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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700580
한자 朴杰男
영어공식명칭 Park Geolnam
이칭/별칭 사정,의암,의암공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강원도 삼척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최도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몰년 시기/일시 1603년(선조 36)연표보기 - 박걸남 사망
출생지 박걸남 출생지 - 강원도 삼척시 미로면 상거노리 옷바우골[의암촌]지도보기
묘소|단소 삼척 박걸남 묘역 - 강원도 삼척시 노곡면 여삼리 산148 지도보기
사당|배향지 영모재 - 강원도 삼척시 노곡면 여삼리 지도보기
성격 무관
성별
본관 밀양
대표 관직 의병대장|경상우도우부장

[정의]

조선 전기 삼척 출신 무관.

[가계]

박걸남(朴杰男)[?~1603]은 강원도 삼척시 미로면 상거노리 옷바우골[의암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자는 사정(士貞), 호는 의암(衣岩) 또는 의암공(衣岩公)이다. 진사(進士) 박순(朴淳)의 후손이다.

[활동 사항]

박걸남은 어려서부터 기력이 강하고 기재에 능하였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박걸남은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으로 크게 활약하면서 전공(戰功)을 세웠다. 『진주지(眞珠誌)』 등의 기록에 따르면 임진왜란 후 조정으로부터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2등이 주어지고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추증되었다. 또 오극성(吳克成)[1559~1616]의 문집인 『문월선생문집(問月先生文集)』 ‘임진일기(壬辰日記)’편을 보면 주로 경상도 지방에서 활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박걸남은 1598년(선조 31) 삼척으로 귀향한 후 1603년(선조 36)에 사망하였다.

박걸남의 의병 활동은 오극성의 문집이 발견되기 전까지 전설로 내려져 왔다. 그 전해져 오는 이야기 전설은 다음과 같다.

1. 비범한 출생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동한 박걸남 장군은 삼척시 미로면 상거노리 옷바우골[의암촌]에서 태어났다. 장군의 아버지는 나이 마흔이 되도록 자식이 없어 근심하다가 근처의 금태봉(金胎峰)이라는 명산에 들어가 백일기도를 드렸다. 백일기도의 마지막 날 그는 꿈을 꾸면서 꿈에 백발노인이 나타나 큰 칼 한 자루를 주며 “이것은 용천검(龍泉劍)이라. 잘 보관하면 훗날 반드시 쓸 곳이 있을 터이니 조심스럽게 간직하라.”고 당부하였다. 장군의 아버지는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두 내외가 같은 꿈을 꾼 것이다. 장군의 어머니는 신기하게도 그달부터 태기가 있었다. 열 달이 다 차 출생을 앞두고 있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금태봉이 사흘을 끙끙 울고 난 후 박걸남 장군이 태어난 것이다. 한편 일설에는 선녀가 내려와서 산모를 바라지하고 그 집 대문 앞에 피칠을 하여 표시해 놓고 갔다고도 한다. 이처럼 장군의 출생은 영웅의 면모를 띠고 있다. 태어날 때부터 하늘의 도움을 받은 박걸남 장군은 어려서 기골이 장대하고 담력이 세 그의 나이 일곱일 때 힘이 이미 장성한 어른과 같게 되어 쌀 한 가마니를 거뜬히 들었다. 또 장군의 음성이 마치 백호랑이가 산 위에서 울부짖는 것 같이 우렁차서 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모두 두려움에 떨었다. 그의 나이 서른이 되었을 때 한 말이나 되는 밥을 한 끼에 먹고 술은 한 동이를 들이키는 대식가였지만 마음씨가 고와서 이웃 사람들에게 해가 되는 일은 일절 하지 않았다.

