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0006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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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柳仁洪 |
영어공식명칭 | Yu In-hong |
이칭/별칭 | 죽계(竹溪) |
분야 | 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전라북도 완주군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유호석 |
[정의]
조선 전기 전라북도 완주군 출신의 문신.
[가계]
유인홍(柳仁洪)[1456~1519]의 호는 죽계(竹溪)이며 본관은 문화(文化)이다. 1469년(예종 1)의 증광 문과에서 급제한 뒤 영광군수(靈光郡守)를 지낸 유효장(柳孝章)의 아들이다. 유효장의 세 아들 유인호(柳仁濠), 유인홍(柳仁洪), 유인유(柳仁濡)가 모두 문과에 급제했는데, 유인홍은 그 중 둘째이다. 유인홍의 고손자 유희림(柳希霖)도 문과에 급제했다. 아버지 유효장의 관련 기록에 따르면 당대에 전주(全州)와 김제(金堤) 지역에서 세거한 것으로 나온다.
[활동 사항]
유인홍은 1481년(성종 12) 친시(親試)에 급제하여 관로에 들어갔다. 『문과방목』에는 유인홍이 급제 당시 진사(進士)였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현존하는 『사마방목』에서는 합격 여부를 확인할 수 없다. 유인홍은 언관(言官)으로서도 임금에게 직언을 서슴치 않았다. 1493년(성종 24) 3월에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임명된 뒤에 여러 차례 관리들의 비행과 부적절한 것으로 보이는 인사(人事)에 대하여 성종에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1493년 8월에 유인홍은 윤은로(尹殷老)와 이창신(李昌臣) 등 두 권신의 중용에 반대하는 계사를 임금에게 올렸고, 10월에는 영안도절도사(永安道節度使) 원중거(元仲秬)가 성품이 용렬하니 중책에 기용하지 말라고 임금에게 아뢰었다. 1494년 정월에는 이의무(李宜茂), 홍효정(洪孝廷), 홍귀달(洪貴達), 박숭질(朴崇質) 등의 임용에 반대하면서, 내농작(內農作)은 매우 무익(無益)한 일이므로 거행할 필요가 없다는 의견을 임금에게 올렸다. 1494년 2월에는 이승조(李承祚)를 안주목사(安州牧使)로 임명하고, 조복명(趙復命)을 부안현감(扶安縣監)으로 임명하는 인사가 나오자, 유인홍은 “이승조는 늙었을 뿐 아니라, 일찍이 경상도 수군절도사(慶尙道水軍節度使)가 되어 철물(鐵物)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였다고 하여 죄를 받았고, 조복명은 사천현감(泗川縣監)으로 고적(考績)에서 하등에 해당된 지 겨우 1년을 지났는데, 갑자기 수령이 되었으니, 모두 옳지 않습니다”라며 반대했다. 유인홍은 그 이후에도 언관으로 빈번하게 국왕의 인사권 행사에 반대하고 나섰지만 그때마다 성종은 유인홍의 제의를 대부분 받아들이지 않았다. 유인홍은 인사뿐만 아니라 종실과 관련한 비용의 지출에 대해서도 제동을 걸었다. 1493년 4월에는 성종이 청녕위(淸寧尉)의 집을 고쳐 짓도록 명하자, 이미 이루어진 집을 고쳐 지을 필요가 없으니 옛날 그대로 두는 것이 좋겠다고 건의하였다. 그러나 성종은 집의 터가 높고 처마 기둥이 짧아 바람과 비를 가릴 수가 없기 때문에 옛날 목재를 그대로 써서 고쳐지을 뿐이라면서 역시 유인홍의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연산군 대에 와서 유인홍은 그의 생애에서 가장 큰 불행을 겪게 된다. 1496년(연산군 2) 3월 무렵 유인홍은 자신의 외동딸이 아버지로부터 꾸지람을 받고는 스스로 목에 칼을 찔러 자살했다고 관에 신고했다. 그러나 심문 결과, 유인홍의 첩 무적(無赤)이 유인홍의 종 대산(大山)과 간통하다가 적실 딸에게 발견되자, 이를 감추기 위하여 첩이 여종 막장(寞莊)과 함께 딸을 찔러 죽였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당시 초계군수(草溪郡守)를 지내고 외지에 있던 유인홍은 이 사실을 알면서도 첩을 보호하기 위하여 딸이 자살한 것으로 거짓 신고하였다. 이로 인해 유인홍은 추국을 받고 장(杖) 1백대, 도(徒) 3년의 형에 더하여 고신(告身)을 추탈(追奪)당하였다. 첩 무적은 형장을 맞고 옥중에서 죽었다. 여종 막장은 참형을 당했다. 유인홍의 첩과 간통한 종 대산은 극변잔읍(極邊殘邑)의 종으로 쫓겨났다. 이때 유인홍은 장속(杖贖)으로 매를 면하기는 했지만 조지서(造紙署)에서 도역(徒役)하는 신세가 되었다가, 강상(綱常)을 범한 죄라는 이유로 양계(兩界)로 이배(移配)되었다. 그 뒤 1502년(연산군 8) 3월에 유인홍은 소격서별제(昭格署別提)에 제수되어 다시 관직에 나아갈 기회를 잡았으나 사헌부의 반대로 끝내 무산되었다.
[학문과 저술]
유인홍은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와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에 따르면 성종 대에 유신(儒臣)으로 정효항(鄭孝恒), 손비장(孫比長), 이숙감(李淑瑊) 등과 함께 『동국통감(東國通鑑)』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상훈과 추모]
유인홍은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황강서원로5길 8-7에 있는 황강서원(黃岡書院)에 배향(配享)되어 있다. 황강서원은 주벽에 황강 이문정(李文挺)이 모셔졌고 이백유(李伯由), 이경동(李瓊仝), 이목(李穆), 이덕린(李德隣), 문화 유인홍(柳仁洪), 진주 강해우(姜海遇)이 소목지서로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