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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700326
한자 三陟 恭讓王陵
영어공식명칭 Royal Tomb of King Gongyang in Samcheok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유적/능묘
지역 강원도 삼척시 근덕면 궁촌리 178[공양왕길 43-21]
시대 고려
집필자 김도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문화재 지정 일시 1995년 9월 18일연표보기 - 삼척공양왕릉 강원도 기념물 제71호 지정
문화재 지정 일시 2021년 11월 19일 - 삼척공양왕릉 강원도 기념물 재지정
현 소재지 삼척공양왕릉 - 강원도 삼척시 근덕면 궁촌리 178[공양왕길 43-21] 지도보기
성격
관련 인물 공양왕
봉분 크기/묘역 면적 3203㎡
문화재 지정번호 강원도 기념물

[정의]

강원도 삼척시 근덕면 궁촌리에 있는 고려시대 공양왕의 능.

[개설]

삼척공양왕릉강원도 삼척시 근덕면 궁촌리 추천마을고돌재에 있다. 공양왕릉, 동생 묘, 아들 묘, 말 또는 시녀의 무덤으로 여겨지는 봉분 1개를 포함하여 총 4개의 무덤으로 구성되어 있다. 기존에 전하던 공양왕릉 묘역을 광복 이후인 1977년 삼척군수 원낙희, 근덕면장 최문갑이 현재의 봉분 형태로 정비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당시 이를 정비하면서 기초 발굴을 시도하였지만 마을 노인들의 반대로 정확한 분묘 내부 현상 파악을 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위치]

삼척공양왕릉강원도 삼척시 근덕면 궁촌리 178 추천마을고돌재에 있다.

[변천]

고려 말인 우왕 때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단행하여 우왕을 폐위시키고 당시 실권자 최영(崔瑩)[1316~1388]을 제거한 후 우왕의 아들을 왕으로 내세웠다가 창왕을 신돈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폐위한 후 살해한다. 당시 정치 권력과 군사권을 장악한 신흥 무인 세력과 급진 사대부들은 자신들의 정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왕족 가운데 신종의 7세 손으로 정원부원군균(鈞)의 아들이고, 성품이 온유하고 우유부단하며 이성계와는 사돈 관계에 있고 왕위에 오르지 않겠다고 눈물을 흘리며 거절한 요(瑤)를 1389년에 임금으로 추대하였다. 바로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1345~1394]이다.

1391년(공양왕 3) 조준(趙浚)[1346~1403]의 건의로 과전법을 실시하고 녹제와 전제를 개혁하여 신흥 세력의 경제 기반을 마련한 후 이성계 일파를 반대한 정몽주(鄭夢周)[1337~1392]가 살해되자 이듬해인 1392년(공양왕 4)에 조준, 정도전(鄭道傳)[1342~1398], 남은(南誾)[1354~1398] 등은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이로써 공양왕은 폐위되었고, 고려 왕조는 막을 내렸다.

1392년 조선이 건국되자 공양왕은 원주로 방치되었다가 8월 7일 간성군으로 추방되면서 공양군(恭讓君)으로 강등되었고, 공양군의 동생 우(瑀)는 귀의군(歸義君)으로 강등되어 마전군에서 고려 왕가인 왕씨의 제사를 주관하게 되었다. 또 고려의 왕대비(王大妃) 안씨는 의화궁주(義和宮主)로 강등되었다.

조선 태조 이성계는 이후 공양왕 등을 앞세운 모반의 기운이 있다는 신하들의 상소가 이어지자 1394년(태조 3) 3월 14일 공양군, 공양군 동생 우, 공양군 아들 석(奭) 세 명을 삼척 지역으로 옮겨 안치시켰다.

신하들이 계속 공양왕 등 세 명을 포함한 왕씨들을 제거하여 종사(宗社)의 안정을 도모해야 한다는 거듭된 상소가 있었지만 이성계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거듭된 신하들의 상소와 공양군을 앞세운 모반 계획을 접한 이성계는 마침내 삼척 지역에 있는 공양군에게 교지를 전하고 그와 두 아들을 교살하게 하였다.[사약을 내렸다는 설도 있다.]

과거 삼척 지역에 속하여 있던 동해시삼화사에서 매년 10월에 국행수륙재를 설행하고 있다.

삼화사에서 설행되고 있는 국행수륙재의 기원은 조선의 건국 시기로 올라간다. 조선의 개국 과정에서 고려 마지막 왕 공양왕을 비롯한 고려 왕족을 강원도 삼척부로 유폐시켰다가 교살시키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민심의 동요가 심각한 상황에 이르게 되자 지역의 민심을 달래고 억울하게 죽어간 고려 왕실 왕족과 무주유주(無主有主) 고혼들의 추천(追薦)을 위하여 국행으로 삼화사에서 수륙재를 베푼 것이 시원이다. 즉 삼화사에서 국행수륙재를 처음으로 개최한 것은 1394년(태조 3) 공양왕이 삼척에서 교살된 시기, 즉 그해 가을이다. 그 이듬해인 1395년(태조 4) 2월에는 매년 봄과 가을에 국행수륙재를 지내게 하였다는 것은 이곳 삼척과 공양왕릉의 관련성을 더욱 강하게 인식할 수 있는 토대가 되고 있다.

공양왕릉과 관련한 기록이 실려 있는 지리지는 현재 허목(許穆)[1595~1682]이 쓴 『척주지』에 처음 나타난다. 이후 편찬된 김종언(金宗彦)『척주지』『관동읍지』, 심의승(沈宜昇)이 1916년에 편찬한 『삼척군지』 1940년에 편찬된 『강원도지』 광복 이후 편찬된 최만희(崔晩熙)『척주지』『진주지』 등이다.

