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80149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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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全國有一五色粘土-靑松甕器 |
분야 | 생활·민속/생활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상북도 청송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박소희 |
[개설]
청송옹기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청송 지역에서만 나는 오색 점토로 만든 옹기를 말한다. 옹기는 전통적으로 장류, 음식 등을 보관하는 저장 용기로 널리 이용되어 왔으나, 1960년대 말부터 그 사용이 현격히 줄어들었다. 이에 옹기 보호책의 일환으로 1989년 옹기 인간문화재 지정, 1990년 옹기장을 국가무형문화재 제96호로 지정하여 정부 차원에서 옹기를 보호 및 지원하고 있다. 특히, 경상북도에서는 유일하게 무형문화재 제25호로 지정받은 청송 옹기장 이무남(李茂男)이 청송옹기의 맥을 이어오고 있다.
[담벼락에서부터 청송옹기가 반겨주는 곳]
옹기는 진흙으로 구운 뒤 잿물을 입히지 않아 윤이 나지 않는 질그릇과 질그릇에 잿물을 입혀 구워 윤이 나고 단단한 그릇인 오지그릇을 포함한 것을 말한다. 청송에는 경상북도에서 유일하게 무형문화재 제25호로 지정받은 청송 옹기장 이무남의 옹기 공장이 있다. 청송옹기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다섯 가지 색의 점토를 이용하여 전통 방식으로 만들고 있는데, 현재 대량 생산되는 옹기 속에서 청송옹기만의 희소성과 특수성을 인정받고 있다.
청송옹기의 대표적인 공장은 청송군 진보면 진안리에 있다. 진보우체국에서 진안사거리 방향으로 우회전하여 국도31호선을 따라 직진하면 좌측에 청송전통옹기 간판이 보인다. 좁은 오르막길을 따라 양 옆으로 커다란 옹기들이 나란히 놓여 있다. 옹기들은 옹기체험장과 청송 옹기장 이무남의 자택 주변, 작업장 담벼락까지 구석구석에 진열되어 있다.
[청송으로 오기까지]
청송 옹기장 이무남의 고향은 경상북도 상주 부원동이다. 옛날부터 이곳은 옹기마을이라 불릴 정도로 옹기공장이 많이 있었는데 선친도 옹기 일을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선친이 병을 얻어 건강을 잃게 되자 먹고사는 문제가 눈앞에 닥쳤다. 이에 어릴 때부터 어깨너머로 배워 온 옹기가 전부였기에 이 일을 업으로 삼게 되었다고 한다. 18세 되던 해 이무남은 옹기장이가 되어야겠다는 결심을 굳히고 고향 마을의 옹기 공장에서 6개월간 본격적으로 옹기 기술을 배웠다. 어깨너머로 배워온 것도 있었지만, 다른 사람이 3년에 걸쳐 배우는 것을 6개월 만에 터득할 정도로 옹기에 대한 그의 열정은 남달랐다.
"나는 한 가지에 정신을 쏟아부으면 그거밖에 생각이 없어요. 그때는 전깃불도 없고 호롱불 쓰고 말이야. 빨리 날이 새서 공장에 가서 해보고 싶기도 하고. 거의 잠을 못 잤지.” 그렇게 옹기 기술을 배운 뒤 앞으로 이 일을 평생 업으로 삼아야겠다는 포부와 남들과 차별성을 가지려는 고심 끝에 이무남은 1959년 19살의 나이로 청송 진보로 향했다. 청송으로 향한 결정적 계기는 바로 흙이었다. 옹기를 만드는 데 있어 흙은 옹기의 질을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오죽했으면 다른 지역에서 나온 옹기도 청송옹기라고 속여서 팔 정도였다.
당시 경상북도 상주에는 흙이 두 가지밖에 나오지 않았는데, 상주 출신의 옹기 판매상들에게 물어보니 청송의 흙이 좋다는 이야기를 많이 했다고 한다. 그리고 실제 와서 땅을 파 보니 30㎝ 간격으로 빨간색, 파란색, 하얀색, 누르스름한 색, 노란색의 흙이 켜켜이 있었다. 이런 흙은 청송밖에 없었다. 당시는 자가용이 흔하지 않던 시절이라 상주에서 청송까지 흙을 채취하러 오가는 과정에도 어려움이 많았다고 한다.
