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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700455
한자 帝王韻紀
영어공식명칭 Jewangungi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문헌/전적
지역 강원도 삼척시
시대 고려/고려 후기
집필자 배재홍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저술 시기/일시 1287년(충렬왕 13)연표보기 - 『제왕운기』 저술
간행 시기/일시 1296년(충렬왕 22)연표보기 - 『제왕운기』 초간
간행 시기/일시 1360년(공민왕 9)연표보기 - 『제왕운기』 중간
간행 시기/일시 1417년(태종 17)연표보기 - 『제왕운기』 삼간
문화재 지정 일시 1965년 4월 1일연표보기 - 제왕운기(1965) 보물 제418호로 지정
문화재 지정 일시 1986년 11월 29일연표보기 - 제왕운기(1986) 보물 제895호로 지정
문화재 지정 일시 1991년 9월 30일연표보기 - 제왕운기(1991) 보물 제1091-1호로 지정
문화재 지정 일시 2011년 11월 1일연표보기 - 제왕운기(2011) 보물 제1091-2호로 지정
문화재 지정 일시 2021년 11월 19일 - 제왕운기(1965), 제왕운기(1986), 제왕운기(1991), 제왕운기(2011) 보물 재지정
소장처 곽영대 소장본 - 서울시 종로구
소장처 동국대학교 소장본 - 동국대학교 도서관
소장처 삼성출판박물관 소장본 - 삼성출판박물관
성격 문헌
저자 이승휴
권책 상하 2권 1책
행자 8행 16자
규격 29x18㎝
권수제 제왕운기
문화재 지정 번호 보물

[정의]

고려 후기 때 이승휴가 저술한 영사시.

[개설]

『제왕운기』이승휴가 지은 책으로, 상·하 2권 1책이다. 상권은 반고로부터 금나라까지 중국의 역사를 칠언시로 읊었고, 하권은 1·2부로 나누어 단군부터 고려충렬왕 때까지의 우리나라 역사를 서술하였다. 1부는 전조선·후조선·위만조선·삼한·신라·고구려·백제·발해 등의 사적을 칠언시로 엮었고, 2부는 고려 건국부터 충렬왕 때까지의 역사를 오언시로 엮었다.

[저자]

이승휴는 자가 휴휴(休休)이고 호는 동안거사(動安居士)로, 경산부(京山府) 가리현(加利縣) 사람이다. 삼척시는 그의 외가 고을이다. 당시의 결혼 풍습을 감안하면 이승휴는 삼척 외가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을 가능성이 있다.

이승휴는 22세 때인 1245년(고종 32)에 예비시험인 국자감시에 합격하고, 29세 때인 1252년(고종 39)에 과거 급제를 하였다. 그러나 몽고 침입으로 관직에 나아가지 못하다가 41세 때인 1264년(원종 5)에 비로소 동문원 수제(修製)에 임명되었다. 이후 이승휴는 유교 문신 관료로서, 비판 지식인으로서 강직하고 청렴한 관직 생활을 하며 왕권 안정과 국가 번성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이승휴는 또 두 차례나 원나라를 다녀오기도 하였다.

특히 이승휴는 충렬왕의 실정과 측근 세력들의 불법 행위를 보고 분개하며 비판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당시의 잘못된 정치 현실을 개혁하려고 노력하던 이승휴는 끝내 충렬왕의 노여움을 사 1280년(충렬왕 6)에 파직을 맞았다. 파직 당한 이승휴는 삼척두타산 자락 귀산 골짜기에 내려와 용안당(容安堂)을 짓고는 유유자적하면서 불경 공부와 저술 활동에 매진하였다. 그 후 이승휴는 1300년(충렬왕 26)에 77세를 일기로 삼척에서 세상을 떠났다.

[편찬/간행 경위]

이승휴는 1280년(충렬왕 6)에 파직을 당하여 삼척두타산 자락 귀산 골짜기에 내려와 용안당을 건립하고 은둔 생활을 하면서부터 『제왕운기(帝王韻紀)』 편찬을 구상하고 집필을 시작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 후 이승휴는 1287년(충렬왕 13)에 저술을 완성하여 충렬왕에게 바쳤다.

이승휴는 당대의 현실 문제 인식에서 『제왕운기』를 저술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당시 고려는 원나라의 부마국으로 전락하면서 자주국으로서의 존립마저 위태로운 상태였고, 여기다가 원나라 세력에 편승한 부원 세력가의 횡포로 혼란이 가중되고 있었다. 이러한 현실에서 이승휴는 왕정 복고와 원과의 화친으로 맞이한 왕조 중흥의 기회를 상실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에서 역사 교훈의 일환으로 충렬왕과 그 측근들이 삼가고 경계하도록 권유하기 위하여 『제왕운기』를 찬술하였다.

