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금강사군첩』 중 「죽서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700373
한자 金剛四郡帖中竹西樓
영어공식명칭 Jukseoru of Geumgang Saguncheop
분야 문화·교육/문화·예술
유형 유물/서화류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임호민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제작 시기/일시 1788년(정조 12)연표보기 - 김홍도 금강사군첩 가운데 죽서루 제작
성격 진경산수화
작가 김홍도
서체/기법 진경화법

[정의]

단원 김홍도의『금강사군첩』에 있는 죽서루 그림.

[개설]

정조가 관동 지역의 명승지를 직접 갈 수가 없어서 김홍도로 하여금 관동 지역의 명승지를 둘러보고 직접 그림을 그려 오도록 하였다. 이 죽서루 그림 역시 죽서루에 가고 싶지만 궁궐을 떠나기가 어려운 정조의 명에 따라 김홍도가 그린 그림이다. 그림은 죽서루 뒤를 포근하게 감싸고 있는 듯이 보이는 산과 빙 둘러 나가는 듯한 오십천이 바다와 같이 넓어 보이도록 잘 묘사하고 있으며, 그 한가운데에 우뚝 솟아 있는 절벽을 그리고 그 위에 고고하게 서 있는 죽서루를 표현하였다.

김홍도의 본관은 김해, 자는 사능(士能), 호는 단원(檀園)이다. 생몰년은 1745~1806?년이다. 김홍도는 조선정조 때 화가로 관직은 충청도 연풍현감을 지냈다. 정조어진익선관본 도사의 동참화사로 활동[1781]하였으며, 영조어진(英祖御眞) 제작에도 참여하였다. 김홍도는 고유색 짙은 조선의 독자 문화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태어나 문화의 최후를 장식하는 역할을 담당한 화가였다. 김홍도는 7~8세 되던 해에 사대부 화가 강세황에게 천재성을 인정받아 강세황의 훈도 아래 시문과 서화를 익혔다. 산수·인물·화조·사군자·누각 등을 다 잘 그렸으며, 특히 당시 생활상을 그려내는 풍속 인물화에 뛰어난 솜씨를 보였다. 신선과 고승을 그리는 도석화(道釋畵)는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경지였다고 한다.

[형태 및 구성]

『금강사군첩(金剛四郡帖)』은 그림 60폭이 수록된 화첩이다. 첩당 12폭씩 묶어서 5첩으로 나뉘었다. 겉표지는 오동나무판으로 되어 있다. 겉표지에는 금강전도(金剛全圖)라는 표제가 묵서(墨書)로 쓰여 있을 뿐 서문, 발문, 화제시(畫題詩) 등은 전혀 없다. 다만 그림마다 해당 실경의 명칭이 묵서로 쓰여 있다. 『금강사군첩』은 본래 70폭이라고 전해지지만 현재 60폭만 남아 있다.

『금강사군첩』은 김홍도가 정조의 명을 받고 관동 지역의 산수 승경을 직접 유람하면서 그려 온 『봉명도사첩(奉命圖寫帖)』으로, 『금강전도』라고도 한다. 1788년(정조 12) 가을 44세의 김홍도는 정조의 명을 받고 복헌(復軒)김응환(金應煥)[1742~1789]과 함께 관동 9군(郡)을 답사하면서 그림을 그렸다. 김홍도는 100여 폭의 그림을 그려서 『금강산도 횡권(金剛山圖橫卷)』으로 만들어 정조에게 바쳤다. 정조는 수시로 이 횡권[두루마리 형태]을 펼쳐서 금강산 비경을 간접 감상하고, 때때로 이덕무(李德懋)[1741~1793]·서유구(徐有榘)[1764~1845]·서유본(徐有本)[1762~1822] 등에게 그림을 보고 시를 짓도록 하기까지 하였다.

정조는 이 그림을 보고 감탄하여 7언절구의 시를 지어서 내렸다.