"그때는 차도 없었고, 겨우 완행버스 한 번 타면 중간중간 서는데, 아침 먹고 여기 오면 오후 3시에서 4시 반 정도가 돼요. 한 시간 반이면 충분한 걸 말이야. 그래 오니까 흙이 참 좋더랑께.” 하지만 오색 점토를 본 순간 그런 수고로움쯤은 충분히 감수할 수 있었다. 이후 이무남은 혈혈단신으로 청송군 진보면 진안리에 자리 잡게 되었다.
[19살 젊은 패기로 인수한 옹기 공장]
청송 옹기장 이무남이 청송에 자리 잡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경상북도 영양군 입암면에 있는 한 옹기 공장이 급매물로 나왔다는 소식이 들렸다. 당시만 하더라도 다른 사람 밑에서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소식을 듣자마자 이무남은 입암까지 약 11.7㎞[30리] 길을 달려갔다. 가보니 옹기 공장과 한 가마에 구울 만큼의 옹기까지 포함해서 매물이 나와 있었는데, 그가 가진 돈이라곤 수중에 1,500원뿐이었다. 옹기 공장을 인수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거기에 부산식당이라고 있어요. 우리 어머니하고 비슷한 나이의 아주머니가 식당을 운영하고 있더라고. 거기 들어가서 1,500원 가지고 ‘아주머니요. 오늘 저녁에 유지 어른들과 저녁 한 끼 먹으려고 하는데, 이 돈으로 저녁 한 끼 해주이소.’라고 했지.” 그렇게 식당 주인의 도움으로 동네 유지들을 모은 뒤 옹기 공장을 인수하고 싶으니 도와달라고 간곡히 부탁하였다. 이미 가지고 온 돈은 밥값으로 다 써버렸고 같이 식사를 했던 유지들도 19살 젊은 청년의 부탁을 거절하기는 어려웠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한 유지 어른의 도움으로 공장을 인수할 계약금을 한 달간 빌리게 되었다. 나머지 잔금은 아직 굽지 않은 옹기들을 구워 팔아서 해결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옹기가마에 불을 땔 장작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는 옹기 판매상에게 불에 구워 옹기가 나오면 줄 테니 불을 땔 나무 밑천을 대달라고 부탁했다.
"옹기가 때가 맞아서 그랬는지 잘 구워졌어. 주위 사람들이 옳은 기술자 왔다는 소리를 하는 거야.” 마침 옹기도 잘 나왔고 수중에 있던 단돈 1,500원으로 시작하여 옹기를 팔아 공장을 인수하는 순간이었다. 이후에도 그는 빌린 돈을 갚기 위해 누구보다 더 열심히 일했다. 약속을 잘 지키고 신용이 있어야 한다는 그의 철학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2년 정도 영양 입암에서의 옹기 공장은 잘 돌아갔다. 문제는 3년째 되던 해에 입대 3일 전에 영장이 날아왔다.
결국, 옹기에 관해 아무것도 모르는 누나에게 공장을 맡기고 입대하였다. 군에 가서도 옹기 걱정에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휴가를 받아 공장 일을 살폈다. 그러나 3년이라는 긴 군대 생활을 끝내고 돌아와 보니 도로 확장으로 옹기점 3분의 1이 도로에 포함되어 버리자 결국 영양 입암에서의 옹기 공장은 정리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잠시 경상북도 포항에서 일하기도 했지만, 이내 자신의 옹기 공장을 갖고 싶다는 생각에 1967년 27살에 다시 청송 진보로 돌아왔다.
[오색 점토의 장점]
"지금은 전부 다 가스 가마로 이용하니까 흙을 한두 가지만 해도 돼요. 열판을 놓고 하나씩 놓으니까 힘 받을 일이 없는 거야. 온도를 약하게 하고 유약 처리하는 거야. 보기 좋으라고.” 두 가지 흙을 사용하는 옹기에 비해 오색 점토를 사용한 옹기는 잿물을 빨아들이거나 옹기를 몇 단씩 쌓고 1,200℃까지 올라가는 고온 속에 넣어도 잘 견디는 성질이 있었다. 흙의 영향 때문인지 이무남이 19살에 처음 진보로 왔을 때 이 일대에는 옹기 공장이 13군데나 있을 만큼 옹기 공장은 활기를 띠고 있었다.
