락하던 연료 보조는 1977년 이후 무상으로 완전히 정착하였다. 1985년부터는 본사와 사업소 근무 직원에게까지 확산돼 0.5톤에 상응하는 1만 4470원을 매월 지급하기 시작하여 1989년 이후 2만 원으로 정착되었다.

2. 도계 지역 광부들의 주거 환경

사택은 광산 주변에 조성되는 것이 보통이다. 태백산지 일대의 광산 사택 입지는 전반에 걸쳐 높은 고도대를 유지하고 있다. 도계 지역의 경우 도계 읍내에서 가까운 곳에 석탄 광산이 있다. 이에 따라 사택 또한 광산과 가까운 곳이나 광산에 진입하는 입구, 오십천 옆과 오십천 지류 옆, 도로 옆에 위치하고 있다. 도계 전체로는 4~5만 명이 거주할 수 있는 넓은 택지가 없는 곳이어서 완만하게 경사진 곳에도 민가가 들어서 있다. 사택 또한 도계 읍내 각처에 경사가 졌다 하더라도 집을 지을 만한 곳이라면 사택을 지어서 광부들의 주거 환경을 갖추어 나갔다.

즉 광산 취락에서 주요 경관을 이루는 것은 사택이었다. 계곡과 도로를 따라 토지 여유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사택이 조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광산 사택은 똑같은 사택 건설에 기초해서 일률 형태로 축조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것은 광산 경영주가 사택 축조에 드는 비용을 줄이기 위하여 연립형의 장옥사택(長屋社宅)을 택하고 한정된 토지를 효율 활용하기 위한 자연 조건과 관계되는 것이었다. 최근 아파트형 사택이 조성되고 있어 사택 시설도 광산 기능 시설 못지 않게 많이 개선되긴 하였지만 아직도 주 경관은 단층 연립형 사택이다. 그 결과 광산 지대 사택 지구는 건물 배치에서 질서정연한 균질 규칙을 보이는 경관을 나타낸다. 이러한 예는 도계 지역뿐만 아니라 태백 석탄 광산 주변인 고한·사북의 동원탄좌와 삼척탄좌 등 태백산지 탄광 지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경관이다.

사택가에는 광업 사양화로 폐광이 속출하면서 곳곳에 공동화 현상이 나타났다. 그 결과 어떤 사택은 사람이 일부 거주하고 일부는 공가로 방치되고 있는 경우가 흔해졌다. 공가를 처리하지 않고 방기한 사택가에는 밤에 불빛이 보이지 않고 또 허물어져 있어서 유령 마을을 방불케 하기도 한다. 방기된 사택가는 외관도 흉할 뿐만 아니라 청소년들의 불건전한 장소로 이용되고, 주민의 영주 심리를 불안하게 하기도 한다. 이 때문에 공가 처리 문제는 광업 활동으로 야기된 환경 문제와 함께 폐광 지역의 고민거리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사택은 아니지만 대한석탄공사 도계광업소의 도계항 저탄장 입구 밑에 속칭 까막동네가 있다. 이 마을에는 사택에 들어가지 못한 광부들이 방을 빌려서 살던 곳으로, 탄가루가 많이 날려서 까막동네라는 이름으로 불리었다고 한다. 전두리오십천 강변에 있는 일부 지역도 광산에 근무하는 세입자가 많았다고 한다.

까막동네에는 100가구 넘게 거주하였다. 주거 여건은 도계항 저탄장 등지에서 날리는 석탄 가루로 말미암아 매우 좋지 않지만 집값이 싸서 경제 사정이 어려운 사람들이 많이 살았다. 도계광업소에 다닌 사람들이 많았으며, 이곳에서는 방 1칸이 있어도 세를 놓았다고 한다. 세입자들은 월세[1개년 또는 10개월에 일정액을 냄], 달세[1개월에 한 번], 전세 형태로 기거하였지만 대부분이 월세였다.

