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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사 홍인걸 왜적참급 허위보고사건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700286
한자 府使洪仁傑倭賊斬級虛僞報告事件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강원도 삼척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배재홍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595년(선조 28)연표보기 - 부사 홍인걸 왜적참급 허위보고 사건 발생
종결 시기/일시 1603년(선조 36)연표보기 - 홍인걸 옥사
성격 사건
관련 인물/단체 홍인걸

[정의]

임진왜란 때 삼척부사 홍인걸(洪仁傑)[1541~1603] 등이 왜군을 체포하여 죽였다고 허위 보고한 사건.

[개설]

1595년 7월 삼척부사 홍인걸 등은 바닷가에 정박한 왜선 한 척을 나포하여 왜군들을 죽였다고 강원감사에게 보고하였다. 그러나 이후 홍인걸 등이 정말 왜군을 죽였느냐, 아니면 포로로 잡혀가다가 도망쳐 돌아온 조선인을 죽였느냐 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논란이 벌어졌다.

[역사적 배경]

임진왜란 때 왜군은 수만 명의 조선인을 포로로 잡아갔다. 그런데 포로로 잡혀가던 조선인 가운데에는 몰래 도망쳐서 배를 타고 돌아오는 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가끔 왜군으로 오해를 받기도 하였다. 1595년(선조 28) 7월에 일어난 삼척부사 홍인걸의 왜적참급 허위보고 사건도 이러한 시대 상황에서 벌어진 참극이었다.

[경과]

임진왜란이 진행 중이던 1595년 7월 당시 삼척부사 홍인걸과 삼척포첨사 박감(朴瑊) 등은 왜선 한 척이 삼척부 북면 바닷가에 정박해 있어 군대를 풀어 포위해서 모두 붙잡았다고 강원 감사에게 보고하였다. 이와 함께 홍인걸 등은 마침 정선에서 강릉으로 이동하고 있던 강원도 순안어사(巡按御史) 노경임(盧景任)[1569~1620]에게도 이 사실을 알렸다.

영동 지역에 들어 온 노경임은 홍인걸 등의 왜적 체포 사실 전모를 탐문 조사한 후 선조에게 보고하였다. 당시 노경임은 홍인걸과 박감 등이 공상(功賞)을 바라고 왜적에게 포로로 잡혀갔다가 도망쳐 나와 삼척부 가사진(加沙津)에 도착한 우리나라 사람들을 죽이고는 마치 해상에서 전투 끝에 왜군을 죽인 것처럼 강원 감사에게 허위 보고를 하였다고 하였다. 이와 함께 노경임은 이 사건을 조정에서 처리하여 조치하기를 건의하였다.

그러자 8월에 사헌부는 홍인걸이 감사에게 거짓 보고하여 임금을 속인 죄가 매우 무겁기 때문에 본도에서 신문하는 대신 체포하여 신문한 후 법에 따라 죄를 묻자고 하여 선조의 동의를 얻었다. 이에 따라 홍인걸, 박감 등은 의금부에 수금(囚禁)되었다. 이후 홍인걸이 정말 왜적을 죽였느냐 아니면 왜군에게 포로로 잡혀가다가 도망쳐 온 우리나라 사람을 죽였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지루한 진실 공방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홍인걸이 자복하지 않아 이 옥사(獄事)는 미결인 채로 약 8년 동안 끌게 되었다. 그동안 많은 증인이 동원되었으며, 홍인걸은 여러 차례 고신(拷訊)을 당하였다. 1598년(선조 31) 12월 의금부는 홍인걸, 박감 등이 4년 동안 수금되어 있으면서 160여 차례 형벌을 받았다고 하였다. 물론 홍인걸을 구해 내려는 노력도 있었다. 윤근수(尹根壽)[1537~1616]를 중심으로 하는 의금부에서 홍인걸을 구원하려고 노력하였다. 또 삼척 지방 주민들도 대여섯 번 상언(上言)하여 홍인걸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결과]

홍인걸은 약 8년 동안 옥에 갇혀 있으면서 200여 차례의 형신(刑訊)을 받은 끝에 마침내 1603년(선조 36)에 옥사하였다. 반면에 박감 등은 석방되었다.

