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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700009
한자 民族歷史家, 李承休
영어공식명칭 Lee Seunghyu, National Historian
이칭/별칭 동안거사,두타산거사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강원도 삼척시
시대 고려/고려 후기
집필자 배재홍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287년(충렬왕 13) - 이승휴『제왕운기』간행
삼척 천은사 이승휴 유허지 - 강원도 삼척시 미로면 동안로 816 지도보기

[정의]

고려 후기 강원도 삼척 지역에서 은거한 문신.

[개설]

강원도 삼척시 미로면 동안로에 있는 천은사동안이승휴『제왕운기』를 편찬한 곳이다. 오랜 벼슬살이에 지친 이승휴는 그의 외가이자 고향인 이곳 삼척 미로에 은거하였다. 그러나 세상을 등진 것은 아니었다. 벼슬살이 때는 조정에서 직접 국왕과 신료들을 상대로 자신의 소신을 펼쳤다면 삼척에 은거하면서부터 상대는 역사로 바뀌었다. 현재가 순간이라면 순간에서 벗어나 역사라고 하는 장구한 영원 속으로 삶의 무대를 바꾼 것이다. 역사를 무대로 하여 그가 토해낸 언어는 바로 『제왕운기』라 할 수 있다.

[이승휴의 생애]

이승휴의 자(字)는 휴휴(休休)이고, 호는 동안거사(動安居士) 또는 두타산거사(頭陀山居士)이다. 경산(京山) 가리현(加利縣) 출신으로, 가리 이씨 시조이다. 그러나 이승휴의 행적은 강원도 삼척 지역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경산 가리현은 지금의 경상북도 성주군으로, 그곳에서는 이승휴의 연고를 찾아볼 수가 없다. 이승휴는 일생의 대부분을 외가인 삼척의 두타산귀동(龜洞)에서 보냈다. 고려시대 당시에는 지금과 같은 친가와 외가 간 차별이 없었다. 이에 따라서 이승휴는 일생의 대부분을 보낸 삼척을 고향으로 하는 삼척 사람이다.

이승휴는 고려의 격동기를 살았다. 이승휴가 살던 시기는 몽고의 침입, 무신정권의 붕괴, 원나라의 간섭 등 고려가 급변하던 때였다. 이승휴는 최씨 무신정권 시기인 1224년(고종 11)에 태어나 원나라의 내정 간섭 압제에서 시달리던 1300년(충렬왕 26)에 삶을 마쳤다. 8세가 되던 해에 시작된 몽고의 고려 침입은 20년 동안 계속되면서 전쟁의 고달픔을 겪어야 했다. 그리고 최씨 정권이 붕괴되고 무신정권이 몰락하는 정변의 회오리 속에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고려가 몽고에 굴복하자 일어선 삼별초의 난에 휘말리기도 하고, 이어지는 원나라의 내정 간섭 시기에 정계에서 활약하다가 좌절의 쓴맛을 보기도 하였다. 이승휴는 격심한 정치 변화와 이민족의 침략 및 외세의 내정 간섭이라는 민족의 시련을 온몸으로 부대끼며 살다간 인물이었다.

이승휴는 강화도에서 수학(修學)하였다. 이승휴는 9세에 독서를 시작하여 12세에 희종의 셋째 아들 원정국사(圓靜國師)의 거처인 방장(方丈)에 들어가 당시 이름난 선비 신서(申諝)에게 『좌전(左傳)』, 『주역(周易)』 등을 익혔다. 14세가 되는 해에 아버지가 사망하자 어머니는 친정인 삼척으로 돌아갔으며, 이승휴는 홀로 남아 먼 친척인 종조모에게 의탁하였다. 그는 최충(崔沖)[984-1068]의 사학(私學) 9재(九齋) 가운데 하나인 낙성재(樂聖齋) 도회소(都會所)에서 수업하면서 많은 사람을 사귀었다. 그 가운데 당대의 으뜸으로 꼽히던 문인 학자 최자(崔滋)[1188-1260]로부터 능력을 인정받아 마침내 최자가 고시관이 되어 주관한 과거에 급제하여 청운의 꿈을 펼칠 기회를 잡게 되었다. 이승휴의 나이 29세 되던 1252년(고종 39) 봄의 일이었다.

