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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700907
한자 陟州八景
영어공식명칭 The Eight Views of Cheokju
분야 문화·교육/문화·예술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강원도 삼척시
집필자 손승철

[정의]

강원도 삼척시에 있는 여덟 곳의 절경지.

[개설]

척주팔경은 삼척 지역에서 예부터 경관이 빼어난 여덟 곳을 이르던 말이다. 척주팔경으로는 죽서루, 능파대, 회강정, 진동루, 취병산, 무릉계, 만경대, 연근당이 있다.

[죽서루(竹西樓)]

관동팔경의 하나로 꼽히는 죽서루는 오십천(五十川)이 내려다보이는 절벽에 자리 잡고 있다. 창건 연대와 창건자는 알 수 없지만 『동안거사집』에 1266년(고려 원종 7) 이승휴(李承休)[1224~1300]가 서루(西樓)에 올라 시를 지었다는 기록이 있어 1266년 이전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1403년(조선 태종 3)에 삼척 부사 김효손(金孝孫)[1373~1429]이 중창하였다고 전해진다. 원래 규모인 정면이 5칸이던 것을 뒷날 양쪽 끝에 1칸씩 늘린 것으로 보이며, 그 부분은 공포(栱包) 형식이 다르다. 죽서루는 아래층이 17개의 기둥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가운데 9개는 자연석 위에 세웠으며, 8개는 석초(石礎) 위에 건립하였다는 특징이 있다. 위층에는 20개의 기둥에 팔작지붕이 있다. 현재 누정 안에는 부사 허목(許穆)[1595~1682]이 지은 ‘죽서루기(竹西樓記)’와 당성홍백련이 지은 ‘죽서루 중수기’ 등 기문, ‘죽서루’, ‘해선유희지소(海仙遊戱之所)’ 등 제액(題額), 일중(一中)김충현(金忠顯)[1921~2006]이 쓴 율곡이이(李珥)[1536~1584]의 ‘죽서루차운(竹西樓次韻)’, 정조의 어제시 시판 등 모두 26개의 현판이 걸려 있다.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213호로 지정되었다.

[능파대(凌波臺)]

능파대는 북평읍추암리 해변에 돌출되어 있는 야트막한 산 위에 있던 정자이다. 지금은 없고 이 산 서쪽에 해암정(海巖亭)이란 정자가 있다. 1361년(공민왕 10) 예의판서 집현전 제학 심동로(沈東老)가 관직에서 물러나 이곳에다 정자를 짓고 소일하던 곳이라고 한다. 능파대 바닷가에는 동해 팔경의 하나로 불리는 촛대바위가 있다. 산 위에는 용의 시체를 묻은 용묘(龍墓)가 있다는 전설도 있지만 현재는 없으며, 부근 바닷가 모래밭에 큰 구멍이 있어 용추라고 이름을 붙이고 가뭄이 심할 때는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1462년(세조 7) 도체찰사 한명회(韓明澮)[1415~1487]가 능파대라 개칭하였고, 1675년(숙종 원년) 우암(尤菴)송시열(宋時烈)[1607~1689]이 귀양지에서 지나는 길에 능파대에 들러 「해암정」이라는 현판을 썼다고 한다. 능파대는 1794년(정조 18)에 중수하였다고 하지만 지금은 없고 많은 명사의 시와 한명회의 「능파대기」가 전한다.

[회강정(廻江亭)]

삼척 시내를 관통하는 오십천이 영동 지방에서 영남 지방으로 오가는 길목인 도경동(桃京洞)에서 방향을 바꾸어 동쪽으로 휘돌아 죽서루의 절경을 만들어 놓고 동해로 흘러가는데 도경동의 강 가운데에는 조그마한 바위섬이 있다. 이 바위섬에 조선성종 때 강릉 출신인 형조참판 최응현(崔應賢)[1428~1507]이 벼슬을 그만두고 이곳으로 내려와 회강정(廻江亭)을 짓고서 이곳의 아름다운 경관을 즐기며 은거하였다고 한다. 정자는 오래되어 없어지고 부근 숲속에 ‘회강정(廻江亭)’ 석 자를 크게 새긴 바위만 남아 있다. 아무리 큰 홍수가 나도 이 바위섬은 물이 넘지 않는다 하여 명당으로 일컬어지며, 그곳에 묘를 쓰기도 했다고 한다.

[진동루(鎭東樓)]

삼척시 정상동 육향산 아래쪽에 동해를 지키기 위하여 돌로 쌓은 삼척포진성(三陟浦鎭城)이 있고, 삼척포진성 동문 쪽으로 진동루가 있었다. 진동이란 동쪽을 진압한다는 의미인데 동해 바다의 왜구(倭寇)를 제압한다는 말이다. 부산 동래의 진남루 및 충남 보령의 진서루와 함께 유명하였다, 진동루안해루(晏海樓) 또는 세병루(洗兵樓)로도 불렸다.

