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00047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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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完州大屯山東學農民革命戰蹟地 |
영어공식명칭 | Battlefield of Donghak Peasant Revolution at Daedunsan Mountain, Wanju |
분야 | 문화유산/유형 유산,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유적/터 |
지역 | 전라북도 완주군 운주면 산북리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박대길 |
건립 시기/일시 | 1895년 2월 17일 - 완주 대둔산 동학농민혁명 전적지 동학농민군이 일본군과 관군에 맞서 최후의 항전을 벌인 전적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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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 조사 시기/일시 | 1999년 - 완주 대둔산 동학농민혁명 전적지 지표조사 |
문화재 지정 일시 | 2015년 12월 28일 - 완주 대둔산 동학농민혁명 전적지 전라북도 기념물 제131호로 지정 |
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11월 19일 - 완주 대둔산 동학농민혁명 전적지 전라북도 기념물로 재지정 |
소재지 | 완주 대둔산 동학농민군 최후 항쟁과 전적지 - 전라북도 완주군 운주면 산북리 산15-1 |
성격 | 전적지 |
지정 면적 | 13,207㎡[1필지] |
소유자 | 완주군 |
관리자 | 완주군 |
문화재 지정 번호 | 전라북도 기념물 |
[정의]
전라북도 완주군 운주면 산북리에 있는 동학농민군 최후 항전지와 유적지.
[개설]
1894년 11월, 공주 우금치와 청주성 전투에서 패배한 후 전라도 진산과 고산 등 인근 지역에서 활동하던 동학농민군 중 일부가 대둔산 정상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항쟁을 했다.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서 일본군과 관군이 연합해 1895년 2월 17일 총공세를 감행했으나, 이때 25명에 이르는 동학농민군 전원이 전사했다. 유일한 생존자였던 어린 소년과 압수한 기록을 통해 최후까지 항쟁한 동학농민군의 숫자와 명단 일부가 확인되었다. 대둔산 최후 항쟁지는 동학농민군이 일본군과 관군에 맞서 싸운 최후의 전투였으며, 동학농민군 전원이 전사했다.
[변천]
1894년 대둔산은 남쪽의 고산현, 북쪽의 진산군과 연산현, 그리고 서쪽의 논산군[현 논산시]과 맞닿아 있었다. 그 당시 기록은 “고산읍 산후동(山後洞)에 한듬산이 있는데, 그 윗봉우리는 마천대(摩天臺)입니다. 마천대는 깎아지른 절벽으로 천상과도 같아서 이른바 한 사람만 있어도 방어할 수 있고, 만 명으로도 공격하기 어렵다는 곳입니다”라고 하여, 아주 험하여 사람의 접근이 어려운 곳이었다.
완주 대둔산 동학농민혁명 전적지는 해발 715m의 거대한 암반의 상단에 자리하고 있으며, 동학농민군이 1894년 11월 중순부터 다음 해 2월 18일까지 70여 일간 관군과 일본군에 맞서 최후의 항쟁을 벌인 곳이다. 1894년 11월, 공주 우금치와 청주성 전투에서 패배한 동학농민군은 일본군과 관군의 추격을 받으면서 남쪽으로 후퇴했다. 동학농민군이 대둔산에 들어가 항쟁을 시작한 것은 1894년 11월 중순쯤이었다. 처음에는 최공우(崔公友)와 최사문(崔士文) 등 삼부자와 숙질 등이 정상 부근에 몇 칸의 집을 짓고 병기와 양식 등을 갖추고 집단생활을 시작했으며, 이후 점차 불어나 50여 명에 이르렀다. 시기적으로 한겨울이었고, 해발 700m가 넘는 지형에 위치할 뿐 아니라 민가와 멀리 떨어져 고립된 장소에 있었기 때문에, 이들의 항쟁은 처음부터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이 대둔산의 정상 부근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항쟁을 지속하자, 전주, 공주의 병사와 금산의 민보군(民堡軍)이 연합해 토벌에 나섰으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퇴각했다. 이에 동학농민군 진압에 나섰던 순무영(巡撫營) 우선봉진(右先鋒陳)과 일본군이 직접 나섰다. 관군과 일본군은 치밀한 계획을 세운 뒤 1895년 2월 17일에 본격적인 진압에 나섰다. 동학농민군은 최후까지 저항했으나 역부족이었다. 모두 사살당하고 말았다. 성명 미상의 어린아이만 살려 두었는데, 그것은 전몰(戰歿)한 동학농민군의 정황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동학농민군 25~26명이 최후까지 저항했으며, 이들은 대개 접주 이상이었고, 그 이름을 일일이 기억할 수 없었다. 그리고 28~29세쯤 되는 임신한 부인이 총탄에 맞아 죽었으며, 접주 김석순(金石醇)은 한 살쯤 되는 여자아이를 안고 천 길이나 되는 계곡으로 뛰어들어 암석에 부딪혀 즉사했다.
