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700354
한자 永慶墓碑
영어공식명칭 Yeonggyeongmyobi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유적/비
지역 강원도 삼척시 미로면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상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899년(광무 3)연표보기 - 영경묘비 건립
현 소재지 영경묘비 - 강원도 삼척시 미로면 영경로 270 지도보기
성격 묘비
관련 인물 이안사|이양무|평창이씨|이강제
재질 화강암
크기(높이, 너비, 두께) 197.0(147.0)㎝×57.7㎝×30.5㎝
소유자 국유
관리자 삼척시

[정의]

강원도 삼척시 미로면 영경로 270에 있는 영경묘에 세운 비석.

[개설]

조선을 건국한 태조이성계(李成桂)[1335~1408]의 5대조 할머니 평창이씨(平昌李氏)의 무덤인 영경묘 앞에 세운 비석이다.

이양무(李陽茂)[?~1231]의 부인 평창이씨는 상장군 이강제(李康濟)의 딸이자 이성계의 4대조인 목조이안사(李安社)[?~1274]의 어머니이다. 이양무는 고려시대 인물로, 조선태조의 5대조이자 목조이안사의 아버지이다. 원래 전라도 전주 지방 호족이었다. 아들 이안사가 중앙에서 내려온 산성별감(山城別監)과 시비가 생기자 후환이 두려워서 전주를 떠나 강원도 삼척으로 이주할 때 이들도 함께 동행하였다고 한다. 나중에 이들이 이곳에서 세상을 떠나자 시신을 삼척시 활기리[현재 준경길 333~360]와 삼척시 하사전리[현재 영경로 270]에 각각 매장하였다고 전한다.

삼척시 활기리 노동과 하사전리 동산에 있는 고총(古冢)이 그들의 무덤이라는 주장이 조선 초기부터 있었지만 확실한 증거가 없어 조선 조정에서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무덤은 국가의 수호를 받았다. 그리고 대한제국기인 1899년(광무 3)에 이르러 황실에서 이 고총을 목조의 고비(考妣)[돌아가신 아버지와 어머니] 무덤으로 인정하고 노동이양무 무덤준경묘, 동산의 부인 무덤을 영경묘라 하여 국가 사전(祀典)에 포함시켰다.

[건립 경위]

영경묘비는 1899년 준경묘(濬慶墓)영경묘(永慶墓)를 대수축하여 제각(祭閣)과 비각(碑閣), 재실(齋室)을 건립할 때 함께 세워졌다. 1899년 7월 11일 학부대신(學部大臣) 민병석(閔丙奭)[1858~1940]을 영경묘 비문 서사관, 영경묘 제각의 상량문 제술관으로 김학진(金鶴鎭) 및 서사관으로 윤상연(尹相衍)을 제의하여 각각 임명하였다. 또 비석 제작을 위해 사용하는 돌은 삼척에서 캘 수 있고 돌의 품질이 쓸 만하다고 하여 삼척 군수가 기일에 앞서 돌을 캐내 다듬어 놓을 것을 지시하였다고 한다.

[위치]

강원도 삼척시 미로면 영경로 270 일원에 위치하고 있다.

[형태]

현재 비석은 비각 안에 세워져 있다. 뚜껑돌[개석(蓋石)]은 팔작지붕 형태인 팔작옥개석(八作屋蓋石)이고, 비좌는 사각형[방형(方形)]으로 지대석 위에 놓여 있다. 비의 앞면에는 다소 큰 전서체 글씨로 ‘대한영경묘(大韓永慶墓)’라 새겼으며, 뒷면에는 정헌대부 내부대신 민병석이 고종의 칙명을 받들어 쓴 비음(碑陰)이 새겨져 있다. 비문의 주요 내용은 동산(東山)이라고도 불리는 이 자리에 목조황비이씨(穆祖皇妣李氏)의 능을 만들었는데 이미 이전인 허목(許穆)[1595~1682]과 정철(鄭澈)[1536~1593]에 의하여 관련 사실이 언급된 바 있음을 소개하고 있다. 또 좌향(坐向)은 좌묘이향유(坐卯而向酉)로서 산세는 웅위(雄偉)에 초손(稍遜)하고 함포온자지봉심(含抱蘊藉之奉審)한 형세라 하였다. 덧붙여서 묘역이 동쪽으로는 구수봉(求壽峯), 서쪽으로는 방우치(方禹峙), 남쪽으로는 다라구미(多羅龜尾), 북쪽으로는 상사전리(上寺田里)에 각각 이른다고 기록하고 있다. 비의 크기는 높이 197.0(147.0)㎝×너비 57.7㎝×두께 30.5㎝이다.

[금석문]

전면:대한영경묘(大韓永慶墓)

후면:자로동이동십리유왈동산거삼척치삼십리식아목조황고비리씨의리지장야좌묘이향유산세지웅위초손이함포온자승지봉심재신리중하소주읍중기전고상신허목위부사시소찬주지서급로동동산이묘기소술고사동백정철도상묘지청수축시말렬성조령도신년례봉심금양수호지절일여로동양묘소문헌실적일이가징동지구수봉서지방우치남지다라구미북지상사전동구각이량지척삼천삼백정계립표묘의제치사전시로동오호시거야기어추원보본지의필부가궐언자야유짐소자기감왈식극우렬성조소미황자재역부감불도유이성지언 광무삼년기해십일월일 정이품정헌대부내부대신부장신 민병석봉칙근서(自蘆洞而東十里有曰東山距三陟治三十里寔我穆祖皇考妣李氏衣履之藏也坐卯而向酉山勢之雄偉稍遜而含抱蘊藉勝之奉審宰臣李重夏所奏邑中紀傳故相臣許穆爲府使時所撰州誌序及蘆洞東山二墓記所述古事東伯鄭澈圖上墓地請修築始末列聖朝令道臣年例奉審禁養守護之節一如蘆洞兩墓所文獻實蹟一以可徵東至求壽峯西至方禹峙南至多羅龜尾北至上寺田洞口各以量地尺三千三百定界立標墓儀制寘祀典視蘆洞嗚呼是擧也其於追遠報本之義必不可厥焉者也惟朕小子其敢曰式克于列聖朝所未遑者哉亦不敢不圖惟而成之焉 光武三年己亥十一月日 正二品正憲大夫內部大臣副將臣 閔丙奭奉勅謹書)

[현황]

영경묘는 이양무의 무덤인 준경묘와 함께 1981년 8월 5일 강원도 기념물 제43호로 지정·관리되어 오다가, 남한 지역에 소재하고 있는 조선 왕실 선대(先代)의 능묘로 조선 왕조 태동의 발상지로서의 역사성뿐만 아니라 풍수지리상의 가치 등 중요한 역사 및 학술 가치가 있어 2012년 7월 12일 사적 제524호로 지정되었다.

[의의와 평가]

영경묘비는 조선을 개창한 태조이성계의 5대조 할머니이자 4대조 목조이안사의 어머니 평창이씨의 무덤인 영경묘 앞에 세운 묘비로, 준경묘비와 함께 조선 왕실의 선대 능묘비로서 기념할 만한 의미가 있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