진동루는 1511년(중종 6) 부사 이함(李涵)[1633~?]이 창건하였고, 1576년(선조 10) 부사 김효원(金孝元)[1542~1590]이 ‘진동루’라는 제액을 걸었다. 1711년(숙종 37) 부사 이성조(李聖肇)[1663~1740]가 중수하고 안해루(晏海樓)라고 개명하여 현판을 달았다. 1887년(고종 24)에 소남(少南)이희수(李喜秀)[1836~1909]가 쓴 ‘진동루’와 ‘토포아문(討捕衙門)’이란 글씨가 현재까지 전해 오고 있다. 진동루가 있던 삼척포진성은 삼척 영장이 수군을 지휘하던 곳으로, 영장은 영동 9개 군의 수군을 총괄하였다. 현종 때부터는 영장이 도적 잡는 직책인 토포사를 겸하게 되어 영동 지역뿐만 아니라 울릉도까지 관장하였다. 육향산 아래쪽에는 영장들의 선정비와 불망비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취병산(翠屛山)]

취병산[382m]은 강원도 동해시 삼화동에 위치한 산이다. 전천(箭川) 남쪽에 있으며, 설운동의 안산이다. 1662년에 편찬된 『척주지』에 실린 「두타산기(頭陀山記)」에 “취병산은 혹 금병산(錦屛山)이라고도 한다. 두타산의 동쪽 기슭이며, 삼화곡(三和谷)에서는 소산(小山)이라고 한다.”, “취병산 서쪽은 신흥(新興)인데 부에서 30리이고, 신흥에서 10리를 더 올라가면 백복령(白卜嶺)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내용에서 산의 위치와 산 이름의 역사가 매우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동해시지』에 “이 산에는 봉우리가 12개 있는데 그 모습이 마치 병풍을 펼쳐 놓은 것 같다. 봄이면 화병(畵屛)이고, 여름이면 취병(醉屛)이고, 가을이면 금병(錦屛)이고, 겨울이면 소병(素屛)이라 한다.”라는 기록이 있다. 아름다운 산세의 변화무쌍한 모습 가운데 취병은 여름 산을 일컫는다.

[무릉계(武陵溪)]

무릉계는 두타산[1353m], 청옥산[1256m], 고적대[1354m]에서 발원한 계류들이 흐르는 골짜기이다. 호암소부터 용추 폭포까지 약 4㎞의 계곡으로, 산수의 풍치가 절경을 이루어서 소금강으로도 불린다. 1977년 3월 17일 국민관광지로 지정되었다. 고려충렬왕 때 이승휴 또는 조선선조 때 삼척부사 김효원이 무릉 계곡이라는 이름을 지었다고 하지만 뚜렷한 근거는 없다. 신선이 사는 곳처럼 아름답다 하여 일명 무릉도원으로도 불린다.

두타산성 등 유적과 더불어 1998년 국가 지정 문화재인 보물로 지정된 계곡의 입구에는 유서 깊은 삼화사(三和寺)가 있다. 삼화사는 인근 지장사와 함께 삼척의 천은사·영은사 등과 더불어 영동 남부 지역 중심 사찰로서 선종의 종풍을 이어받은 깊은 역사성을 띠고 있고, 삼공암·흑연대·중대사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사찰 내에는 삼층석탑과 삼화사 철조노사나불좌상이 있다.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서쪽으로 금란정(金蘭亭)이 있다.

무릉계곡의 절경을 이루는 무릉동 일대에는 태암(胎巖)·미륵암·반학대(半鶴臺)·능암(能巖)·쌍현암(雙峴巖)·학소대(鶴巢臺) 등 기암괴석이 있고, 계곡을 따라 계속 올라가면 용추폭포가 나온다. 그 외에 자연 관광 자원으로 관음폭포, 병풍바위선녀탕 등 수많은 기암괴석이 아름다운 경치를 이루고 있다.

[만경대(萬景臺)]

만경대는 동해시 북평동에 있는 조선 시대의 누각으로, 정자 앞으로 내가 흐르고 북평의 들과 넓은 동해가 한눈에 보인다. 1613년(광해군 5)에 김훈(金勳)이 세웠으며, 1660년(현종 1)에 허목이 이곳에서 경치를 감상하고 감탄하여 정자 이름을 만경이라 하였다. 1786년(정조 10) 유한준(兪漢準)[1732~1811]이 만경대에서 본 경치를 시로 읊어 현판에 남겼다. 1872년(고종 9)에 중수하면서 이돈상(李敦相)[1815~?]이 현판을 쓰고 김원식(金元植)[1823~1881]이 상량문, 이남식(李南軾)[1803~1878]이 ‘해상명구(海上名區)’라는 글을 각각 써서 현판을 걸었다. 1943년 김원식의 후손 김형익(金炯益)과 김대영(金大榮)이 석주로 개조하고 중수하였다.

[연근당(燕謹堂)]

죽서루 남쪽에 별관인 연근당이 있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흔적도 찾을 수 없다. 연근당은 1443년(세종 25)에 부사 민소생(閔紹生)이 창건하였고, 1471년(성종 2) 화재가 발생하여 이듬해인 1472년(성종 3)에 부사 양찬(梁瓚)[1443~1496]이 재건하였다. 이 같은 내용은 성종 때 김수온(金守溫)[1410~1481]의 『연근당기』에 실려 전해지고 있다. “연근당은 삼척부죽서루의 별관이며, 계해년[1443년]에 전 부사 민소생이 7간으로 창건하였다. 겨울에는 따듯하고 여름에는 서늘하다. 크고 작은 사객(使客)들이 편히 쉬는 곳이다. 신묘년[1471년] 윤 9월에 화재를 당하였다. 이듬해 봄에 개축하면서 8간으로 증축하였다. 10월에 낙성한 자리에는 고을 사람들이 모두 몰려들었다. 일어나서 태수에게 술잔을 올린 자는 창사(倉使) 김자조이고, 취해서 춤을 춘자는 장군 함익겸이며, 술에 깨어 읊조린 자는 교수 어경량이다. 좌우에 모시고 연석을 관장한 자는 호장 김생려와 김득강이고, 또 김규 등 수십명이다. 태수는 누구인가. 성은 양이고 이름은 찬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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