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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700340
한자 三陟天恩寺紀實碑
영어공식명칭 Gisil Stele of Cheoneunsa Temple at Samcheok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유적/비
지역 강원도 삼척시 미로면 동안로 816[내미로리 785]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도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921년연표보기 - 삼척 천은사 기실비 건립
현 소재지 삼척 천은사 기실비 - 강원도 삼척시 미로면 동안로 816 지도보기
성격 비석
관련 인물 회담 선사|박한영|심지황
재질
크기(높이, 너비, 두께) 253(202)㎝×77.5㎝×21.5㎝
소유자 천은사
관리자 천은사

[정의]

강원도 삼척시에 있는 천은사의 창건 설화·연혁·중수 과정 등이 기록된 비석.

[개설]

삼척 천은사 기실비는 돌머들[독머들, 석탄동]에 있다. 돌머들은 방고개 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천은사 기실비가 있는 곳에서 직진하면 천은사이고, 오른쪽의 흥태골로 들어서면 지시고개를 넘어 옛 삼화사터로 갈 수 있다.

비석에는 천은사의 창건 설화와 연혁, 1921년까지의 중수 과정을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는 등 천은사 연구의 기초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비석의 글은 당대 최고 학자 박한영이 쓰고, 글씨는 지역 최고 명필가 심지황의 글씨이다.

[건립 경위]

천은사를 중수한 후 이를 기념하여 1921년 회담(會曇) 선사가 중수 과정과 천은사 연혁을 새겨 세운 비석이다.

[위치]

강원도 삼척시 미로면 내미로리 천은사 입구에 있다.

[형태]

비석은 팔작지붕 형태의 뚜껑돌[개석(蓋石)]에 비좌(碑座)는 자연석에 거북 문양을 조각한 귀부(龜趺)이다. 크기는 253(202)㎝×77.5㎝×21.5㎝이다.

[금석문]

1997년에 발간한 『삼척시지』에 실려 있는 「천은사기실비」 해석을 전재하면 다음과 같다.

살펴보면 이 절의 위치는 관동척주의 서쪽에 있으며 금강산이 원조요 오대산이 중조로, 늘어진 두타산이 부용처럼 혼자 우뚝 서 있으며 병풍처럼 동해를 가로막은 이 산에 4대 명찰이 있으니 천은사가 제일이다. 절의 3면이 모두 험한 산인데 유독 동쪽으로 길이 열리어 맑은 물이 굽이 돌며 미로면 사둔리 여울을 지나 구방산 밑 오십천에서 어울려 죽서루 앞을 지나 불래포(정라)로 들어간다. 그밖은 대양이다. 불래포(佛來浦)는 전하는 말에 옛날 서역에서 불골(佛骨)을 실은 석함(돌배)이 여러 나루에 머물다가 갈래산으로 옮겨 왔으므로 이런 이름이 불리었다 한다.

이 절의 이름과 연혁을 보면 네 절 중의 그 하나가 백련대(白蓮臺)로 산의 조종이라 하는 두타산에 서역에서 왔다는 삼선(三禪)이 이 산에 머무르면서 네 모퉁이에 절을 세웠으니 동쪽에 청련대 즉 지상사(池上寺)이나 지금은 없어졌으며, 남쪽은 금련대영은사(靈恩寺)이며, 북쪽엔 흑련대 즉 삼화사(三和寺)이다. 서쪽엔 백련대 즉 이 절이다(天恩寺). 두번째는 간장사(看藏寺)이니 고려조 충렬왕 때 학사 이승휴(李承休)가 은퇴하여 이곳에 정자를 짓고 절 안에서 대장경을 여러번 읽은 기념으로 후대를 위하여 간장사란 이름을 지어 붙였다. 세번째 흑악사란 이름은 조선조 청허대사(淸虛大師)가 금강산에서 이곳에 와서 살면서 절을 중건하였는데 주봉이 푸르고 검어서 흑악사(黑岳寺)라고 절 이름을 고쳤다. 네번째 천은사라는 이름은 광무 3년에 황실에서 노동동산리에 있는 목조대왕의 부모 대묘소를 추봉(追封)할 적에 이 절에 총 조포소를 두고 역사를 하였기에 천은사(天恩寺)라 고쳤다.

