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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척 지역의 소금 생산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700284
한자 三陟地域-生産
영어공식명칭 Salt Production in Samcheok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강원도 삼척시
시대 조선
집필자 배재홍

[정의]

조선시대 삼척 지역에서의 소금 생산.

[개설]

조선시대 삼척 지역에서는 해수직자법으로 소금을 생산하였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삼척 지역에 염분이 40개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1662년(현종 3)에 편찬된 『척주지』에는 삼척에 군수용 염분 5개와 구황용 염분이 있다고 하였다. 이를 보면 생산된 소금은 군수 마련을 위한 비용에 충당하고, 기근이 들었을 때 진휼이나 구황에 사용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생산 방법]

인간 생존에 필수인 소금은 조선시대에도 여러 용도로 사용되었다. 군자(軍資) 보충을 비롯한 국가 재정 확보에도 사용되었고, 진휼을 위한 재원 마련에도 사용되었으며, 구황으로도 사용되었다. 이 때문에 정부는 소금 생산과 유통 부문을 관장해서 이익을 독점하기 위하여 각 도의 염분(鹽盆)[소금동이], 즉 염부(鹽釜)[소금솥]를 등급별로 나누어 등록하도록 하였다.

강원도를 비롯한 동해안 지역에서는 소금을 해수직자법(海水直煮法)으로 생산하였다. 즉 자연 그대로의 바닷물을 떠다가 소금솥[염부]에 붓고 바로 끓여서 소금을 만들었다.

세종 때인 1445년(세종 27) 8월 집현전 직제학 이계전(李季甸)[1404~1459]은 동해안에서는 바닷물을 끓여서 소금을 만든다고 하였다. 또 1447년(세종 29) 9월 예조 참의 이선제(李先齊)[1390~1453]는 동해안 지역에서는 바닷물을 가마솥에 넣고 달이어서 하룻밤과 낮을 지나면 하얀 소금이 나온다고 하였다. 이러한 소금 생산에는 많은 연료와 시간이 소모되었을 뿐만 아니라 생산성도 떨어졌다.

[염분과 제염인]

바닷물을 끓여서 소금을 만드는데 쓰는 가마인 염분에는 철분(鐵盆)과 토분(土盆)이 있었다. 염분은 크기에 따른 등급이 있었다. 조선 전기 삼척 지역에는 철분으로 소금을 생산한 것으로 보인다. 1445년(세종 27)에 의염색(義鹽色)에서는 경차관(敬差官)을 삼척에 파견하여 자염(煮鹽)[바닷물을 끓여 소금을 만드는 것]을 시험하였다. 이때 선군(船軍) 60명이 철분 9개로 40일 동안 생산한 소금이 170석이었다. 이 소금을 팔아서 베 73필, 잡곡 32석을 얻고 남은 소금은 20석이었다고 하였다.

여기서 세종대에 삼척 지역에는 적어도 9개의 철분이 있었고, 이 철분을 이용하여 소금을 생산하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1477년(성종 8) 2월 호조 판서 이극증(李克增)[1431~1494]은 삼척에서 수철(水鐵)이 난다며 삼척포 부방선군(赴防船軍) 90여 명 가운데 40여 명으로 하여금 수철을 채취하게 하여 염부 제작에 사용하자고 건의하였다. 이를 보면 삼척 지역의 염분은 철분이 주류를 이룬 것으로 보인다. 물론 철분 외에 토분도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런데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삼척 지역에 염분이 40개가 있다고 하였다. 이에 따라서 1445년(세종 27) 소금 생산 시험에 사용된 9개의 철분은 삼척에 있는 염분 전체가 아닌 일부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한편 1662년(현종 3) 허목이 편찬한 『척주지』에는 삼척에 군수용(軍需用) 염분 5개와 구황용(救荒用) 염분이 있다고 하였다. 구황용 염분이 몇 개였는지는 알 수 없다.

이러한 염분을 이용하여 직접 소금 생산에 종사한 자들은 선군, 즉 수군이었다. 『척주지』에는 군수용 염분 5개의 자염군(煮鹽軍)은 매달 5명이고, 구황용 염분은 가마당 매달 당령군(當領軍)이 1명이라고 하였다. 이를 보면 염분 한 개에 자염군 또는 당령군 한 명이 담당하여 한 달 동안 소금을 계속 생산하였음을 알 수 있다. 물론 한 달이 지나면 자염군과 당령군은 교대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소금 생산에 종사한 자염군은 수군 소속이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당령군이 수군 소속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들어와 정부는 개인이 사사로이 염분을 이용하여 소금 굽는 것을 허용하고 세금을 받았다. 이후 자염군은 모두 소금 굽는 일에 종사하는 대신 쌀이나 소금을 납부해야만 하였다.

[생산 소금의 활용]

삼척 지역의 염분에 군수용과 구황용이 있는 것을 보면 일단 생산된 소금은 군수 마련을 위한 비용에 충당되고, 가뭄으로 기근이 들었을 때는 진휼 또는 구황에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구황용 염분에서는 가마당 소금 2석을 거두어 절반은 구황용으로 쓰고 나머지 절반은 베를 사는 데 사용하였다. 당시 정포(正布) 1필은 소금 36두(斗)였고, 상포(常布) 1필은 소금 18두였다.

물론 생산된 소금 가운데 일부는 사섬시(司贍寺)[조선시대 종이화폐의 발행과 노비가 공납하는 면포를 관장하는 관청]에 세금으로 바쳤다. 세금으로 바치는 액수는 일 년에 포 8필이었지만 윤달이 있으면 포 1척(尺) 1촌(寸)을 더 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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