이 지역에도 석탄 산업 합리화 바람이 불자 광부들이 도계를 떠나면서 셋집은 거의 없어지게 되었다. 즉 1992년까지 괜찮다가 1993년 태정광업소가 문 닫고 나서 도계를 떠난 광부가 많았다. 이에 따라 셋방이 거의 없어져서 자기 집 개념으로 생활하게 되었다. 주로 살고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과거 탄광에 근무한 사람들이다.

사택이나 숙소는 휴식과 재충전 공간이어야 하였지만 탄광촌의 사택이나 숙소는 이 같은 역할을 다하지 못했다고 한다. 사택촌이나 광부들의 숙소에는 문화시설, 체육시설이 없었다. 잠자고 일터에 나가는 사택과 숙소는 이튿날 작업장에서 노동할 수 있는 정도의 충전을 위한 공간이었고, 시간을 통한 규율화를 매개하는 공간이었다. 기업주가 본래 의도했는지 여부를 떠나 사택촌은 24시간 규칙화된 노동으로 운영되는 탄광 노동의 경우 지각·결근 조절 및 방지 등 작업을 위한 공간이었다. 그래도 회사가 제공하는 주거 공간은 턱없이 부족해서 당시에는 모든 사람에게 입주 혜택이 돌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3. 건물 배치

대부분의 광업소는 산간 오지에 위치하고 있다. 주민이 거의 없던 지역에 탄광 개발이 처음 시작되고 많은 근로자가 이주하게 되자 가장 시급한 것이 주택 문제였다. 탄광 개발 회사는 직원 주택 문제 해결을 위하여 사택을 건립해서 제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창립 초기에는 일제강점기 때 건조된 5칸 목조 연립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전쟁을 치르면서 적지 않은 사택이 파손되었지만 경영 여건상 대규모 투자가 불가피한 신규 건립은 엄두도 내지 못해서 훼손된 사택을 보수하여 사용했을 뿐이었다.

대한석탄공사 창립 후 대단위 사택이 건립된 것은 1963년 국제협조처[ICA]의 원조 자금으로 지은 함백사택이 처음이다. 2칸 연립 500가구 규모의 사택 건립은 당시로서 보기 드문 대규모 공사였다. 삼척 도계 지역에도 대한석탄공사 사택이 연차 건립되기 시작하였다.

질서정연한 규칙 형태를 갖춘 거주 공간이 조성된 것으로, 일본인들에 의한 것이 시초이다. 이때 건립된 이 사택은 광복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모두 소실되어 흔적을 찾을 수 없다. 그러나 1950년대 중반으로 접어들어와 광산이 재개되면서 우리 정부의 주관 아래 사택이 건립되었다. 이후 계속해서 사택 증축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광부 사택과 직원 사택은 별도의 지구를 형성하고, 내부 구조에서도 명확한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 여기서 직제 간의 엄격한 차별성을 엿볼 수 있다.

직원 사택은 광부 사택보다 높은 곳에 입지하였으며, 벽체는 블록재를 사용하였고, 지붕은 맞배형이었으며, 주변에는 수령이 오래 된 버드나무가 조성되는 등 운치있는 경관을 보여 주었다. 직원 사택은 단독형과 두 가구가 병렬된 연립형으로 분류되지만 구조는 같은 형태로 되어 있었다. 방 두 칸에 거실과 부엌으로 구성되었으며, 공간 규모도 광부 사택보다 여유로웠다.