그러므로 이 절은 지금으로부터 약1000여 년 전 신라 흥덕왕 4년 즉 당 문종 태화 3년 기유(己酉)에 서역 나라에서 고승 3승이 두타산에 와서 처음으로 본사를 창건했다고도 하며, 또는 범일 국사가 당나라에 갔다가 돌아온 후 삼화사(三和寺)와 세 절을 지을 적에 이 절도 같이 창건하였다고 전하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이 절의 경계는 동은 돌바닥 여울이요, 서는 염불암(念佛岩)이요, 남은 신리골(辛梨谷)로 이어지고 북은 고기곡(古基谷)에 접해 있다.

고려조 초 광무 2년 즉 후주(後周) 태조 원년 신해에 폐하여 중건하였으나 주사(主事)의 인명은 망실되었다. 그후 절은 황폐하여 칡덩굴과 쑥밭 속에 들어가 100여 년이 지나갔다. 고려 중엽 문종시대에 우인(虞人: 산림과 소택을 맡은 관리)이 활을 차고 노루를 쫓다가 갑자기 가시밭 속에 남아 서 있는 절을 보고 감복되어 마침내 사문을 만들고 도안수법전(道眼修法殿)이라 이름을 붙이고 선당(禪堂)을 짓고 거기서 살았다. 고려 말 공민왕 때 왕사(王師) 나옹 화상이 이 고을을 멀다 않고 찾아와 이 산에 이르러 말하기를 이빨과 옷을 담은 보배의 그릇을 봉함을 만들어 탑속에 간직하고 산중의 비보(秘寶)로 삼았다.

조선조 선조 때 임진병란으로 절과 탑이 불타 재가 되었는데 오직 깊숙히 있던 절간 한 동만 겨우 남았다. 기해(己亥)년 봄에 청허 대사가 금강산에서 와서 그 제자 성윤(性允), 영운(靈運)이 선을 맺어져 백 인의 힘으로 절을 짓게 되어 큰 절로 일어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이름을 응진전(應眞殿)이라 부르고 백련당, 청련당, 동별당, 설선당, 심검당, 범종루 등을 그곳에 지어 훌륭한 큰 성같이 되었다. 숙종 병신(丙申)년에 전 사찰에 복록이 돌아와 정유(丁酉)년에 도열(道悅)과 치명(致明)의 두 윗어른들이 주사가 되어 선승 양당과 동별당을 새로 지었으며 또 다음해 기해(己亥)년 극락전을 중수하고 또 신축년에 범종루를 짓고 전당을 단청하니 완연히 일신되었다. 영조 임진(壬辰)년에 돌을 깎아 층계를 만드니 미관이 대성하였다. 헌종 신축(辛丑)년에 설송체환으로 자기 재산을 기부하여 불당과 선당을 중수하였다. 병오(丙午)년에 서화(瑞華)가 종루를 중건하였으며 철종 경신(庚申)년에 화악과 우학이 법당의 지붕을 이었으며 고종 무자(戊子)년에 응하선사(應河禪師)가 조운암(助運菴)을 중건하고 광무 정유(丁酉)년에 대원장로가 간사 덕월과 더불어 우담, 운허, 보우 등 여러 스님들이 같이 원하니 협심하여 수 년에 걸쳐 심검당을 세워 준공하였으며 또 칠성각을 세웠다. 계묘년 3월 회운선사(會雲禪師)가 설선당을 중건하고 만일회를 설치하였다.

