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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척포진 수군첨절제사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700266
한자 三陟浦鎭水軍僉節制使
영어공식명칭 Sacheokpojin Suguncheomjeoljesa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관직
지역 강원도 삼척시
시대 조선
집필자 유재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관직
품계 종3품

[정의]

조선시대 수군진인 삼척포에 배치한 수군 지휘관.

[개설]

삼척포진 수군첨절제사는 조선시대 삼척포에 배치한 수군 지휘관이다. 삼척포가 수군첨절제사진으로 편성되면서 안인포(강릉시), 고성포, 울진포, 월송포 등 4개의 만호영이 삼척포진에 소속되었다. 이 가운데 삼척포에는 배 4척과 수군 245명이 배속되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고려 말 조선 초의 수군은 왜구 침입에 대비하여 재정비되었다. 고려 말에 삼척포에는 만호가 임명되었으며, 조선시대에는 삼척포가 수군첨절제사진으로 편성되었다.

[담당 직무]

삼척포진 수군첨절제사(三陟浦鎭水軍僉節制使)는 삼척포를 중심으로 하는 거진(巨鎭)과 거진 관하 제진의 수군 지휘관으로 구성되었으며, 대체로 품계가 서반 종3품에 있는 자가 임명되었다.

[관련 기록]

『조선왕조실록』, 『경국대전』 등을 통해 삼척포진 수군첨절제사와 관련된 기록들을 확인할 수 있다.

[변천]

고려 말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재정비된 수군은 연해 지역 각 포(浦)에 복무하던 병종으로, 기선군(騎船軍) 또는 선군(船軍)으로 불리었다. 조선세종 때 수군은 일단 제도상으로 정비되었다. 수군 편제는 조선 초에 포진(浦鎭)마다 수군도절제사(水軍都節制使), 수군도첨절제사(水軍都僉節制使), 수군처치사(水軍處置使) 등을 두었다. 세종 때 수군도절제사가 수군도안무처치사(水軍都安撫處置使)가 되었으며, 휘하에는 도만호(都萬戶)와 만호(萬戶)가 있었다. 이후 『경국대전』에서는 진관 체제에 따라 주진(主鎭)에는 수군절도사를 두고 관하의 거진(巨鎭)에는 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 거진 아래의 제진(諸鎭)에는 대체로 만호가 각각 배속되었다.

강원도의 수군은 1399년(정종 원년)에 동북면의 수군과 함께 모두 폐지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왜구의 침입이 우려되어 6개월만에 다시 환원되었다. 수군은 이후 점차 정비되어 세종대에는 전체 1384명이 되었다. 수군 만호가 주둔하는 곳은 월송포, 속초포, 강포구, 삼척포, 수산포, 연곡포 등 여섯 곳이었다. 고려말에는 삼척포에 만호가 임명되었다. 대개는 삼척 수령이 겸직하였지만 『경국대전』에서는 삼척포가 수군첨절제사진으로 편성되면서 안인포(강릉시), 고성포, 울진포, 월송포 등 4개의 만호영이 삼척포진에 소속되었다. 이 가운데 삼척포에는 배 4척과 수군 245명이 배속되었다.

1520년(중종 15) 현재의 삼척항 연변인 육향산 일대에 수군진성이 석성으로 축조되었다. 수군진성은 강원도동해안의 다른 포구(浦口)가 군선(軍船) 항구로서 조건이 적합하지 않아 이곳 저곳으로 옮겨 다닌 것과 달리 조선말까지 수군기지로 활용되었다. 이는 이곳의 자연 입지 조건이 그만큼 우수하였음을 말하여 준다.

[의의와 평가]

삼척포진 수군첨절제사는 조선시대 삼척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동해안의 해안 방어뿐만 아니라 수군 편성과 방어 체제 등을 알려주고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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