『제왕운기』 편찬에는 중국과 우리 민족 간 지리 및 문화 차이를 강조하려는 목적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우리는 중국과 구별되는 독자성, 자주성, 주체성을 지닌 우수한 문화 민족임을 백성들이 자각하도록 하여 원나라의 국내 정치 간섭에 대항하도록 정신 지주로 삼게 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형태/서지]

『제왕운기』는 1296년(충렬왕 22)에 처음 판각·간행된 후 1360년(공민왕 9)에 중간되고, 조선태종 때인 1417년(태종 17)에 삼간(三刊)되었다. 현재 전해지고 있는 중요한 『제왕운기』 판본은 다음과 같다.

① 곽영대(郭英大) 소장본[보물 제418호]

목판본으로, 상·하 2권 1책이다. 규격은 세로 29㎝, 가로 18㎝이다. 8행 16자씩 판각되었다. 1965년에 보물 제418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보물로 재지정되었다. 자양(字樣)이나 판식(板式) 등으로 보아 고려 말에서 조선 초 사이에 간행된 것으로 보인다. 현존하는 것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책 맨 앞에 이승휴가 충렬왕에게 『제왕운기』를 올리기 위하여 지은 「진제왕운기(進帝王韻紀)」가 있고, 책 마지막에는 정소(鄭玿)가 쓴 발문과 후기가 있다. 그러나 후기의 일부분은 떨어져 나갔다.

② 동국대학교 소장본[보물 제895호]

목판본으로, 상·하 2권 1책이다. 인쇄 상태로 보아 고려 말~조선 초에 인출한 것으로 보인다. 상권 제18장과 하권 제6·7·8·16장이 떨어져 나가 필사로 채우고 있지만 발문과 후제(後題)·간기 등이 모두 갖추어져 있어 서지학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1986년에 보물 제895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보물로 재지정되었다.

③ 삼성출판박물관 소장본[보물 제1091호]

목판본으로, 상·하 2권 1책이다. 고려 말에서 조선 초 사이에 간행된 것으로 추정된다. 권수 1장과 하권 제6장이 떨어져 나갔다. 또 하권 제8장은 다른 판의 각자가 보입(補入)되었다. 그러나 고려 말~조선 초의 간본으로 이미 발견된 다른 것과 대비할 수 있는 자료라는 점에서 서지학·역사학·한문학 연구의 중요한 자료이다. 1991년에 보물 제1091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보물로 재지정되었다.

[구성/내용]

사서(史書)로서 영사시(詠史詩) 유형 작품인 『제왕운기』는 ‘진정인표(進呈引表)’를 서두로 하여 상·하 2권 1책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 권수에는 이승휴 자신이 쓴 서문을 붙였다. 상권은 서문에 이어 7언 고시로 읊은 중국의 역사를 담고 있다. 상고의 신화시대부터 동시대인 원나라에 이르기까지 역대 왕조의 흥기와 멸망에 관한 것이 주된 내용이다. 상권 마지막 부분에는 ‘정통상전송(正統相傳頌)’을 수록하여 중국의 역대 왕조를 정통론에 따라 체계화하였다.

한편 하권은 서문에 이어 ‘동국군왕개국연대(東國君王開國年代)’와 ‘본조군왕세계연대(本朝君王世系年代)’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자는 고려 이전의 우리 역사를 7언 고시로 노래한 것으로, 우리 민족의 활동 무대를 읊은 지리기(地理紀)가 맨 앞에 수록되어 있다. 전조선·후조선으로부터 후삼국과 발해에 이르기까지의 흥망사를 담고 있다. 반면에 ‘본조군왕세계연대’에서는 고려왕건의 선대로부터 이승휴 자신이 살고 있던 충렬왕 대에 이르기까지를 5언 고시로 읊었다.

[의의와 평가]

이승휴『제왕운기』에서 중국과 우리 민족의 차이를 강조함으로써 우리 민족이 중국과 구별되는 독자성·자주성·주체성을 지닌 우수한 문화 민족임을 드러내고자 하였다. 특히 이승휴『제왕운기』에 단군 신화를 수록하였을 뿐만 아니라 삼한 70여 나라의 지배자들이 모두 단군의 자손이라고 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형성과 우리 역사에 대한 일원 인식 체계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이에 따라 우리 민족은 민족의 동원성(同源性)과 더불어 유구성·독자성을 지닐 수 있게 되었다. 이와 함께 고조선이 우리 민족 역사의 기원으로 확고하게 인식될 수 있게 되었다.

이승휴『제왕운기』에 발해를 고구려의 계승 국가로 인정해 고려태조에게 귀순해 온 사실을 서술함으로써 발해를 최초로 우리 민족 역사에 편입시켰다. 이는 만주 일대까지가 우리 민족 역사의 영역이었음을 고증한 것으로, 우리 민족 역사 인식의 공간 지평선을 확대시켰다는 점에서 의의가 막대하다. 이와 함께 발해사 서술은 남북국시대론의 기초를 제공하였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매우 크다 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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