정미(丁未)년 12월 화엄암이 재해를 입어 기유년 9월 복건하였는데 2년에 걸쳐 준공하였다. 갑인(甲寅)년 4월 진영각(眞影閣)을 새로 지어 선사들의 영정 12위를 설치하였으며 을묘(乙卯)년 중추에 법당과 누각을 중수하고 단청까지 겸하였다. 병진(丙辰)년 2월 영남호남 간에 모든 절에 있는 장경판을 새로 인쇄하였으며 4집 4교 대교 등 중요 불교 서적을 경내 4사에 널리 퍼뜨렸다.

정사(丁巳)년 8월에 섬돌을 깎아 도량을 증축하고 다시 청룡 등 북편을 매입하여 약간의 토지에 종수 수 만본을 중창 기념으로 심었다. 기미(己未)년 3월 절터 안의 산림 수십 정을 논밭으로 개간하였으며 절의 토목 역사를 정유(丁酉)년부터 경신(庚申)년 가을까지 하여 마쳤다. 24년 사이에 백 번 모두 일어나고 그 공이 매우 크다. 글쓴이는 말한다. 본사의 위관과 영적은 회운장로(會雲長老)에 이르러 더욱 나타났으니 후세의 모범이 되며 가히 참된 부처님 은혜에 보답했다 하리라. 많은 사문을 짓고 방행(方行) 등 자실상구하여 마침내 장로같이 갖추어 자기 몸을 돌보지 않으니 어찌 감탄하지 않으리오. 불일이 서쪽으로 넘어가도 조금도 부끄러울 것이 없음이 사실이다. 그러므로 비를 세워 그 공을 기린다.

불기 2948년 신유(辛酉) 3월 일

구산사문 영호 박한영(朴漢永) 근기

단산거사 진주 심지황(沈之潢)

[朝鮮江原道三陟郡未老面頭陀山天恩寺紀實碑按寺之位置關東陟州治之西有曰頭陀山以金剛爲近祖以五坮山爲中祖朶朶芙蓉歸然爲東海屛障據此山有四名刹天恩寺居甲焉寺之三面皆阻獨一東路敞開數曲淸溪由未老洞士屯灘與九房山下五十川□合循竹西樓前湊入佛來浦其外卽大洋也佛來浦者傳言在昔西來石艦藏佛骨而泊諸斯津移安葛來山故因名云爾按寺之名義沿革者有四其一白蓮坮開山祖頭陀三禪自西國來駐山之四隅創阿蘭若東曰靑蓮坮卽池上寺也今廢南曰金蓮坮卽靈隱寺也北曰黑蓮坮卽三和寺也西曰白蓮坮卽此寺也其二看藏寺麗祖忠烈王時學士李承休退隱海上卜築精舍于寺內看讀大藏經數周爲後代記念改寺榜看藏其三黑岳寺ズ朝鮮淸虛大師自楓岳來寓重建殿宇因主峰靑黑故改寺榜黑岳其四天恩寺邞近光武三年皇室追封穆祖大王考髖大墓所蘆洞東山置本寺摠攝使禁護仍賜天恩額按寺之故實距今一千九十三年前新羅興德王四年卽唐文宗太和三年己酉西國高僧頭陀三禪初創本寺存其山名或稱梵日國師入唐而還營建챍山金華三和三寺之際亦創本寺云然恨無年代可攷按寺之境界東距石灘西至念佛岩南連辛梨谷北接古基谷ズ麗朝初光宗二年卽後周太祖元年辛亥因廢重建忘失主事人名厥後寺荒入藤蘿者百有餘年至麗中文宗時代有虞人帶弓逐獐忽瞻佛宇殘立棘叢中深爲感省遂作沙門號曰道眼修法殿築禪堂而居之麗季恭愍王師懶翁和尙以本鄕不遠久任此山留鎭齒衣其後齒而藏塔衣而封函作山中秘寶及朝鮮宣祖壬辰兵亂寺塔沒成劫灰唯殿宇一棟僅存奧己亥春淸虛大師自金崗而來住其門徒性允靈運結禪社數百人於是大興殿宇其名曰應眞殿白蓮堂靑蓮堂東別堂說禪堂尋劒堂梵鍾樓其所傑構儼爾化城肅宗四十二年丙申全寺回祿明年丁酉道悅致明兩上人爲主事新造禪僧兩堂與東別堂又明年己亥重修極樂殿又辛丑作梵鍾樓丹?殿堂煥然一新英祖四十八年壬辰攻石作層階美觀大成憲宗七年辛丑雪松體還捐己財重修佛宇禪堂丙午瑞華重建鍾樓哲宗十一年庚申華岳愚學嗣葺法宇太上二十五年戊子應河禪師重建助運庵光武丁酉大圓長老與幹事德月雨潭雲虛寶雨諸師同願炬心營建尋劍堂至數年竣功又建七星閣癸卯三月會曇禪師重建說禪堂設万日會丁未十二月華嚴庵煉己酉九月復建至再明年完事甲寅四月新建眞影閣設先師影幀十二位乙卯仲秋重修法殿與樓閣兼完丹丙辰二月燹歷嶺湖間藏版諸寺新印四集四敎大敎等重要佛籍廣布境內四寺丁巳八月增築道場石黼更於靑龍嶝北便買入若干町土地種樹數万爲重創記念己未三月於寺林內墾稻田數十町庚申秋寺之土木役方畢自丁酉至庚申二十四年之間百度俱興其功甚大記者曰本寺之偉觀靈蹟至會曇長老而益顯爲后世模範而可謂眞報佛恩也凡作沙門方行等慈實相究竟悉如長老而不已曷嘆佛日之傻西有實如是而可無愧于立石頌功

