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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700337
한자 三陟陟州東海碑-平水土讚碑
영어공식명칭 Samcheok Cheokjudonghaebi Mounment and Pyeongsutochanbi Mounment
이칭/별칭 척주동해비,대한평수토찬비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유적/비
지역 강원도 삼척시 미수2길 17[정상동 108-1]
시대 조선
집필자 이상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662년(현종 3) - 삼척척주동해비 건립
건립 시기/일시 1904년(광무 8) - 대한평수토찬비 건립
이전 시기/일시 1710년(숙종 36) - 삼척척주동해비 이전
이전 시기/일시 1969년 12월 6일 - 삼척척주동해비 이전
보수|복원 시기/일시 1709년(숙종 35) - 삼척척주동해비 보수
관련 인물 생년 시기/일시 1595년 12월 11일 - 허목 출생
관련 인물 몰년 시기/일시 1682년 4월 27일 - 허목 사망
문화재 지정 일시 1971년 12월 16일연표보기 - 삼척척주동해비및평수토찬비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8호로 지정
문화재 지정 일시 2021년 11월 19일 - 삼척척주동해비및평수토찬비 강원도 유형문화재 재지정
현 소재지 삼척척주동해비및대한평수토찬비 - 강원도 삼척시 허목길 13-7 지도보기
성격 기적비
관련 인물 허목
재질 오석|화강암
크기(높이, 너비, 두께) 척주동해비: 높이 175㎝×너비 76㎝×두께 23㎝|대한평수토찬비: 높이 145㎝×너비 72㎝×두께 22㎝
소유자 국유
관리자 삼척시
문화재 지정번호 강원도 유형문화재

[정의]

강원도 삼척시 정상동 육향산에 있는 비석.

[개설]

삼척척주동해비및평수토찬비강원도 삼척시 정상동육향산 정상부 일대에 위치하며, 1971년 12월 16일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8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강원도 유형문화재로 재지정되었다.

[건립 경위]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는 조선시대 삼척부사 허목(許穆)[1595~1682]이 1661년(현종 2)에 세운 비석(碑石)이다. 허목이 1660~1662년 부사로 재임하고 있던 당시 동해 바다의 조수가 시내까지 들어오고, 여름철 홍수로 인하여 삼척시의 젖줄인 오십천(五十川) 하구가 막히고 범람하여 가옥과 농작물이 유실되는 등 주민들의 피해가 극심하였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허목은 자연재해를 예방하고 피해가 없기를 염원하기 위하여 철학의 극치와 신비로운 문장으로 ‘동해송(東海頌)’을 짓고 독특하고 웅혼한 전서(篆書)로 비문(碑文)을 써서 정라(汀羅) 만리도(萬里島)[지금의 정라동 큰방파제 끝]에 ‘동해비(東海碑)’를 세웠다. 이후 자연도 이 신비로운 문장의 위력과 덕화(德化)에 감동되었는지 조수의 피해가 없어졌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 비석을 조수를 물리치는 위력이 있는 신비한 비석이라 하여 일명 ‘퇴조비(退潮碑)’ 또는 ‘진동비(鎭東碑)’라고도 불린다.

그 후 중간에 풍랑에 의하여 비석이 부러져서 바닷물에 빠지자 허목이 이 소식을 듣고 고쳐 썼다. 1709년(숙종 35) 부사 홍만기(洪萬紀)가 허목의 문하생 한숙(韓塾)[1646~1710]의 처소에서 비석의 원문을 구해 모사하여 죽관도(竹串島)[지금의 육향산]에 다시 세우고, 1710년(숙종 36) 부사 박내정(朴乃貞)이 죽관도 동쪽 기슭으로 비각(碑閣)까지 짓고 옮겨 세웠다. 1969년 12월 6일 현재의 위치인 육향산(六香山) 정상으로 옮겨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척주동해비허목의 학문 세계인 6경 중심의 고학(古學)이 응축되어 있는 작품이다.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즉 동해를 칭송한 부분, 중국 주변의 여러 종족[오랑캐] 소개와 그들의 교화 과정을 설명한 부분, 오랑캐를 교화시킨 옛 성인을 찬양한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다시 말해서 ‘옛 성인의 도’를 칭송하는 내용이라 할 수 있다

대한평수토찬비(大韓平水土讚碑)는 1660년(현종 원년) 삼척부사로 부임한 허목이 짓고 쓴 것이다. 당시 허목이 중국형산(衡山)에 있는 하(夏)나라 시조 우제(㝢帝)가 썼다는 형산비(衡山碑)에서 대우수전(大禹手篆) 77자 가운데 48자를 모아 목판에 새긴 것이다. 임금의 은총과 수령으로서 자신의 치적을 기렸다. 240여 년이라는 오랜 기간 읍사(邑)[군청]에 목판으로 보관해 오다 1904년(고종 41) 9월 칙사(勅使) 종2품 강홍대(康洪大)[1867~?]와 삼척군수 정운석(鄭雲晳)[?~1942] 등이 고종의 명을 받아 돌에 새겨서 죽관도(竹串島)[지금의 현 위치인 육향산]에 건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위치]

삼척척주동해비및평수토찬비는 강원도 삼척시 미수2길 17육향산 정상부에 위치하고 있다.

