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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2099
한자 金長洙
영어공식명칭 Kim Jangsu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광주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노기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01년 3월 3일연표보기 - 김장수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10일 - 김장수 광주 3.10만세운동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19년 8월 13일 - 김장수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6월 선고
활동 시기/일시 1920년 2월 14일 - 김장수 출옥
추모 시기/일시 2019년연표보기 - 김장수 건국포장 추서
출생지 전라남도 광주군 대촌면 곡촌리
거주|이주지 전라남도 광주군 효천면 양림리
성격 독립유공자
성별
대표 경력 숭일학교 학생

[정의]

일제강점기 전라남도 광주 3.1운동을 전개한 독립유공자.

[개설]

김장수(金長洙)[1901~?]는 전라남도 광주군 대촌면 곡촌리[지금의 광주광역시 남구 대촌동]에서 출생하였다. 1919년 3월 10일 전라남도 광주군에서는 작은장날을 이용하여 수피아여학교 교사 박애순(朴愛順), 숭일학교(崇一學校) 교사 최병준(崔丙浚), 최한영(崔漢泳), 김복현 등이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숭일학교 학생 김장수는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치는 등의 활동을 하다 체포되어 징역 6월을 선고받았다.

[활동 사항]

서울에서 3.1운동이 일어나기 전에 일본 도쿄[東京] 유학생인 정광호(鄭光好)가 귀국하여 도쿄에서 일어난 2.8독립선언 거사가 알려지자, 최한영·김복수(金福洙) 등이 「2.8독립선언서」를 등사하였다. 또한, 서울 3.1운동을 목격하였던 김복현과 서울 유학생인 최정두(崔正斗)가 1919년 3월 5일 귀향하여 서울에서 일어난 3.1운동의 정황을 소상하게 전하였다. 이날 밤 광주군 효천면 양림리[지금의 광주광역시 남구 양림동] 남궁혁(南宮赫)의 집에서 숭실학교 교사인 최병준최한영, 황상호(黃尙鎬), 강석봉(姜錫奉), 한길상(韓吉祥), 송흥진(宋興眞), 김용규(金容奎), 손인식(孫仁植), 김태열(金泰烈), 최정두, 김복현, 김강(金剛), 서정희(徐廷禧) 등이 비밀회의를 열었다.

전라남도 광주군의 큰장날인 1919년 3월 8일을 이용하여 광주 3.1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부동교(不動橋) 부근 넓은 백사장에 작은장이 섰고, 석서정(石犀亭) 앞에는 큰장이 섰다. 광주천변의 큰장, 작은장은 호남 지방의 대표적인 장으로 장날이면 호남 각지에서 장꾼들이 모여들었다. 그러나 광주 3.1운동을 추진하기에는 준비 기간이 짧아서 다시 작은장날인 1919년 3월 10일 오후 3시 30분으로 계획을 변경하였다.

1919년 3월 10일 오후 3시경 부동교 아래의 작은장터에는 박경주(朴京柱), 박일구(朴一求), 홍승애(洪承愛) 등과 숭일학교·수피아여학교·광주공립농업학교 학생, 기독교인 및 일반 주민 1000여 명이 모여 3.10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때 숭일학교 학생 김장수는 독립선언서 등의 독립 취지를 기재한 격문, 「독립가」, 태극기 수천 장을 학생들에게 배포하고 군중과 함께 광주천변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조선 독립 만세"를 고창하였다. 시위 군중은 시장을 출발하여 시내로 행진하며 경찰서 앞으로 돌진하였다. 일제는 시위 군중을 해산시키려고 총칼로 진압하고 무차별 검속을 펼쳤다.

김장수는 이때 체포되어 1919년 4월 30일 광주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았다. 이에 공소를 제기하였지만, 1919년 8월 13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6월을 다시 선고받았다. 김장수는 옥고를 치른 후 1920년 2월 14일 출옥하였다.

[상훈과 추모]

2019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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