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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동 갈야산 고분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700321
한자 城北洞葛夜山古墳群
영어공식명칭 Seongbukdong Galyasan Ancient Tombs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유적/고분
지역 강원도 삼척시 성북동 산5-1
시대 고대/남북국 시대
집필자 이상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59년 - 성북동 갈야산 고분군 국립중앙박물관이 긴급 수습 조사 실시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95년 - 성북동 갈야산 고분군 가톨릭관동대 박물관 긴급 발굴 조사 실시
소재지 성북동 갈야산 고분군 - 강원도 삼척시 성북동 산5-1 지도보기
성격 고분
양식 옹관묘|수혈식석곽묘|횡구식석실묘

[정의]

강원도 삼척시 성북동 갈야산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 고분군.

[개설]

삼척시의 진산(鎭山)으로 알려진 성북동 북편의 갈야산 일대에 위치해 있는 신라 고분군이다. 1959년 삼척김씨 시조묘실직군왕릉(悉直郡王陵)[강원도 기념물 제15호]으로부터 북쪽으로 약 100m 떨어진 농경지에서 돌무더기를 제거하다 토기편들이 발견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 의해 긴급 수습 조사가 이루어져 알려지게 되었다. 유구는 조사 전에 이미 파괴되어 무덤의 정확한 구조나 규모, 유물의 위치 등은 파악할 수 없었다. 출토 유물로는 굵은고리금귀걸이 및 유리옥·곡옥 등 장신구, 굽다리접시 및 바리모양토기[발형토기(鉢形土器)] 등 토기류, 철제 말재갈과 심장모양말띠드리개[심엽형행엽(心葉形杏葉)] 등 마구류, 약간의 인골편 등이 있다. 보고자는 출토 유물과 유구 상황을 참조하여 5~6세기경 신라계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으로 추정하였다. 1987년에도 실직군왕릉 서쪽 약 100m 지점 아래에서 장경호 3점·굽다리접시 3점·쇠도끼 1점·철제편 2점 등이 출토된 바 있다.

그후 1995년에 이르러 갈야산 정상부 일부와 동북쪽 사면 일대에서 상수도 배수지 확장 공사를 하고 있을 때 고분이 파괴되면서 많은 토기편과 인골편이 발견되어 가톨릭관동대 박물관에 의하여 긴급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다. 무덤 유구는 독무덤을 제외하고 모두 파괴된 상태로 확인되었다. 구덩식 돌널무덤[수혈식 석곽묘(竪穴式 石槨墓)] 및 앞트기식 돌방무덤으로 추정되는 고분 7기와 독무덤 2기 등 모두 9기의 고분이 조사되었다. 조사 결과 토기류·귀걸이·철기류 등 약 50여 점의 유물과 인골편이 출토되었다.

[위치]

성북동 갈야산 고분군강원도 삼척시 성북동 산5-1 일원 갈야산(葛夜山)[해발 111m]에 위치하고 있다.

[형태]

1995년에 발굴된 고분에서는 돌널무덤[석곽묘(石槨墓)]이나 돌방무덤[석실묘(石室墓)] 위의 천장돌[개석(蓋石)]과 봉분 흔적은 확인되지 않았다. 정상부를 중심으로 북쪽·북동쪽·동쪽으로 이어지는 능선 상에 등고선 방향을 따라 축조되었다. 경사면을 ‘L’자상으로 굴착한 묘광에 석회암 깬돌[할석(割石)]을 사용해 네 벽을 5~11단 정도로 쌓았다. 매장주체부는 길이 300~360㎝의 중형급과 270㎝의 소형급에 해당되는 것들이며, 평면 형태에 따라 가는직사각형[세장방형(細長方形)]과 직사각형[장방형(長方形)]으로 구분된다. 바닥에는 점토와 소형 깬돌을 깔았으며, 일부는 둥글납작한 작은 냇돌을 깔아 상면으로 이용하였다.

유물은 양 단벽에 마련된 부장칸 내 또는 발치 쪽과 머리 쪽 단벽 부분에 주로 토기류를 부장하고, 철기류는 상면 중앙부의 장벽 부분에 붙여서 부장한 경우가 많다. 출토 유물로는 굽다리접시[고배(高杯)]·뚜껑접시[개배(蓋杯)]·단경호·장경호 등 토기류, 쇠화살촉[철촉(鐵鏃)] 등 무구류, 굵은고리금귀걸이[금제태환이식(金製太環耳飾)]·가는고리금동귀걸이[금동제세환이식(金銅製細環耳飾)] 등 장신구류, 쇠낫[철겸(鐵鎌)]·쇠손칼[철도자(鐵刀子)] 등 농공구류가 있다.

앞트기식 돌방무덤[횡구식 석실묘(橫口式石室墓)]인 5호묘의 경우 시상면에 3~4명의 인골이 남아 있었다.이는 남서쪽 단벽에 설치된 횡구부를 통하여 시기 차를 두고 몇 차례 추가장(追加葬)된 것으로 보인다. 또 9호 독무덤[옹관묘(甕棺墓)]은 길이가 90㎝ 정도이고, 내부에 자갈돌을 1~2겹 정도 깔고 어깨 부분에 토기 2점을 부장하였으며 납작한 깬돌로 옹관 입구를 막은 구조이다.

지금까지의 갈야산 고분군 조사는 일부 농경지 개간이나 개발 공사 도중에 유물이 발견되어 긴급 수습 조사 차원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전체 분포 범위와 성격 및 특징 등을 파악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중형급에 속하는 고분이 상당수 분포하고 있고, 마구류·위세품·무기류 등 유물들이 출토된 점을 감안할 때 갈야산 고분군을 축조한 집단은 5~6세기경 삼척[실직] 지역의 가장 유력한 정치 세력 집단일 가능성이 짙다. 그리고 1987년에 출토된 토기 가운데 굽다리접시와 장경호는 5세기 중반대까지 올라가는 것으로 이 지역에서 출토된 유물 가운데 가장 빠른 것으로 편년되고 있다. 이는 강릉 하시동 고분군과 초당동 고분군 출토 유물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의 것과 비교되며, 이와 함께 경주 황남동과 미추왕릉지구 고분 출토 유물과 같은 양상을 보이고 있어 경주 중심의 신라계 고분 문화가 파급된 것으로 파악된다. 또 6세기 중후반경의 대가야 고령계토기가 출토되어 대가야 멸망 이후 신라의 사민정책(徙民政策) 일면을 살필 수 있다.

[의의와 평가]

삼척 성북동 갈야산 고분군은 삼척 지역에서 가장 대규모로 조영된 중심 신라 고분군이라는 점, 다양한 묘제와 위세품을 포함한 각종 유물이 출토되고 있는 점, 이 지역이 신라의 동해안 북변으로의 진출이 활발히 진행되던 5~6세기경 군사 요충지였다는 점 등에서 삼척 사직동 고분군과 함께 이 지역의 역사 상황과 변동을 반영하고 있는 대표 고분군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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