이에 비하여 광부 사택은 하나의 동이 4, 5, 6가구가 연립된 세 가지 유형으로 이루어졌다. 광부 사택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구조 변화를 보여 준다. 즉 1950년대 중반부터 1960년대에 건립된 사택 구조는 방과 부엌만으로 이루어진 현대 사회의 최소화된 거주 공간이었다. 이는 경제 안정이 시현될 때까지 시한성을 띤 거주 공간이었기 때문에 지역 특성과는 관계없는 칸 배치였다. 그러나 광업 경기가 활발한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방 두 칸, 부엌, 쪽마루가 있는 구조로 변화되는 등 진일보한 형태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구성 비율에서 전자의 3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방과 부엌만으로 이루어진 두 칸 구조가 보편 형태이었다. 이 같은 결과는 사택을 최소비용으로 축조하려는 광산 당국이 주체가 되고, 광부가 객체가 되는 노동 집약형 광업의 한 실례이다. 그리고 광부사택은 한 지붕 아래 5~6가구를 수용하기 위하여 가옥을 병렬시킴으로써 장옥 형태(長屋 形態)의 고유 경관을 표출시키는 결과가 되었다.

4. 건물 형태

가. 건물의 외부 형태 및 재료

광산촌 사택은 좁은 면적에 대량 입주를 목적으로 지었다. 이에 따라 거주 환경이나 미관을 고려치 않아 연립병렬형으로 늘어선 집들이 마치 병영 막사 같은 느낌을 준다. 또 개광 초기에 지은 사택이 많아서 10년 이상 된 노후 건물이 많고, 상하수도 및 부대시설을 제대로 갖추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2~5가구가 한 동을 이루고 있어 증·개축이 용이하지 않다.

집집마다 막고 있는 벽은 블록을 한 번만 쌓아 올리고 단열 처리도 하지 않아서 방음·방습이 제대로 되지 않아 이웃집에서 두런거리는 말소리가 다 들릴 정도이다.

현대의 일반 주택은 침실, 현관, 거실, 부엌, 식당, 욕실, 화장실, 창고 등이 기능별로 분화되어 생활에 알맞게 사용되고 있는 데 비하여 사택에 거주하는 대다수 광산 노동자는 사택 구조상 그러한 생활 공간 여유가 없는 편이다.

광부 사택은 또 슬레이트와 기와를 사용한 맞배지붕이고, 벽체는 블록이나 목판인 데다 연립 형태를 취하고 있어 직원 사택에 비하면 많은 취약성을 안고 있다. 즉 창고 등 부속시설이 별도로 마련되어 있긴 하지만 공간이 협소해서 활동에 제약이 있음은 물론 벽체에 블록을 한 번만 쌓아 올리고 단열 처리도 하지 않아 방음·방습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 게다가 화재 시 연소 염려가 있는 데다 더욱이 부엌은 구조상 방 크기의 2분에 1 정도이며, 연탄 아궁이도 방문 가까이에 있어서 어린이가 화상을 입을 수 있는 요인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연탄가스 중독 위험도 높다. 가옥 주변에 위치한 공동변소는 외관도 흉할 뿐만 아니라 위생상으로도 좋지 못하다.

최근 증가하고 있는 광부 유출로 사택에 여유가 있어서 사택에 남아 있는 광부들은 협소한 공간의 확대 이용이라는 측면에서 벽체를 헐어 두 가구를 하나의 공간으로 통합하는 것이 보편 형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현지 조사 사례를 구체화하면 다음과 같다.

대부분 사택에는 공간이 좁아서 넓게 쓰기 위하여 가적을 하여 사용하고 있다. 부엌 쪽으로 들어가는 곳에 테라스를 덧대어 활동 공간을 넓히고, 2개 가구의 벽을 터서 1개 가구로 사용하는 예도 많다. 가적을 하기 위한 재료는 주로 목재여서 광업소에 있는 목재를 가져와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1985년에는 사택 구하기가 어려워서 개인이 사택 관리자에게 특별히 부탁해야 빨리 들어올 수 있었다고 한다. 1985년에 입사해 자조사택에서 살 때 낮에 물이 잘 나오지 않아 물탱크를 5개나 두고 밤 12시에 물을 받아 놓고 나서 자야 한 적도 있을 정도로 초기에는 수도 사정이 좋지 않았다.

