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701126
한자 -海-男根奉獻
영어공식명칭 Sinnammaeul Haeseodang and Phallic simbol
분야 생활·민속/민속
유형 유적/민간 신앙 유적
지역 강원도 삼척시 원덕읍 갈남리
집필자 윤동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서낭당|제의

[정의]

강원도 삼척시 원덕읍 갈남리 신남마을에 있는 마을 제단과 동제.

[개설]

삼척시 원덕읍 갈남리 신남마을 해신제는 향나무로 깎은 남근목(男根木)을 봉헌하는 유교식 동제이다.

[의례]

현재 신남마을에서의 동제는 정월 대보름과 시월에 지낸다. 시월의 경우에는 첫 오일, 즉 첫 번째 말띠 날에 지낸다. 죽은 처녀의 기가 세다고 하여 기가 가장 센 말의 날로잡은 것이라고 한다. 또한 12지신 중에서 말의 성기가 가장 큰 이유도 있다.

제관은 당주 한 명과 제관 다섯 명으로 구성된다. 마을 주민이 많은 때에는 정확하게 여섯 명을 뽑았으나 주민 감소로 제관과 당주를 겸하는 경우도 많아지고 있다. 다섯 명의 제관 가운데 당주를 포함한 세명은 본당으로 가고 두 명은 해신당으로 간다. 제관은 제일(祭日) 열흘 정도 앞두고 정한다. 제관이 선정된 이후부터 제관과 당주는 밖으로 나가는 것을 삼가고 꼭 해야 할 일만 한다.

제물은 어물[대구·명태·문어·열기·가자미등]과 과일[대추·밤·곶감·사과·배 등], 탕에 쓰이는 콩나물·무, 명태나 대구포, 김이다. 나물로 쓸 고사리, 도라지 등은 따로 산다. 또한 제사에 필요한 초, 향, 창호지 다섯 장 불천지[소지종이]를 충분히 산다. 제주(祭酒)는 고사 이틀 전에 임원 버스정류장 앞의 임원양조장에 특별주문하기도 하지만 요즘에는 장보는 날에 막걸리를 넉넉히 사서 준비해 둔다. 요즘에는 소지·양초 등 제사용품은 불교사, 과일은 농협마트, 쇠고기는 단골처를 정하지 않고 그날 장보러 간 제관들이 끌리는 집으로 가서 각각 사온다. 과거에는 소를 잡아서 제수로 사용했지만 그것은 1960년쯤의 일이다.

마을회관에 모여 있는 제관들은 밤 12시가 되면 제물을 준비하여 본당과 해신당으로 출발한다. 이때 각 당으로 가는 제관 가운데 가장 젊은 제관이 지게에 제물을 지고 당까지 한 번도 쉬지 않고 가야 한다. 이 때문에 제관을 선정할 때 제물을 지고 갈 두 명은 젊은 사람으로 선출해야 하는데, 주민들의 노령화로 쉽지 않은 실정이다. 동제를 지낼 때에는 외부인의 참가를 엄격히 통제하며 분위기는 엄숙한 편이다.

해신당 입구 금줄을 친 아래에서 제관들이 짚을 태우고 제관들이 그 위를 지나가면서 부정을 없앤다. 해신당에 들어서면 한지를 펴기 전에 준비한 남근목을 제당 왼쪽 벽에 걸어 둔다. 제단 위에는 촛불과 향을 피우고 잔을 올린다. 이후에는 해신당 바닥에 자리를 깔고 제물을 진설한다.

해신당은 제관 두 명이 가기 때문에 한 사람이 초헌(初獻)[참신한 후에 하는 것으로 첫째 잔을 신위 앞에 올림]과 종헌(終獻)[아헌을 한 후에 셋째 잔을 신위 앞에 올림]을 겸해야 한다. 먼저 잔에 술을 조금 따르고, 이것을 향로에 다시 부은 다음 제관이 다시 잔을 채워 제단 위에 헌작(獻酌)[제사 때 술잔을 올리는 것]한다. 그 후 메에 숟가락을 꽂고 초헌이 재배하면 뒤를 이어 다른 제관이 헌작하고 재배한다. 채국[무, 오이 등을 넣어 끓는 국을 뜻하는 ‘챗국’의 북한식 표현]을 물리고 메그릇 뚜껑을 덮고 나서 다시 반배하면, 이어서 제관이 함께 재배한다. 그러고 나서 첨잔하고 다시 재배한다. 해신당에서는 축문을 읽지 않는다.

해신제를 지낸 뒤에 잡귀에게 먹이기 위한 고수레로 음식을 조금씩 떼어 그릇에 담는다. 해신당 앞 왼쪽 바닷가에서 “잡귀야 잘 받아먹어라”고 하면서 헌식한 뒤 잔에 담긴 술을 세 번 나누어 헌신(獻神)한다. 촛대 두 대를 내려놓으면 제관 두 명이 어업에 종사하는 가구들을 절반으로 나누어 소지를 올린다. 이는 본당에서 마을 전체 주민들을 위한 소지를 올리기 때문에 해신당에서는 어업과 관련된 주민만 소지를 올리기 위함이다. 개별 소지가 끝난 뒤 제물을 정리한다. 이후 용왕에게 해상에서의 안전과 풍어를 기원하며 헌식한다. 해신당에서 제의 소요시간은 약 20분이며, 마치면 제물을 담아 마을회관으로 돌아온다. 이튿날 새벽 2시 정도가 되면 제관들은 모두 마을회관에 모여서 음복을 하며 제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3시쯤에 귀가한다. 본래 마을의 남자 주민 대부분이 음복에 참여해야 하지만 최근 들어서는 제관들만 음복한다.