2. 7척 장사 의병장

박걸남 장군은 키가 7척이나 되고 힘이 셌다. 그의 부친은 장군에게 글공부를 제대로 시키지 않았다. 부친의 업을 이어받아 순박한 농부로 살았지만 그 마음속으로는 줄곧 큰 뜻을 품고 있었다고 한다. 박걸남 장군의 힘이 얼마나 셌는지 “정라진의 뗏마, 즉 소형 선박을 둘러메어 여삼의 산꼭대기에 갖다 놓았다.” “감자 열 가마를 지고 산을 넘었다.”는 등 그의 7척 장사 전설은 여전히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그의 명성은 임진왜란을 통해 전국에 널리 알려진다. 당시 삼척시 노곡면 여삼리에 살고 있던 박걸남 장군은 근처의 밭에서 황소 두 마리로 밭갈이를 하다가 왜란이 일어나 나라에서 의병을 모집한다는 소문을 듣고 소에 씌운 멍에를 벗기지도 않고 쟁기를 매단 채 황소를 끌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버지 앞에서 전쟁터로 떠나게 해 달라고 간청하지만 아버지가 만류하자 앉아 있던 방에서 왈칵 치솟아 천장과 지붕말기를 뚫고 나와 그 길로 곧장 삼척, 울진, 봉화 등지의 의병들과 합류하여 한양 길에 올랐다. 그리고 충청도와 경상도에서 고언백(高彦伯)[?~1608], 김응서(金應瑞)[1564~1624] 장군과 함께 출전하여 왜병을 격파하였다. 이때 이순신(李舜臣)[1545~1598] 장군이 이끄는 수군이 남해안에서 왜군 병선을 무차별로 격침시키고 있었는데 격침당한 왜병 수군들이 일부 육지로 상륙하자 그들을 잡아 포로로 삼았다. 박걸남 장군은 명나라 파병 장수 이여송(李如松)[1549~1598] 장군의 부대와 합류하여 전투를 치렀다. 이때 박걸남 장군은 전투 중에 키가 7척이 넘는 왜장이 기세등등하게 칼을 휘두르며 달려들자 왜장이 타고 있던 말의 왼쪽다리를 베었더니 왜장은 혼비백산하여 달아났다고 한다. 이후 박걸남 장군은 경상우도 우부장으로 의병 활동을 맹렬하게 전개하였으며, 이순신 장군도 이를 알아 많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7년 간의 지루한 전쟁이 끝나고 전쟁 중에 충무공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자 박걸남 장군은 고향으로 돌아와 있다가 운명을 달리하였다. 그 후 조정에서는 선무공신(宣撫功臣) 병조판서(兵曹判書)직을 증직한다. 일설에는 전쟁이 끝나고 왕이 공신들을 불러 잔치를 베풀 때 장군을 초청하여 상금으로 엽전 500냥을 하사했는데 장군이 “이 돈은 백성의 것이니 저는 이 돈을 백성에게 나누어 주겠습니다.”라고 말하니 왕은 장군의 어진 마음을 가상히 여겨 더욱 사랑하게 되었다고 한다.

3. 묘소와 사당

장군이 세상을 달리 하고 300년이 지난 다음 장군의 묘를 이장하였는데 백골은 황금같고 두골(頭骨)부터 족골(足骨)까지 환골이어서 두골을 드니 족골까지 연결되어 있었다. 현재 박걸남 장군의 묘소는 노곡면 여삼리에 있으며, 그 앞에 사당이 있어 후손들이 매년 제사를 올리고 있다.

[묘소]

박걸남 묘역은 강원도 삼척시 노곡면 여삼리 산148번지에 위치하며, 2000년 3월 11일 강원도문화재자료 제130호로 지정되었다. 묘갈(墓碣)은 1915년에 세운 것으로, 전·후면 상단에 “유명조선국선무공신병조판서박공휘걸남묘갈명(有明朝鮮國宣武功臣兵曹判書朴公諱杰男墓碣銘)”이라고 전서체로 새겨져 있다. 묘역 앞에는 영모재(永慕齋)라는 재실(齋室)이 있으며, 1901년에 건립하였다.

[상훈과 추모]

선무공이등훈(宣武功二等勳)으로 선무공신(宣武功臣)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증직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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