[형태]

척주동해비는 오석(烏石)으로 만들어졌다. 비신(碑身)의 형태는 뚜껑돌[개석(蓋石)] 없이 윗부분을 일직선으로 밋밋하게 처리하고, 양 모서리에 각이 진 직수형(直首形)에 가깝다. 비석 받침인 비좌(碑座)는 화강암으로 만든 사각형[방형(方形)]이며, 연꽃무늬와 구름무늬가 전반에 걸쳐 장식되어 있다. 비의 크기는 높이 170㎝×너비 76㎝×두께 23㎝이다.

대한평수토찬비 역시 오석으로 만들어졌으며, 비신 형태는 뚜껑돌 없이 윗부분을 밋밋한 곡선상으로 처리하고 양 모서리 쪽으로 각이 길게 져 내려오는 규수형(圭首形)에 가깝다. 비석 받침인 비좌는 사각형으로, 화강암재로 만들었다. 비의 크기는 높이 145㎝×너비 72㎝×두께 22㎝이다.

[금석문]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

영해망양(瀛海漭瀁) 백천조종(百川朝宗) 기대무궁(其大無窮)

동북사해(東北沙海) 무조무석(無潮無汐) 호위대택(號爲大澤)

적수계천(積水稽天) 발휼왕예(渤潏汪濊) 해동유애(海動有曀)

명명양곡(明明暘谷) 태양지문(太陽之門) 희백사빈(羲伯司賓)

석목지차(析木之次) 빈우지궁(牝牛之宮) 일본무동(日本無東)

교인지진(鮫人之珍) 함해백산(涵海百産) 한한만만(汗汗漫漫)

기물휼궤(奇物譎詭) 완완지상(宛宛之祥) 흥덕이장(興德而章)

방지태주(蚌之胎珠) 여월성쇠(與月盛衰) 방기승비(旁氣昇霏)

천오구수(天吳九首) 괴기일고(怪夔一股) 표회차우(颷回且雨)

출일조돈(出日朝暾) 교알현황(轇軋炫煌) 자적창창(紫赤滄滄)

삼오월영(三五月盈) 수경원영(水鏡圓靈) 열숙도광(列宿韜光)

부상사화(扶桑沙華) 흑치마라(黑齒麻羅) 촬계보가(撮髻莆家)

단만지호(蜑蠻之蠔) 조와지후(爪蛙之猴) 불제지우(佛齊之牛)

해외잡종(海外雜種) 절당수속(絶黨殊俗) 동유함육(同囿咸育)

고성원덕(古聖遠德) 백만중역(百蠻重譯) 무원불복(無遠不服)

황재희재(皇哉熙哉) 대치광박(大治廣博) 유풍막재(遺風邈哉)

대한평수토찬비(大韓平水土贊碑)

구여망가익보승제(久旅忘家翼輔承帝)

노심영지부사흥제(勞心營智裒事興制)

태화지정지독기평(泰華之定池瀆其平)

처수분록어수발형(處水犇麓魚獸發形)

이망불형신울소새(而罔弗亨伸鬱疏塞)

명문여정영식만국(明門與庭永食萬國)

[현황]

척주동해비는 현재 전면에 ‘척주동해비각(陟州東海碑閣)’ , 후면에 ‘동해비각(東海碑閣)’이라고 쓴 제액(題額)이 걸려 있는 비각(碑閣) 안에 세워져서 보존되어 있다. 대한평수토찬비는 현재 비 전면에 ‘우전각(禹篆閣)’이라고 쓴 제액이 걸려 있는 비각 안에 세워져서 보존되어 오고 있다.

[의의와 평가]

척주동해비허목의 학문 세계가 응축되어 있는 작품으로, 조선 후기 당시 중국에서도 한나라 이후 허목의 전서체를 따라 올 자가 없다고 높게 평가하였다. 이뿐만 아니라 조선 사대부들 간에서도 문장 역시 “고문에서 제일이다”라는 평가를 얻었다. 서체와 문장 등에서 매우 중요한 가치와 의미가 있다. 대한평수토찬비 역시 독특한 전서체로 쓴 작품으로, 척주동해비와 함께 한국서예사에서 위상은 매우 높다. 중국의 글씨와 뚜렷이 구별되는 창조성이 반영되어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가치와 의미가 있는 금석문 자료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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