혈기 왕성한 20대의 젊은 시절을 강화도에 묻혀서 보내야만 했던 이승휴는 급제의 기쁨을 안고 이듬해 홀어머니가 있는 삼척으로 금의환향하였다. 그러나 몽고군의 침입으로 인하여 왕이 피신한 강화도로 들어가는 길이 막히자 이승휴는 삼척의 요전산성(寥田山城)에서 몽고군을 맞아 항전하였다. 그 후 다시 강화도로 들어가려 하였지만 이승휴를 이끌고 돌봐 준 최자와 종조모인 북원군부인(北原郡夫人) 원씨(元氏)가 모두 세상을 떠남으로써 더 이상 의탁할 곳이 없게 되어 결국 두타산 기슭 귀동에서 농사를 지으며 홀어머니 봉양에 전념하였다.

이승휴는 나이 41세가 되어서야 벼슬살이를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이승휴는 1263년(원종 4) 나이 40세에 이르러 강원도 안집사로 온 병부시랑 이심(李深)의 주선에 따라 강화도로 돌아가서 관직을 구한다는 시문인 구관시(求官詩)를 지어 올렸다. 이를 본 이장용(李藏用)[1201~1272]과 유경(柳璥)[1211~1289]의 추천으로 이듬해에 지금의 강릉인 경흥부(慶興府)의 서기(書記)에 임명됨으로써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승휴는 지방관리 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중앙의 도병마록사(都兵馬錄事)가 되었다.

이승휴는 사신으로 두 차례 원나라에 다녀왔다. 스스로 죄를 인정한 것이 오히려 원종의 신임을 얻게 되면서 서장관(書狀官)에 발탁되어 원나라에 가게 되었다. 그가 원나라에 가서 올린 진사선미(陳謝宣美)는 원나라 황제 세조를 탄복하게 하였으며, 동행한 송조국(宋祖國)도 이승휴의 문장이 중국인들을 감동시켰다며 찬양하였다. 이듬해인 1274년(원종 15)에는 원종이 승하하자 부음을 전하기 위해 또 한 번 서장관이 되어 원나라에 들어갔다. 당시 원나라에 있던 고려의 세자가 원나라 옷인 호복(胡服)을 입고 장례를 치를 것을 염려하고 상복을 고려식으로 할 것을 권유하여 원나라 세조의 허락을 받아 냈다. 두 번에 걸친 원나라 여행으로 이승휴는 국제 정세를 읽는 안목을 새로이 할 수 있게 되었다.

이승휴의 관직 생활은 직언(直言)과 파직(罷職)의 연속이었다. 충렬왕 때에는 우정언(右正言)이 되어 시정(時政)의 득실(得失)을 15개조로 나누어 간쟁하였다. 우사간(右司諫)을 거쳐 충청도 양광안렴사가 되어서는 장리(臟吏, 뇌물을 받은 관리) 7명을 탄핵하고 그 가산을 적몰(籍沒, 중죄인의 재산 전부를 관의 장부에 올리고 몰수함)하였다가 원한을 사서 지금의 철원인 동주부사(東州副使)로 좌천되었다. 이때부터 스스로 ‘동안거사’라고 일컬었다. 이승휴는 현실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비록 관직에서 물러나고 복직하기를 반복하더라도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정도(正道)를 걷는 것이 자신의 도리라는 것을 호(號)를 통해 보여 주고자 한 것이다.

얼마 후 상소로 말미암아 파면당한 후 관직을 버리고 다시 삼척의 두타산귀동으로 돌아와 은거한 이승휴는 무릉도원을 노래한 중국의 시인 도연명(陶淵明)[365~427]의 『귀거래사(歸去來辭)』 한 구절을 인용하여 지금의 천은사(天恩寺) 자리에 용안당(容安堂)을 짓고 나랏일과 세상사에 함구하면서 유유자적한 삶을 보냈다. 삼화사(三和寺)에서 불서(佛書)를 빌려다 보면서『내전록(內典錄)』을 저술하였다. 그리고 1287년(충렬왕 13)에 들어와 세상에 교훈이 되는 책을 저술하고 싶다는 꿈을 실현하기 위하여 『제왕운기(帝王韻紀)』를 저술하였다.