그런데 홍인걸 옥사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그가 왜적을 죽였느냐 아니면 포로로 잡혀가다가 도망쳐 온 조선인을 죽였느냐는 것이었다. 이에 대한 당시와 후대의 여론을 살펴보면 첫째 홍인걸 등이 실제 왜적을 죽였기 때문에 그는 억울하다고 보는 견해가 있었다. 『척주선생안』에는 홍인걸 옥사를 낙오한 보잘것 없는 왜군 몇 명의 목을 벤 사건이라고 하였다. 또 광해군 대에 삼척부사를 지낸 민인백(閔仁伯)[1552~1626]은 당시 강릉 생원 최삼(崔參)이 홍인걸을 동정하는 시를 지었는데 이 시가 많은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자 홍인걸의 처벌을 주장하는 대론(臺論)[사헌부와 사간원에서 하던 탄핵]이 거듭되어 결국 옥에 갇히게 되었다고 하였다.

둘째 홍인걸 등이 왜적을 죽인 것이 아니라 왜적에게 포로가 되었다가 도망쳐 온 조선인들을 모두 죽였다고 보는 견해이다. 당시 사간원 관원 등 정부 당국자 대부분의 견해였다. 그러나 홍인걸이 왜 조선인을 죽였느냐에 대해서는 공상(功賞)을 탐내서였다는 주장과 실수로 죽였다는 의견이 있다.

민인백은 홍인걸이 처음에는 포로가 되었다가 도망쳐 온 10여 명을 모두 고향으로 돌려보내려고 하였는데 동생 인간(仁侃)이 왜적을 잡았다고 거짓말을 하고 머리를 베어 바치면 쉽게 당상관으로 승급할 수 있다고 유혹하는 꼬드김에 넘어가 조선인들을 모두 죽였다고 하였다. 즉 공상을 바라서 조선인들을 죽였다는 주장이다.

반면에 허목(許穆)[1595~1682]은 『척주지』에서 홍인걸이 포로가 되었다가 도망쳐 온 조선인들을 포박하여 본부(本府)에 데리고 온 용장(龍場) 마을 사람들이 왜적이라고 하는 말을 가볍게 믿고 다 목을 베어 죽였다고 하였다. 즉 실수로 죽였다는 주장이다. 1598년 12월에 의금부에서 홍인걸의 사면을 건의할 때도 홍인걸이 과오로 조선인들을 살해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셋째 홍인걸 등이 당시 왜적뿐만 아니라 왜선에 타고 있던 조선인도 죽였지만 조선인은 홍인걸이 아니라 그의 동생 인간이 술김에 죽였다는 주장이다. 즉 홍인걸은 조선인 살해와 무관하다는 견해이다. 이 주장은 우암송시열(宋時烈)[1607~1689]이 쓴 홍인걸의 묘지명에 보인다.

한편 홍인걸이 약 8년이라는 오랜 기간 투옥되어 있다가 결국 옥사한 것은 그의 사위가 당시 서인(西人)의 영수 정철(鄭澈)[1536~1593]의 아들이었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즉 사돈인 정철이 당시 동인(東人)으로부터 배척당하고 있었는데 그 여파가 홍인걸에게까지 미쳐서 풀려나지 못하였다는 주장이다. 결국 홍인걸이 동인과 서인 간 정치 싸움에서 희생양이 되었다는 견해이다. 또 『척주선생안』에는 홍인걸이 옥에 갇혀 있는 동안 그의 보물을 빼앗았기 때문에 몰래 죽인 것 같다고 하였다.

[의의와 평가]

임진왜란 때 왜군에게 포로로 잡혀가던 조선인 가운데에는 도망쳐 돌아오는 자들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실수 또는 공상을 바라는 욕심에서 참극이 벌어지기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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