佛紀二千九百四十八年辛酉三月日

龜山沙門映湖漢永謹記

丹山居士眞珠沈之潢書

夫物之興廢關於數而惟系乎人之盛衰也故物不得外人而存人不得外物而成然則物之興廢人之盛衰豈非氣數之所關歟盖此寺之創自佛紀一八五一至今一千九十三年之久而滄桑累變幾廢幾存不有其人安能不廢而間有修補乎幸有大師會曇者與老少諸衲成立貯金已五個年幾至數千풏金矣因謀於衆曰本寺創立據今千有餘年無遺蹟片石只有楮毫記事異代不一實遺訝惑於來世矣願此貯金不以派□捐資事蹟碑之冗費如何僉議徇□經始石役各刹禪師一方人士?誠慶助又以武士士屯內未老里助役運搬不日而成此實物之緣人以成者能合乎氣數也哉不勝感發略記其事如此云爾

住持混海漢宗謹識

貯金會員

會長趙會曇 財務鄭道禧 鄭西湖 金心照 朴仁順 崔永坦 趙定昊 沈永仁 崔在鎭 李尙善

慶助員

月精寺中

住持洪□龍 監務李元田 法務鄭五常 監事□□□ 書記趙定昊

三和寺中

姜鶴松 鄭奉根

靈隱寺中

住持文武翰

新興寺中

住持權泰厦

□□德寺中

咸鍾洹 洪仁鉉 白南薰 鄭然重 曺秉來 崔達植

山中□

大圓亘璇 □友武翰 會曇宗涵 混海漢宗 圓潭周淵 頭峰常心 華山仁順 影月竺昕 元田愚榮 映潭完周 翠山心照 慧山永坦 南湖定昊 比丘永仁

宥宗 在昕 在鎭 道禧 祥雨 定郁 斗翊 孝信 達順]

[현황]

원래 세워져 있던 자리의 천은사 기실비 지대석은 정비하는 과정에서 훼손되었고, 현재 천은사 기실비 주위에 낮은 축대를 쌓아 보호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비석 내용은 천은사 창건 관련 설화와 연혁 및 중수 과정, 그리고 인근의 준경묘·영경묘 수축과 관련하여 천은사를 조포소로 지정한 내용 등을 자세하게 알려주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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