사택 마당은 텃밭으로 일궈서 고추, 상추, 호박 등을 재배하여 채소 일부를 충당하였다. 마당 한 구석에는 김칫독을 묻어 두었으며, 김치독이 묻힌 곳 위에는 나무로 가구를 짜서 씌우고 문도 만들어 두었다.

일반 사택의 외부는 블록으로 지어서 사택을 짓기 전까지는 나무판을 덧대 마감 처리한 곳이 대부분이었고, 담장도 나무판으로 만들었다.

일제 시대나 1950년대 사택 [6칸 사택, 4칸 사택]의 벽은 대나무 골조 등과 짚으로 골조를 세운 다음 흙벽으로 마감하고 외벽은 시멘트와 모르타르로 마감하였지만 1970년대의 4칸, 6칸 사택은 블록벽으로 벽체를 구성하였다.

나. 건물 내부

사택 구조는 광업소마다 조금씩 차이가 나지만 대개 방과 주거 공간은 대체로 23.3~39.96㎡으로, 가구당 4.6명 기준으로 하면 1인당 점유 공간은 약 5.5~8.7㎡이다. 이것은 전국 평균 주거 공간 9.8㎡에도 크게 못 미친다.

최근에 지은 사택은 방이 두 칸이지만 나머지 사택의 방은 한 칸이다. 방 넓이도 5.5~9.0㎡ 정도여서 장롱, 옷장, TV 등 최소한의 가구와 잡다한 세간들을 갖추면 공간마저 1인당 약 2.0㎡ 더 좁아진다. 가족이 많거나 성장한 자녀를 둔 가정에서는 좁은 방이라도 한 칸 더 있으면 생활하는데 불편이 덜하지만 방 한 칸에 온 가족이 기거해야 하는 경우 가족 간에 겪는 심리 부담은 커지게 된다.

사택의 부엌은 방 크기의 1/2 정도여서 취사 공간 겸 현관, 가사 작업, 세면장 등 여러 용도로 사용된다. 구조상 방문 가까이 연탄 아궁이가 있어서 아이들이 드나들거나 부주의로 인하여 손발에 화상을 입는 경우가 많다. 관내 병원에 10세 이하의 어린이 화상 환자 가운데 65%가 사택에 거주하는 어린이이고, 사택 거주 화상 환자 어린이 가운데 45.9%가 부엌 아궁이에 올려놓은 뜨거운 물이나 연탄불에 화상을 입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사택이 허술하게 지어졌기 때문에 연탄가스 중독 위험성도 짙다.

화장실은 5~10가구가 사용하는 공동화장실이어서 관리가 제대로 안 돼 보건위생상 문제점을 야기하고 있고, 집 밖에 멀리 떨어져 있다 보니 아이들이 집 앞이나 도로변에 용변을 보는 경우가 많다.

상수도의 경우에는 화장실과 같이 몇 가구가 공동으로 사용하고 있는 가운데 겨울철에 물이 잘 나오지 않아 멀리 떨어진 곳까지 가서 물을 길러오는 실정이다. 하수도 시설은 상수도보다 여건이 더 나빠서 음식물찌꺼기나 생활하수가 하천 또는 공동 상수도 근처에 버려짐에 따라 환경이 크게 오염되고 있다.

1985년 이후부터 1990년대까지 사택 내부 개조가 많이 이루어졌다.

지금은 2칸 방을 1칸 방으로 터서 사용하고 있지만 예전에는 방 사이에 미닫이 문이 있었다. 또 예전에는 방마다 부엌쪽으로 벽장이 있었지만 지금은 없앤 집이 많으며, 천장은 얇은 베니어합판에다 도배를 하였다.

부엌에는 처음에 온돌형 연탄 난방 장치가 있었지만 지금은 대부분 연탄 보일러를 사용하고 있다. 연탄 아궁이는 2개로, 토관을 묻어서 각 방으로 열기가 들어가도록 설계되었다.