正祖御製詩(정조어제시)

彫石鐫崖寄一樓(조석전애기일루) [돌 다듬고 절벽 쪼아서 세운 누각 하나]

樓邊滄海海邊鷗(누변창해해변구) [누각 곁엔 푸른 바다 바닷가엔 갈매기]

竹西太守誰家子(죽서태수수가자) [죽서 태수는 누구 집안의 아들이련가]

滿載紅粧卜夜遊(만재홍장복야유) [미녀들 가득 싣고 밤 새워 뱃놀이로세]

그러나 이 횡권은 궁중의 화재로 소실되었다고 한다. 이 횡권 외에 김홍도가 그려 바친 화첩본 『금강산도』가 별도로 있었다.『금강산도』 화첩은 정조의 부마 홍현주(洪顯周)[1793~1865]에게 하사되어 전해지다가 현재는 행방을 알 수 없다. 현재까지 전해지는 『금강산도』는 개인소장 작품, 호암미술관, 간송미술관 소장 작품들이 있다. 그리고 60폭과 40폭으로 이루어진 김홍도의 『금강산화첩도』가 전해지고 있다. 60폭의 화첩에 대해 학계는 화풍이나 세부 묘사가 다른 작품과 비교하였을 때 김홍도가 그려 온 금강산 화첩의 원형을 가장 잘 보존하고 있는 후대의 모사본으로 추정하고 있다.

삼척 죽서루 그림은 화첩 제1권에 11번째로 실려 있다. 참고로 1권에는 청심대(淸心臺), 월정사(月精寺), 오대산(五臺山)중대(中臺), 사고(史庫), 상원(上院), 대관령(大關嶺), 구산서원(丘山書院), 경포대(鏡浦臺), 능파대(凌波臺), 죽서루(竹西樓), 옹요(瓮窯) 등 12주제의 그림이 실려 있다.

죽서루 그림은 죽서루의 정면 오십천 건너편 언덕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면서 그린 형태이다. 하단부는 굽이쳐 흐르는 오십천의 풍광과 여유롭게 유선을 타며 노니는 선비들의 모습, 죽서루에서 오십천을 가로질러 있는 긴 줄이 그려져 있다. 그림 가운데에는 가파른 절벽과 절벽 위의 죽서루 모습이 그려져 있고 왼쪽에는 응벽헌을 비롯한 삼척 관아 건물, 오른쪽에는 연근당으로 추정되는 건물이 각각 묘사되어 있다. 응벽헌 왼쪽으로는 가야산으로 추정되는 높은 산봉우리가 둘러쳐 있고, 죽서루 뒤로는 오십천이 지금의 삼척 시가지 쪽으로 굽이쳐 흘러 내려가는 모습과 산들이 묘사되어 있다. 그 뒤로는 옅은 물안개를 묘사하여 동해 바다를 연상시키게 한다.

[특징]

김홍도의 죽서루 그림 특징은 첫째 겸재(謙齋)정선(鄭敾)[1676~1759]이나 스승 강세황(姜世晃)[1713~1791]의 작품에 비해 훨씬 객관화 및 사실화하였으며, 그림의 대상과 사물 하나하나를 매우 상세하게 묘사하였다. 둘째 서양화의 특징인 원근법과 투시도법을 활용하여 넓은 실용 공간을 표현하였다. 셋째 객관화 및 사실화 화법을 고수하면서도 군더더기 요소를 과감히 생락함으로써 그림의 주 대상만을 중점 묘사하는 회화 목적 달성에 최선을 다하였다. 넷째 지도나 궁중 행사도를 그릴 때 사용하는 부감법도 활용하여 죽서루와 주변 경치를 다양한 경관 특징이 잘 살아나도록 그렸다.

[의의와 평가]

현존하는 김홍도의 죽서루 그림은 후대의 모사본으로 추정되기는 하지만 관동 지역의 명승지로 널리 알려진 1870년대의 죽서루죽서루 주변, 오십천오십천 주변 등지의 풍광을 실경으로 확인할 수 있는 진경산수화라는 점과 당시의 죽서루를 중심으로 한 삼척 관아 배치 및 삼척 시가지 형태를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가치 있는 작품이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