가장 오래된 기록인 허목『척주지』에 소개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추라(楸羅)는 부에서 가장 멀어 40리이다. 추라에는 고총(古塚)이 있는데 그것을 왕릉이라 부른다고 한다. 추라 위쪽은 궁촌(宮村)이고 또 궁촌 위쪽에는 궁방사(宮傍寺)라는 절이 있는데 옛 영은사이다. 지금 궁촌의 논밭 사이에는 궁터라고 지칭하는 곳이 있으나 깨진 주춧돌, 무너진 담장, 깨진 기왓장 등은 하나도 없다. 부로(父老)들이 전하기를 고려가 망하자 공양왕이 처음에는 원주에 유배되었다가 나중에 간성으로 옮겨졌는데 1394년(태조 3) 갑술년에 삼척에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그 당시 공양왕이 살던 집은 백성의 집에 불과하였고, 사망하였을 때 장례 또한 백성의 장례에 불과하였다.

지금 그곳에는 산지기 한 명이 있지만 다른 일은 하지 않고 관에 일이 있으면 크고 작은 판재(板材)를 만들어 바치는 역(役)을 담당하고 있는데 옛날부터 이러하였다. 혹 처음에는 왕의 묘라 하여 산지기 한 명을 두었지만 나중에 분묘가 폐허화되어 산지기의 할 일이 없어지자 그의 역도 이렇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이 자료를 통하여 이미 조선현종대에 공양왕이 삼척 지역에 유배된 이후 살해된 이야기를 바탕으로 궁촌, 궁방사, 궁터 등 공양왕과 관련된 지명 등 ‘궁(宮)’이 들어가는 형태의 이름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함께 비록 후대에 그 역할이 변질되지만 공양왕의 묘라 하여 산지기 한 명을 두었다는 기록은 이곳 삼척시 궁촌리에 있는 공양왕릉을 국가 차원에서 관리하였고, 이에 지역에서의 위상이나 인식은 상당 수준에 있었을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이후 제작된 각종 지리지 등의 공양왕·궁촌 관련 내용은 앞의 내용을 전재하거나 이의 내용을 기반으로 서술되었다.

『척주선생안』에는 1837년 삼척부사 이규헌(李奎憲)공양왕릉의 봉토를 새로 하였음이 기록되어 있다. 허목『척주지』를 기술할 당시에는 폐허화된 분묘를 이규헌 부사가 봉토를 새로 수축하였다는 사실은 민간뿐만 아니라 관청 차원에서도 이에 대한 관심이 계속되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기존에 전하던 공양왕릉 묘역을 광복 이후인 1977년 삼척군수 원낙희(元珞喜), 근덕면장 최문갑(崔文甲)이 현재의 봉분 형태로 정비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당시 이를 정비하면서 기초 발굴을 시도하였지만 마을 노인들의 반대로 정확힌 분묘 내부의 현상 파악은 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공양왕을 위한 제례는 살해당한 4월 27일 지내며, 마을에서는 서낭제사에 앞서 공양왕릉에 먼저 술을 올린 후 마을고사를 지낸다고 한다.

[형태]

공양왕릉공양왕의 동생·아들 2명의 묘, 그리고 말 또는 시녀의 무덤으로 여겨지는 봉분 1개를 포함하여 총 4개의 무덤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가운데 가장 큰 무덤이 공양왕릉이다. 공양왕릉은 별도의 둘레돌[호석(護石)]이나 문인석은 없고 제물 진설을 위한 직사각형[장방형(長方形)]의 상돌[상석(床石)]이 공양왕릉 앞에 놓여 있다.

[현황]

고려 공양왕릉은 전국에 세 곳이 있다. 1394년 삼척에 유배되어 교살된 삼척시 근덕면 궁촌에 공양왕릉으로 불리는 왕릉이 있다. 또 사적 제191호로 지정된 고릉(高陵)이 경기도 고양시 원당읍에 있다. 이곳은 공양왕의 부인 노씨의 고향이다. 그리고 오랜 기간 유배 생활을 한 강원도 고성에 있다. 고성에는 공양왕과 함부열(咸傅熱) 관련 이야기가 전한다. 이에 따라 공양왕릉의 위치에 관한 논란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허목『척주지』공양왕릉을 관리하는 산지기를 두었다는 기록, 19세기 때 부사 이규헌삼척공양왕릉을 수리하였다는 기록을 통해 공양왕의 무덤이 삼척 지역에 있음을 잘 보여 준다.

삼척공양왕릉은 1995년 9월 18일 강원도 기념물 제71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강원도 기념물로 재지정되었다.

[의의와 평가]

강원도 삼척시 근덕면 궁촌에 있는 공양왕릉은 삼척 지역이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이 유배를 왔다가 교살됨으로써 고려의 멸망을 지켜본 곳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미로에 조선태조이성계의 5대조인 양무장군과 그 부인묘인 준경묘·영경묘가 있어서 조선 왕조가 태동한 곳이라는, 즉 고려 멸망과 조선 성립을 함께 간직한 유서 깊은 지역임을 보여 주는 유적이다. 이와 함께 인근의 삼화사에서는 조선 개창 과정에서 희생된 공양왕을 비롯한 많은 사람의 영혼을 위로하여 안정되고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고, 다른 한편으로는 고려와 조선의 화해를 염원하는 의미에서 국행수륙재를 설행하였다. 이를 통하여 삼척시는 고려 멸망과 조선 개창이라는 갈등 요소를 극복하고 소통과 화합을 이룬 문화 전통의 유서 깊은 곳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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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2.03 업데이트 도로명 주소 업데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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