흙은 마음대로 가져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당시 오색 점토를 채취하여 파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대부분 보리, 쌀, 콩, 밀 등과 같은 현물로 교환했다. 이후 흙을 파는 사람들이 점차 도시로, 공장으로 떠나면서 1972년도부터는 오색 점토가 나는 땅을 직접 사서 옹기를 굽고 있다고 한다. 정말 보물 같은 땅이 아닐 수 없다.
[청송옹기 제작 과정]
청송옹기의 제작 과정은 먼저 오색 점토를 채취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굴을 파고 들어가 흙을 파내야 하는데, 보통 음력설이 지나고 땅이 녹기 전에 굴을 판다. 혹시라도 굴이 무너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1년간 쓸 흙을 채취한다. 이렇게 채취한 오색 점토는 2~3일 물에 불린 후 수분을 골고루 머금을 수 있도록 다진다. 그러고 나서 흙을 밟아서 차지게 한 뒤 얇게 깎으면서 불순물을 걸러낸다.
이렇게 반죽이 완성되면 물레 위에 올리고 동그랗게 바닥을 만든다. 그다음 반죽을 떡가래처럼 만들어 한 단씩 한 단씩 쌓아 올리면서 눌러 준다. 이 과정을 타렴이라고 한다. 그리고 안과 밖을 마주쳐서 평평하게 만든다. 옹기 원형이 완성되면 나무를 태워 나온 재와 약토[산기슭에 먼지처럼 오래도록 쌓인 보드라운 흙]를 섞어 만든 잿물을 옹기에 입힌다. 화공약품을 유약으로 쓰지 않기 때문에 다른 그릇과 달리 청송옹기는 숨을 쉰다. 20일 정도 그늘에서 말린 뒤 가마에 넣는다.
이무남은 100년이 넘은 이른바 대포가마[칸막이가 없는 통가마]라 불리는 가마에 옹기를 넣고 일주일간 불을 땐다. 처음에는 서서히 저온에서 시작하여 점점 불의 온도를 높이는데, 최고 높을 때는 1,200℃까지 올라간다. 한 달에 걸친 긴 과정 끝에 옹기는 비로소 세상에 나오게 된다.
[옹기 환갑 이무남이 들려주는 청송옹기]
이무남은 2018년 현재 80세로 19세에 옹기를 처음 시작했으니 옹기를 배우고 업으로 삼아온 세월만 60년이다. 그래서 이무남은 옹기 환갑 인생이라 소개한다. 청송옹기는 모든 과정이 전통 방법에 의한 수작업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무남이 이렇게 전통 방법을 고수하는 데는 옹기에 대한 그의 철학이 있기 때문이다.
요즘 시중에 나오는 옹기는 대부분 기계로 대량 생산하여 화학약품으로 된 유약을 바른다. 여기에는 납 성분이 포함되어 있어 이러한 옹기에 장을 담가 먹으면 사람에게도 해로울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이렇게 만들어진 옹기는 가스 가마에서 약 900℃ 정도로 굽기 때문에 강도 면에서도 청송옹기와 비교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천연 잿물을 바른 청송옹기는 안팎으로 뚫린 미세한 구멍을 통해 숨을 쉰다. 또 습기와 열을 조절하여 음식의 신선도를 유지해 준다.
이무남은 자택 옆에 있는 청송옹기 체험장에서 직접 청송옹기와 시중에서 대량 생산되어 판매되는 옹기를 보여준다. 옹기를 두드려 소리를 비교함으로써 강도의 차이를 보여주고, 두 옹기의 조각편을 보여주면서 흙의 색깔이 다름까지 보여준다. 지금은 이무남의 아들들이 그의 뒤를 이어 옹기를 굽고 있다. 막내아들은 옹기를 배운 지 20여 년 되었으며, 이미 이무남이 인정할 정도로 옹기를 잘 만든다고 한다.
항아리, 국그릇, 밥그릇, 찬그릇 등 과거 우리의 일상품이었던 전통 옹기가 지금은 플라스틱을 비롯한 여러 대체품과 공장에서 대량 생산되는 옹기들로 점점 사람들에게서 잊히고 있다. 이러한 와중에도 우직하게 청송옹기를 만드는 이무남 장인이 있기에 청송옹기의 가치는 더 빛을 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