[현황]

해신당은 신남마을의 가장 안쪽 바닷가 언덕에 한 서낭산[해산]의 끝자락에 자리 잡고 있으며, 특히 몇 년 전부터 대형 남근 조각품들이 이곳에 전시되어 국내외 언론에 소개됨으로써 사시사철 많은 관광객이 찾아오는 유명 관광지가 되었다. 산의 생김새는 마치 바다를 향해 불끈 일어난 남근과 같이 생겼다. 그 귀두부분에 향나무 신수(神樹)와 그 앞에 당집이 서 있다. 돌출한 낮은 구릉의 끝부분을 ‘서낭댕이’라 하며, 그 아래에 돌 제단을 야트막하게 만들어 제를 지냈다. 30여 년 되었다는 ‘해신당’이라고 음각한 현판이 향나무 중간에 걸려 있으며 나뭇가지에는 무당들이 개인적으로 복을 빌면서 걸어 둔 복주머니와 삼색천이 있었다. 1986년에 삼척군은 도비(道費)를 지원받아 정면 한 칸, 측면 한 칸의 13㎡ 정도의 기와를 얹은 팔작지붕 형태의 당을 해신당의 신수 앞에 지었다. 당집 안에는 용모가 단정한 분홍치마, 노랑저고리 차림의 여신이 화상으로 모셔져 있다. 왼쪽 벽 모서리에는 제물로 바친 남근목 다섯 개를 한 줄로 엮어서 걸어 두었으며, 오른쪽 벽 모서리에는 향나무로 잘 깎은 남근목 다섯 개를 액자가 마주하고 있다. 제단에는 향로와 촛대, 과일·과자 등 제물이 놓여 있다. 최근에 불전함이 제단 왼쪽 구석에 놓였다. 전국에서 많은 무속인이 해신당을 찾아 기도를 드리기도 한다.

[역사와 유래]

바닷가에 위치한 ‘해신당’은 ‘해랑당’, ‘여신당’이라고 부른다. 물에 빠져죽은 처녀신을 모시는 여서낭당이다. 해신당은 어업에 종사하는 동해안 마을에서 보편적으로 볼 수 있는 당이다. 신남마을 해신당에 처녀신을 모시고 남근목을 봉헌하게 된 사유를 알려 주는 전설은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여러 가지로 변형되고 있다. 기존에 밝혀진 삼척의 설화 관련 자료를 보면 애바위 전설과 남근목 봉헌은 전혀 별개인 이야기로 전해지기도 한다. 그런데 어느 단계에서부터인지 자연스럽게 이 두 이야기가 합쳐져서 해신당에 남근목을 봉헌하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우선 마을에서 대표적인 이야기로 인정받고 해신당 입구에 비석으로 남겨진 내용을 살피면 다음과 같다.

옛날 이 마을에는 장래를 약속한 처녀 애랑이와 총각 덕배가 살고 있었다. 어느 봄날 애랑이가 마을에서 떨어진 바위섬으로 미역을 따러 간다 하기에 덕배가 떼배로 애랑이를 바위섬에 데려다 주고 덕배는 밭에 나가 일을 하고 있었다. 갑자기 바람이 많이 불어 해변으로 나와 보니 이미 배를 띄울 수가 없을 만큼 강한 바람과 함께 집채 같은 파도가 일기 시작했다. 애랑은 살려 달라고 덕배를 부르며 애원하다가 안타깝게도 파도에 쓸려 죽고 말았다.

이후부터 이 바다에서는 고기가 전혀 잡히질 않았으며, 해난사고가 자주 발생하였다고 한다. 마을 주민들은 지금까지의 재앙 모두가 바위를 붙잡고 애쓰다 죽은 애랑이의 원혼이 한 짓이라 생각하고 뜻을 모아 애랑이가 죽은 동쪽 바위섬을 향해 정성스레 음식을 장만하여 고사를 지냈다. 그러나 고기는 여전히 잡히지 않고, 마을과 어부들의 생활은 점점 피폐해져 가기만 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한 어부가 술에 취해 고기가 잡히지 않은 데 대한 화풀이로 바다를 향해 욕설을 퍼부으면서 소변을 보았다. 그런데 그 이튿날 아침 다른 배들은 여전히 빈 배인데 그 어부만 만선으로 돌아왔다. 이상하게 생각한 주민들은 그 어부에게 까닭을 물었고, 어부가 지난 저녁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사람들은 너도나도 바다를 향해 오줌을 누고 조업을 나갔고, 기대한 대로 모두들 만선으로 돌아왔다.

이후 신남마을에서는 그동안의 재앙이 처녀 애랑이의 원한 때문이라 믿고 애바위가 보이는 산 끝자락에 애랑신을 모시고 남근을 깎아 제물과 함께 바쳐서 혼인을 못한 원한을 풀어주게 되었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