『제왕운기』를 저술한 2년 후인 1289년(충렬왕 15)에는 용안당 남쪽에 ‘보광정(葆光亭)’을 창건하는 한편 그 곁에 있는 우물 천정(泉井)을 ‘표음정(瓢飮渟)’이라 하고 보광정 아래에 ‘지락당(知樂塘)’을 시설하여 귀동용계별서(龜洞龍溪別墅)를 완성하였다. 백발이 성성한 노구로 귀동 용계별서에서 신선을 자부하며 살던 그가 71세인 1294년(충렬왕 20) 되던 해에 홀연히 용안당 간판을 간장사(看藏寺)로 바꾸어서 별서를 이 절에 희사했으며, 또한 밭을 희사하여 상주의 자본으로 삼게 하였다.

이승휴는 새로이 즉위하여 개혁 정치를 펼치던 충선왕으로부터 두 번에 걸쳐 간곡한 부름을 받게 된다. 관직에 있던 이승휴의 맏아들인 권지교서랑(權知校書郞) 이임종(李林宗)[?~?]을 내려 보내기까지 하는 충선왕의 열성에 못 이겨 개경에 나아간 그는 한때나마 고위직에서 활동하기도 하였다. 충렬왕대에 빚어지고 있던 여러 폐단을 없애고 새로운 정치를 펼치려던 충선왕의 개혁 운동에 그가 적극 동조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75세의 노년에 이른 이승휴로선 언제까지나 현직에서 활동을 계속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거듭 물러나기를 요청하였고, 마침내 1298년(충렬왕 24)에 은거지이던 삼척으로 돌아왔다. 이때 충렬왕은 이승휴에게 밀직부사 감찰대부 사림학사승지(密直副使監察大夫詞林學士升旨)에 임명하는 것으로 치사하였다. 사림학사승지를 마지막으로 벼슬을 마친 이승휴는 2년 후인 1300년 10월에 생을 마쳤다. 그의 나이 77세였다.

[민족대서사시, 제왕운기]

『제왕운기(帝王韻紀)』이승휴가 1287년 강원도 삼척두타산귀동에서 저술한 것으로, 상·하 두 권으로 되어 있다. 상권은 중국의 역사를 7언시(七言詩)로 기록하였다. 하권은 우리나라 역사를 「동국군왕개국연대(東國君王開國年代)」와 「본조군왕세계연대(本朝君王世系年代)」의 2부로 나누어 「동국군왕개국연대」는 7언시(七言詩), 「본조군왕세계연대」는 5언시(五言詩)로 각각 서술하였다.

중국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상권은 서문에 이어서 중국의 신화시대(神話時代)부터 반고(盤古), 삼황오제(三皇五帝), 하(夏)·은(殷)·주(周)의 삼대(三代)와 진(秦)·한(漢)·위(魏)·진(晉)·송(宋)·제(齊)·양(梁)·진(陳)·수(隋)·당(唐)·오대(五代)·송(宋)·금(金)을 거쳐 원(元)의 흥기에 이르기까지를 다루었다.

우리나라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하권의 「동국군왕개국연대」는 지리기(地理記)에 이어 단군의 전조선(前朝鮮), 기자의 후조선(後朝鮮), 위만의 찬탈, 삼한(三韓)과 이를 계승한 신라(新羅)·고구려(高句麗)·백제(百濟)의 삼국, 후고구려·후백제·발해(渤海)까지를 기록하고 있다. 「본조군왕세계연대」에는 고려의 세계설화(世系說話)로부터 『제왕운기』를 저술하던 당시의 왕인 충렬왕까지를 기록하였다.

이승휴『제왕운기』를 저술한 동기는 강렬한 현실 비판 의식에서 출발하였다. 이승휴가 살던 당시의 현실은 대내외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대내로는 실정(失政)한 군왕과 왕권에 도전하는 신하 등으로 인하여 국가 질서가 무너지고 있었으며, 대외로는 원나라의 간섭으로 말미암아 국가 존망의 위기 의식이 고조되고 있었다. 이를 회복시키기 위하여 이승휴『제왕운기』를 쓴 것이다.

