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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안』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700459
한자 鄕案
영어공식명칭 Hyangan
이칭/별칭 향좌목,향적,향록유안,향목,사적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문헌/전적
지역 강원도 삼척시 향교길 34[교동 566]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유재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저술 시기/일시 1670년연표보기 - 『향안』 작성
저술 시기/일시 1692년연표보기 - 『향안』 작성
저술 시기/일시 1698년연표보기 - 『향안』 작성
저술 시기/일시 1851년연표보기 - 『향서당임사록』 작성
저술 시기/일시 1885년연표보기 - 『향서당임사록』 작성
소장처 삼척향교 - 강원도 삼척시 향교길 34 지도보기
성격 문헌
저자 삼척향교

[정의]

조선시대 삼척 지역의 향중사류(鄕中士類) 명부.

[개설]

『향안』은 조선시대 향중사류 명부로, 일종의 향신록(鄕紳錄)이다. 향좌목(鄕座目), 향적(鄕籍), 향록유안(鄕錄儒案), 향목(鄕目), 사적(士籍)이라고도 한다. 향안에는 대개 세족(世族), 현족(顯族), 우족(右族) 등으로 불리는 재지사족만이 입록될 수 있었다. 또 향안에 입록되어야 비로소 양반으로서의 대우는 물론 좌수(座首)·별감(別監)의 향임에도 선출되고, 지방에서 지배 신분으로 행세할 수 있었다. 삼척의 경우 삼척향교에 1670년, 1692년, 1698년 작성된 향안과 1851년 및 1885년 작성된 향서당임사록(鄕序堂任仕錄) 등 5건의 향안이 소장되어 있다.

[편찬/간행 경위]

향안의 기록 체재는 대체로 관직, 성명, 본관, 자, 호, 생년 간지와 누구의 아들이나 아우 또는 손자 순서로 기록하였다. 지방에 따라서는 이름만 기록해 놓은 것도 있다. 입록 자격으로서 친족은 물론 처족과 외족까지 포함된 족계가 분명해야 되고, 반드시 문벌세족이어야 하였다. 그리고 가계는 물론 본인에게도 아무런 허물이 없어야 되고, 품행이 뛰어나야 하였다. 허물이란 본인 및 내외족계 안에 천계(賤系) 또는 범죄 흔적을 말한다.

입록 절차는 대체로 향원(鄕員)들이 추천하면 충분히 토의한 다음 권점(圈點)을 통하여 가부를 결정하였다. 물론 지역에 따라서는 만장일치를 원칙으로 하는 곳도 있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반드시 권점을 거치는 것은 아니었다. 향인이 모두 존경하는 사족은 바로 입록되는 특별한 경우도 있었다. 반대로 허물이 있는 자를 사사로운 정에 얽매여 잘못 추천했을 경우 추천인도 함께 처벌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향안이 작성된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대체로 유향소 성립 시기부터 작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자료상 가장 먼저 나타나는 것이 「풍패향좌목(豊沛鄕座目)」이다. 이른바 「향헌」에 실려 있는 「풍패향좌목」은 태조 출생지인 풍패현[지금의 함흥]의 향안이다.

「풍패향좌목」에 실린 인물은 풍패현 지역 출신자뿐만 아니라 개국공신 또는 풍패현 지역과 연관성이 있는 자, 세종 때의 중신, 세조의 공신 등 다양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재지사족의 향권 장악이라는 사실과 관계 없이 다만 태조 출생지에 대한 존엄 대상 차원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향안이 재지사족의 권익 옹호와 권위의 상징으로 만들어진 것은 지방 통제책이 강화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조선 전기의 향안은 임진왜란 때 거의 불에 탔기 때문에 현존하는 것은 모두 임진왜란 이후에 재작성된 것들이다. 이것은 난리 중에 향안이 소실되면서 향촌 사회 질서가 크게 무너지자 새로운 질서 회복의 요청에 따른 결과로 보인다. 그러나 고을에 따라서는 이때 구안(舊案)을 수정하면서 인물의 첨삭이 가해졌고, 그 뒤 극심한 신분상의 변동으로 추록(追錄) 과정에서 많은 문제점을 야기하였다. 또 당쟁과 서얼허통(庶孽許通)이라는 사회 변화도 향안의 성격 변화에 크게 작용하였다. 즉 한 번 향안에 오르면 자자손손 양반 행세를 할 수 있고, 특히 서북 지방의 경우 군역까지 면제받았기 때문에 향안 입록을 둘러싸고 향인 간 갈등이 심하였다. 심지어 향임을 매매하는 폐단까지 발생하여 영조·정조 이후 향안 수정이 수령들의 합법 수탈 방법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강원도 지역에 소장되어 있는 향안은 소수이다. 춘천 지역의 경우 춘천향교에 3건, 풍양조씨(豊壤趙氏) 문중에 2건 등 모두 5건의 향안이 전해 오고 있다. 그 가운데 가장 오래된 1656년에 작성된 것이 있다. 삼척의 경우 삼척향교에 1670년, 1692년, 1698년 작성된 향안과 1851년 및 1885년 작성된 향서당임사록(鄕序堂任仕錄) 등 5건의 향안이 소장되어 있다.

[구성/내용]

삼척향교에 소장된 향안 가운데 1670년 작성 향안에는 첫머리에 최수일(崔守一)이 입록되어 있는 가운데 이하 김양신(金養身), 최양걸(崔養傑) 등 총 66명이 입록되어 있다. 끝부분에는 좌수(座首) 1인과 별감 3인의 서명[별감 1명은 수결 없음]이 기록되어 있다. 1692년 향안에는 김유(金有)가 첫머리에 입록되어 있고 이하 총 46명이 수록되어 있다. 끝부분에는 마찬가지로 좌수와 별감의 서명이 들어 있다. 1698년 향안에는 최진축(崔鎭軸)이 첫머리에 나오고 이하 총 59명이 입록되어 있다. 1851년 향서당임사록은 부사(府使)와 향청 임원인 좌수 및 별감의 성명이 수록된 것이다. 첫머리에는 부사 정재용(鄭在容)과 좌수 홍병권, 별감 김석호·정국현·홍장섭이 수록되어 있다. 이하 부사 김병연까지 11명의 부사, 좌수, 별감의 성명이 수록되어 있다. 1885년 향서당임사록에는 부사 김병연과 좌수 홍병석, 별감 심익서·김원태·김원의가 첫머리에 입록되어 있고 이하 8명의 부사·좌수·별감의 성명이 수록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강원도 지역에 소장되어 있는 향안이 얼마 되지 않는 상황에서 삼척 지역의 향안이 5건 남아 있다. 삼척 지역의 시기별 향안을 통하여 재지사족의 현황과 삼척 지역의 사회상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귀중한 자료로 평가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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