한편 일본군의 보고서에는 25명을 사살하고, 50자루의 화승총과 약간의 화약과 서류를 획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때 압수한 서류에 의하면, 동학농민군 가운데 주요한 인물로 도금찰(都禁察) 최학연(崔鶴淵), 도집강(都執綱) 장지홍(張志弘), 최고금(崔高錦), 도집행(都執行) 이광의(李光儀), 이광자(李光字), 대정(大正) 이시탈(李是脫), 접사(接司) 조한봉(趙漢鳳), 접주(接主) 김재순(金在醇), 진수환(陳秀煥), 김석순(金石醇), 교수(絞授) 강태종(姜泰鍾), 봉도(奉道) 전판동(全判童) 등 12명이 확인된다. 한편 소모관(召募官) 문석봉(文錫鳳)이 남긴 『의산유고(義山遺稿)』에는 최공우, 최사문, 김공진(金公眞), 양양옥(梁良玉), 박중집(朴仲執), 이홍기(李洪基), 김치삼(金致三), 장문화(張文化), 김태경(金台景), 정옥남(鄭玉男), 고판광(高判光), 송인업(宋仁業) 등 12명이 확인된다. 이 중 최공우와 김공진 등은 최후 항쟁 이전에 산을 내려갔고, 최공우는 후에 고산읍, 진산읍, 연산읍, 진잠읍 4개 읍의 경계에 있는 염정동(廉貞洞)에서 다시 기포했다. 김공진은 고산 출신으로 최공우와 아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그 당시 동학농민군은 고산에 화약제조소를 두고 화약을 제조했다고 한다. 이들의 다수는 최공우를 비롯해 진산 연고자들이고, 김공진과 같은 고산, 그리고 연고지가 확인되지 않는 김태경, 장문화, 김치삼 등을 두고 볼 때, 대둔산 최후 항쟁에 참여한 인물은 진산 출신이 주축이었지만 이외에 고산 등 여러 지역 연고자들로 추정된다. 대둔산 마천대 주변에 주둔했던 동학농민군을 공격한 관군은 이두황(李斗璜) 휘하의 순무영 우선봉진 별군관(別軍官) 윤지영(尹摯榮), 김광수(金光洙)와 교장(敎長) 장세복(張世福) 등 병정 30명, 일본군 특무조장(特務曹長) 다케우치 신타로[武內眞太郞]와 전(前)순무영 별군관 오인경(吳仁庚)을 비롯하여 일본군 30명의 연합부대였다.
[위치]
완주 대둔산 동학농민혁명 전적지는 대둔산 7~8부 능선의 해발 715m에 있으며, 거대한 암반의 상단에 자리한다. 완주 대둔산 동학농민혁명 전적지 지번은 완주군 운주면 산북리 산15-1이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동학농민군 최후 항쟁지가 대둔산이라는 문헌 자료를 확보한 동학농민혁명완주기념사업회에서 완주군에 협조를 구하고, 1999년 완주군에서 원광대학교 사학과에 학술연구용역으로 발주했다. 조사 결과를 보면, 동학농민군의 주거지로 보이는 집터 네 곳과 동굴 두 곳, 그리고 60평 크기의 방어진지가 발견되었고, 유적지의 중앙에 자리한 집터에는 구들돌로 이용된 것으로 보이는 돌이 깔려 있었다. 산 아래에서 유적지에 오를 수 있는 진입로는 세 곳 정도가 가능했다. 유적지 암벽에서 약 100m 떨어진 지점에서 불을 땐 흔적을 확인할 수 있었고, 53㎜의 탄피가 발견되었다. 유적지에서 충청남도계를 넘어 10분 거리에 장군절터가 있는데, 이곳에 동학농민군이 이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우물이 남아 있었다. 유적지는 전면[남동쪽]에서 볼 때, 150m의 암벽 위에 있을 뿐 아니라 양 옆면에는 깎아지른 암벽으로 둘려 있으므로 3m가량의 암벽을 넘지 않고는 내부로 들어갈 수 없을 만큼 천혜의 요새지이다.
[현황]
완주 대둔산 동학농민혁명 전적지를 오르는 초입에는 동학농민혁명완주기념사업회에서 2001년 6월 3일에 제막한 ‘동학농민혁명 대둔산 최후 항쟁전적비’가 세워져 있다. 발굴조사 이후 방송과 언론에 보도되었고, 이를 계기로 방문하고자 하는 이들이 있었지만, 지세가 너무 험한 관계로 일반인의 답사는 거의 없었다. 따라서 완주 대둔산 동학농민혁명 전적지는 원형 그대로 보존된 상태이다. 2015년 12월 28일 전라북도 기념물 제131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전라북도 기념물로 재지정되었다.
[의의와 평가]
동학농민군은 공주와 청주 전투에서 패전하며 동학농민혁명이 좌절될 것이 예상되었음에도 대둔산 정상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일본군과 관군에 맞서 최후까지 항전을 벌였다. 이것은 동학농민군이 염원하는 새 세상을 향한 불굴의 의지를 대내외에 알린 의로운 죽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