[이승휴의 역사관]

이승휴『제왕운기』에 나타난 역사관은 민족사관(民族史觀), 정통사관(正統史觀), 유교사관(儒敎史觀), 신이사관(神異史觀)으로 구분된다.

첫째로 이승휴는 민족주의 역사관에 입각하여 『제왕운기』를 서술하였다. 이승휴는 중국 역사와 우리나라 역사를 상권과 하권에 따로 나누어 저술함으로써 우리나라를 중국과 대등한 위치에 놓았다. 특히 지리기에서 ‘우리나라는 별도의 천지세계(天地世界)로, 중국과는 엄연히 구분된다’고 강조하여 우리나라의 독자성과 자주성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단군을 우리 민족의 시조로 내세워서 우리 민족이 단군 중심의 단일 민족임을 부각시켰다. 특히 우리나라를 ‘조선(朝鮮)’이라고 지칭하기 시작한 것은 『제왕운기』부터라고 할 수 있다. 이를 통하여 우리나라는 지리, 문화, 역사 측면에서 중국과 구분되는 단일 민족 국가임을 분명히 하였다. 한편 우리나라 독자의 민족 문화를 과시하였다. 이승휴는 우리 문화가 원나라에 흡수될 지도 모른다는 문화 위기감에서 우리 문화가 중국과 구분되는 것으로 독창성 강하고 우수한 문화임을 강조함으로써 이를 극복하고자 하였다.

둘째로 이승휴는 정통사관을 현존하는 우리나라 역사서 가운데 최초로 도입하여 우리나라 상고사 체계를 확립하였다. 『제왕운기』에서는 우리나라에 대한 인식의 상한선을 단군조선까지 끌어올렸을 뿐만 아니라 만주와 한반도에서 성립된 여러 나라의 관계를 체계화하여 연결시킴으로써 명실상부한 한국사의 정통성을 수립할 수 있었다. 그리고 고려의 통일이 영토로나 민족 측면으로나 불완전한 신라의 통일과 다르게 완전한 통일임을 강조하고 고려는 단군조선 이래 완전한 민족 국가가 될 수 있었다고 밝혔다. 이로써 우리나라 역사는 단군조선 → 기자조선 → 삼한 → 삼국 → 통일신라·발해 → 고려로 이어지는 정통성을 확보하게 되었다. 특히 이전까지 우리 민족사에 포함되지 못한 발해사를 현존하는 우리나라 역사서 가운데 최초로 민족사에 포용함으로써 북방 정책의 진취성을 강조하고 있음이 주목된다.

셋째로 이승휴『제왕운기』에서 유교사관을 통하여 현실을 비판하였으며, 국왕의 덕치주의와 신하의 나라에 대한 충성심을 강조하였다. 이승휴는 역사를 통하여 현재를 재조명하고, 나아가 미래 계획을 세우겠다고 하는 온고지신(溫故知新) 역사관을 지향하고 있었다. 즉 역사를 현실 비판의 도구로 이용하여 군왕의 통치자 논리를 제시하였으며, 신하의 군왕에 대한 도리를 강조하였다. 결국 이승휴는 유교사관을 통하여 군신관계를 올바로 정립하고, 이로써 유교 정치 질서를 수립하고자 하였다.

이승휴는 신이사관을 통하여 『삼국사기(三國史記)』 등에서 불합리한 것이라 하여 생략한 우리 민족 고유의 전통 신화나 설화를 과감하게 인용하였다. 단군 신화를 통해서는 우리 민족이 중국이 아닌 천신(天神)에서 비롯된 우수한 민족임을 과시하였으며, 단군조선의 개국 연대를 중국과 동일하다고 하여 중국과 대등한 자세를 취하였다. 또 만주와 한반도 지역에 분포되어 있던 모든 나라가 단군의 후손이라고 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활동 영역을 한반도에서 만주까지 확대시키기도 하였다. 이승휴는 『삼국사기』의 유교사관과 『삼국유사(三國遺事)』의 신이사관을 서로 조화시킴으로써 역사관을 한층 더 발전시켰다.

『제왕운기』는 또 서술 방법으로 영사시(詠史詩) 형태를 채택함으로써 고려시대는 물론 조선시대와 구한말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에게 읽혀 후대 역사가들에게 크나큰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사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