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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원리 임야 측량 사건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700291
한자 臨院里林野測量事件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강원도 삼척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이청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14년 11월 11일연표보기 - 임원리 임야 측량 사건 발생
발생|시작 장소 임원리 임야 측량 사건 - 강원도 삼척군 원덕면 임원리 지도보기
성격 항일 운동

[정의]

일제의 통치에 불만을 품은 삼척 지역 주민들의 항일 운동.

[개설]

일제의 통치에 불만을 품은 지역 주민들이 임야를 측량하기 위하여 파견된 총독부 촉탁 혼마 규스케를 집단 구타하여 사망케 한 사건이다.

[역사적 배경]

일제 통치에 대한 반발심과 토지 조사에 이어서 실시된 임야 조사에 대한 불만이 배경으로 작용하였다.

[경과]

1910년 대한제국을 강제 병합한 일제는 곧바로 식민지 정책에 착수하였다. 이를 위한 기초 작업으로 1910년부터 1918년까지 9년에 걸쳐 토지 조사를 실시하고, 곧이어 1918년부터 1924년까지 7년에 걸쳐 임야 조사를 실시하였다. 이런 가운데 임원리 임야 측량 사건이 일어났다.

임원리 임야 측량 사건은 전국에 널리 알려지진 않았지만 삼척 향토사에는 3․1운동 당시 삼척 보통학교의 4․15 만세 운동과 함께 일제 치하에서 전개된 항일 운동의 또 다른 사례로 자랑스럽게 기록되어 있다.

임원리 임야 측량 사건의 내용은 임원리의 임야를 측량하기 위하여 파견된 총독부 촉탁 혼마 규스케[本間九介]가 주민들로부터 몰매를 맞고 사망하자 일본 헌병이 출동하여 무력으로 진압하였고, 관련자 70여 명이 옥고를 치렀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사건이 있은 뒤 원덕면 유림들이 일본 헌병의 만행을 규탄하자 대규모 민중 봉기로 이어질 것을 염려하여 유림 본거지인 원덕면 산양리산양서원을 불태웠다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이에 대하여 의심의 여지없이 그대로 받아들여져 왔지만 실상을 자세히 살펴보면 몇 가지 사실과 다른 점을 알 수 있다.

당초 이 사건은 1913년 4월에 일어난 것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당시 이 사건을 보도한 『매일신보』 기사를 분석해 보면 실제로 사건이 일어난 때는 1914년 11월 11일이었다. 또 사망한 일본인 측량 기사의 이름도 게이조[花藏]가 아니라 혼마 규스케[本間九介]이며, 사건이 임야 조사 실시에 따라 일어난 것으로 이해하고 있으나 정작 임야 조사는 1918년부터 1924년까지 7년에 걸쳐 이루어졌다. 마지막으로 이 사건이 빌미가 되어 산양서원(山陽書院)이 불탔다고 하지만 산양서원이 불탄 것은 이 사건보다 앞선 1913년에 일어난 일이었다.

임원리 임야 측량 사건산양서원의 소실의 인과 관계에 관하여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삼척시립박물관의 역사·문화 이야기난에는 “임원리 임야 측량 사건이 있은 뒤에 원덕면 유림들은 한목소리로 간악한 일본 헌병들의 만행을 맹렬히 규탄하고 비난하였습니다. 이에 당황한 일본 헌병대는 대규모 민중 봉기로 이어질 것을 염려하여 1913년 5월 유림들의 본거지인 원덕면 산양리산양서원을 방화하여 건물은 모두 불에 타 없어지고 묘정비(廟庭碑)만 남게 되었습니다.”라고 되어 있어 서원의 소실이 임야 측량 사건에 따른 일제의 보복과 예방 차원에서 일어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2008년 8월에 세워진 산양서원 연혁에도 ‘1913년 일제 만행(日帝蠻行)으로 서원 방화 소실(書院放火燒失)’이라고 뚜렷이 새겨져 있다.

마지막으로 이 사건의 처리 결과에 대하여 1915년 6월 3일자 『매일신보』는 “강원도 삼척군의 농상공부 고원 혼마 규스케 씨 살해 사건은 원산법원지청으로 함흥지방법원 합의부 공판에 부친 이후 수차례 공판을 열고 심리한 결과 판결을 언도하였는데 그 판결에 불복하는 자 14명은 경성복심법원에 공소하여 경성으로 압송하여 왔다. 당시 원산지청 예심에서 폭동 주모자로 압송된 자는 27명인 가운데 이번 판결에 3명은 무죄 선고를 받고 그 외 24명은 최고 7년 이하 6월까지의 징역에 처하게 된바 그 가운데 14명은 전기와 같이 공소하였고, 나머지 10명은 복역 중이다.”라고 보도하고 있다.

국가기록원에 남아 있는 임원리 임야 측량 사건에 대한 법원 기록인 대정4년 형사공소사건부(大正四年 刑事控訴事件簿)와 수형인 명부(受刑人名簿)를 참고하여 살펴보면 1심 언도는 1915년 5월 15일에 있었고 2심 언도는 대부분 1915년 10월 29일에 있었으나 모두 공소취하[지금은 항소취하로 바뀜]한 것으로 나와 있다.

산양서원 묘정비는 1971년 유림들의 정성으로 비각이 중건되었고, 1998년 4월 18일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123호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서원 본 건물은 아직도 복구되지 못하고 있다.

[결과]

관련자들이 모두 연행되었으며, 원산법원지청으로 넘겨진 뒤 함흥지방법원 합의부 공판에서 유죄 판결로 옥고를 치렀다.

[의의와 평가]

삼척 향토사에는 3․1운동 당시 삼척 보통학교의 4․15 만세 운동과 함께 일제 치하에서 전개된 항일 운동의 또 다른 사례로 자랑스럽게 기록되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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