방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작은 마루가 있었고, 벽장 옆에는 연탄을 쌓아 두는 공간[약 300장 적치]이 있었다. 지금은 부엌 바닥을 돋아서 입식 부엌으로 만들어 예전과 다르다.

부엌 구석에는 작은 찬장을 두었고, 나머지 가재도구는 부엌에 얼기설기 걸어 두었다. 세면은 주로 부엌에서 하였고, 날씨가 좋은 날에는 마당에서 하였다.

연탄 화덕은 가구마다 만들어서 사용하였다. 외부는 회사에 있는 고철을 가져와 자체 제작해서 사용하였다. 여름에는 화덕을 마당에 두고 밥이나 반찬을 하는 등 조리용으로 사용하고, 밤이나 추울 때는 연탄을 빼고 방 아궁이에 넣어서 방을 따뜻하게 데웠다. 겨울에는 방 안에도 연탄 난로를 설치하여 사용하였다. 그러나 연탄가스 사고가 나기도 하여 이의 대책은 개별로 해야만 하였다.

부엌에는 원래 부뚜막이 있었다. 이후 이 지역에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입식 부엌의 편리함을 알게 되어 부엌을 메워 입식으로 개조하기 시작하였다. 주로 1990~1995년에 본인 부담으로 개조하였으며, 개조 비용은 다음 입주자가 비용의 절반 정도를 원 거주자에게 주었다. 방범창도 개인이 설치하였으며, 이사를 나갈 때 후임자에게 돈을 받았다.

광부들이 세를 얻어 살던 까막동네에 있던 집들은 1970년대까지 지붕은 루핑[루핑은 기름종이의 하나로, 이 종이로 지붕을 삼은 집을 루핑집이라고 하였다.], 담은 나무, 문짝은 함석으로 만들었다. 블록은 1980년대에 강변에 가서 만들었으며, 이 블록을 차곡차곡 쌓으면서 겉을 시멘트로 마감하며 집을 지었다. 루핑 지붕을 걷어내고 슬레이트로 지붕을 한 집도 있었다.

사택 가운데 경동사택의 경우 원래 모습에서 손 댄 것이 없는 집을 보면 새시로 된 창틀도 그대로이고, 부엌·화장실 등도 당시의 사택 모습을 잘 보여 준다.

5. 기타

사택이 아파트 형태가 아닌 경우 목욕탕이 없어서 목욕이 매우 어려웠다. 광부들은 일을 마친 후 탈의실 안에 설치된 목욕탕을 이용해서 씻고 오면 되었지만 아이와 부인들이 문제였다. 이 때문에 초기에는 광산 목욕탕을 한 달에 두 번 쉬는 날을 여성용으로 사용하도록 제공하였다고 한다.

1980년 사북에서 발생한 광부 항쟁 이후 목욕탕을 생산 현장[석탄 갱도 입구]에 설치하면서 목욕탕과 옷장을 4등급으로 구분하였다. 즉 임원은 3층, 직원은 2층, 관리자[과장, 부장]와 광산 근로자는 1층에 위치시키고 관리자 목욕탕과 광부 목욕탕는 따로 설치하였다.

도계에 목욕탕이 처음 만들어진 것은 1965년이며, 주로 광부 가족들이 이용하였다. 인구가 많이 줄고 목욕탕 시설이 광산에 다 있어서 아이들과 여자 등 가족들만 주로 이용하였다. 1990년대까지 손님이 많았지만 석탄산업 합리화 사업이 진행되면서 인구가 대폭 감소함에 따라 손님도 많이 줄었다. 특히 사택용으로 아파트가 공급되면서 목욕탕으로 목욕하러 오는 사람이 많이 줄었다고 한다.

대한석탄공사 사택에는 라디오 수신이 잘되지 않아 집집마다 방에 유선으로 스피커를 연결해서 라디오를 틀었으며, 공지 사항이 있으면 이를 통해 알렸다. 소장의 훈시도 이를 통하여 하였다고 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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